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1596~1598에서는 ‘1파운드의 살one pound of flesh’을 둘러싸고 법정 싸움이 벌어집니다. 1파운드가 450그램이니까 ‘1파운드의 살’은 대략 ‘살 한 근’ 정도라 할 수 있죠.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다른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 잊었어도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Shylock은 기억하실 겁니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Antonio는 샤일록의 고리대금업을 맹비난하며 샤일록과 대립하던 처지였지만, 친구인 바사니오Bassanio가 샤일록에게 돈을 빌릴 때 빚보증을 서주죠. 돈을 제때 못 갚으면 살 한 근을 떼어주겠다는 조건으로요. 그런데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채무보증서에 적힌 대로 살을 떼어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자칫하면 안토니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바사니오와 갓 결혼한 포오샤Portia가 남장을 하고 법관으로 짠! 하고 법정에 나타납니다. 포오샤는 원금의 몇 배를 돌려주겠다며 샤일록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쓰지만, 샤일록은 채무증서에 적힌 대로 하자며 꿈쩍도 안 하죠. 그동안 자신을 모욕해 왔던 안토니오에게 복수할 좋은 기회였으니까요. 그러자 포오샤가 의기양양해하는 샤일록에게 다음과 같이 일격을 가합니다.
이 증서에는 한 방울의 피도 당신에게 준다고 하지 않았소.
여기 쓰인 말은 분명히 ‘살 1파운드’요.
자, 증서대로 살 1파운드를 떼어 가지시오.
그러나 살을 떼어낼 때
기독교도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당신의 토지와 재산은
베니스의 국법에 따라
베니스 국에 몰수당할 것이오.
―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4막 1장
여러분은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살 때 어떻게 주문하시나요? “돼지 목살 한 근 주세요”라고 하시나요? 아니면 “돼지 목살과 피 한 근 주세요”라고 하시나요? 정육점에서 “돼지 목살과 피 한 근 주세요”라고 하면 아마 정육점 사장님이 ‘별 희한한 사람 다 보네’ 하는 표정으로 여러분을 쳐다볼 겁니다. 일상적으로 ‘살’이란 그 안에 들어있는 ‘피’까지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문제는 ‘살’이라는 말에 ‘피’까지 포함돼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고 산다는 거죠. 샤일록도 그랬을 겁니다. 포오샤가 재판에서 샤일록을 꺾고 안토니오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샤일록이 잊고 있던 사실을 찾아내서 “증서대로”를 고집했던 샤일록에게 “증서대로” 따르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살’은 원래 ‘살과 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일부인 ‘살’이 ‘살과 피’ 전체를 대신하는 말이 됐죠. 이렇게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법이 환유換喩, metonymy입니다. 은유가 유사성similarity을 토대로 ‘A’ 대신 ‘B’로 대체하는 비유법이라는 건 아직 기억하고 계시죠? 은유는 ‘A는 B다’ 혹은 ‘A는 B와 같다’로 나타낼 수 있죠. 반면에 환유는 ‘A’를 인접성contiguity을 토대로 자연스럽게 연상association되는 ‘B’로 바꾸는 비유법입니다. ‘A’를 가까이 있는 ‘B’로 대체하는 거죠. ‘살’과 ‘피’는 가까이 있기 때문에 ‘살’이 ‘피’를 대체해 버린 겁니다. ‘살과 피’가 그냥 ‘살’로 줄어든 거예요. 어떤 표현이 은유인지 환유인지 알 수 없을 때는 ‘A’와 ‘B’ 다음에 ‘같다’를 넣어서 ‘A는 B와 같다’로 만들어보면 됩니다. 말이 되면 은유고, 이상하면 환유입니다. 예를 들어, ‘저 아이는 내 혈육이다’에서 ‘혈육’은 자식을 의미합니다. 자식은 ‘내 피와 살’을 물려받은 존재죠. 그런데 ‘혈육’은 몸 전체 중 일부분일 뿐입니다.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낸 환유죠. 그런데 은유인지 확인하기 위해 ‘같다’를 집어넣으면 ‘저 아이는 내 혈육과 같다’가 됩니다. 의미가 달라져 버리죠? ‘저 아이는 내 자식이다’가 맞는데 ‘저 아이는 내 자식과 같다’가 되면 ‘저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다’가 되어 버리니까요.
부분으로 전체를 대체하는 환유를 흔히 제유提喩, synecdoche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바다에 스무 개의 돛이 떠 있다’라는 말은 ‘바다에 스무 개의 배가 떠 있다’라는 말입니다. 부분인 ‘돛’으로 전체인 ‘배’를 표현한 거죠. ‘소 20두頭’에서 머리인 ‘두’가 ‘소 한 마리’를 의미합니다. ‘밥 먹자’라는 표현도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한 환유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밥’만 먹지는 않으니까요. ‘국’도 먹고 ‘반찬’도 먹죠. ‘국수’를 먹어도 ‘밥’을 먹는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부분으로 전체를 대체하는 환유의 예는 주변에 차고 넘칩니다.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 같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굳이 은유와 직유를 구분하지 않고, 직유 역시 넓은 의미의 은유로 간주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죠? 환유와 제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환유와 제유를 굳이 구분하지 않습니다. 제유 역시 넓은 의미의 환유로 간주하는 거죠. 이렇게 부분으로 전체를 대체하는 용례 외에도 환유에는 여러 가지 대체 방식이 포함됩니다. 부분으로 전체를 대체하는 것과 정반대로 전체로 부분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머리를 잘랐다’라는 것은 부분인 ‘머리카락을 잘랐다’라는 말입니다. 머리를 잘라버리면 큰일 나죠. 건물이 건물주나 건물의 용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백악관’은 그곳에 사는 ‘미국 대통령’이나 때로는 ‘미국 정부’를 의미합니다. 그릇이나 용기가 내용물을 대체하기도 하죠. 예를 들어, ‘한 상 잘 먹었다’나 ‘한 그릇 먹었다’라는 말은 ‘상에 차려진 음식’이나 ‘그릇 속의 음식’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도구가 직업을 대체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펜으로 먹고산다’라는 것은 직업이 ‘글 쓰는 작가’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수도’가 ‘정부’를 대체하기도 하고, ‘지명’이 그곳의 대표적인 ‘산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워싱턴’은 ‘미국 정부’를 의미하고, ‘할리우드’는 ‘영화 산업’을 나타냅니다. 환유의 용례는 무수하게 이어질 수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분명하죠. 환유가 인접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자, 간만에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다음 중 환유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1. 펜은 칼보다 강하다.
2. 우리는 백의민족이다.
3. 오는 백발을 막대로 막아내려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는구나.
4. 그 사람이 며칠째 코빼기도 안 보인다.
5. 나는 그 일에서 발을 뺐다.
6. 사람은 빵만 먹고 살 순 없다.
7.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우리의 삶을 책임진다.
8.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살짝 헛갈리는 게 있죠? 답은 8번입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에 ‘같다’를 집어넣어 보세요. ‘책은 마음의 양식과 같다.’ 말이 되죠? 말이 되면 은유입니다. 음식이 몸을 살찌우는 것처럼 책은 마음을 살찌우는 수단이니까요. 이것은 유사성을 토대로 한 은유입니다. 1번의 ‘펜’은 글을 쓰는 수단이자 글 쓰는 수단 중 하나고, ‘칼’은 무력을 사용하는 도구이자 무기 중 하나죠. ‘문文’과 ‘무武’를 나타내는 ‘펜’과 ‘칼’은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낸 환유이자 도구로 내용을 나타낸 환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흰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옷으로 사용자를 나타낸 ‘백의민족’은 환유입니다. ‘백발’은 나이 든 사람의 머리에 나 있는 ‘노화’의 상징이고요. ‘코빼기’와 ‘발’은 신체의 일부로 ‘사람’을 대체한 환유입니다. ‘빵’은 ‘음식’의 일부로 전체를 대체한 환유입니다. ‘빵’ 대신 ‘밥’을 넣어도 괜찮습니다. ‘요람’은 아기가 누워있는 곳이니 ‘유년 시절’을, ‘무덤’은 죽어서 누워있는 곳이니 ‘죽음’을 의미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에 대한 환유죠. 예시로 든 환유 모두 ‘인접성’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말이나 글에서 환유를 사용하거나 찾아내는 일이 그렇게 어렵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미술에서는 어떨까요? 그림에도 환유가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것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그림 속에 등장합니다.
먼저 그림을 하나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림 속에서 환유의 예를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다음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725가 그린 『나폴레옹 1세와 조제핀 황후의 대관식프랑스어: Sacre de Napoléon et couronnement de Joséphine à Notre-Dame de Paris, 2 décembre 1804』입니다. 이 그림의 원작은 루브르 박물관1805~1807에, 모작은 베르사유 궁전1808~1822에 있는데 원작의 크기가 높이 6.21m에 폭이 9.79m에 달하는 대작입니다. 작품이 워낙 커서 한 컷에 담기지 않습니다. 줌 기능이 없는 렌즈로 이 그림을 한 컷에 담으려면 뒤로 멀찍이 물러나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전시실 공간이 그렇게 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뒤로 물러나면 넘쳐나는 관람객에 그림이 가려 버립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베르사유 궁전에서도 그림 전체가 나오는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에서는 조제핀의 얼굴이 지나가는 관람객에 가려졌기 때문에 베르사유궁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림 전체를 담진 못했어도 관람객들로 붐비는 베르사유궁의 현장감은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나요? 베르사유궁 관람객들이 마치 대관식을 축하하러 온 하객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사진은 나폴레옹과 조제핀을 확대한 겁니다. 이 그림에서 무엇이 환유일까요?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와 조제핀 황후의 대관식』, 1808~1822년. 캔버스에 유화, 610 × 971 cm. 베르사유궁, 파리. |
왕관을 쓰는 조제핀 부분 확대. |
그림의 제목을 보면 확대된 부분에 있는 두 사람이 나폴레옹과 조제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제목이 무엇인지, 두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왕처럼 보이는 한 남성이 무릎을 꿇고 있는 여성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기 직전 모습을 그린 이 대작 그림에서 환유의 예를 찾는 것이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렵게 느껴지나요? 그럴 리가요. 바늘이 워낙 커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그림 한 가운데 있는 왕관입니다. 제목, 『나폴레옹 1세와 조제핀 황후의 대관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은 왕관을 쓰는 예식인 대관식 장면을 그린 겁니다. 대관식을 통해 나폴레옹이 새로운 왕이 되고, 조제핀이 왕비가 됐음을 알리는 거죠. ‘왕관을 쓴다’라는 말은 ‘왕이 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관’이 ‘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거죠. 아무나 ‘왕관’을 쓰진 않죠? 오직 ‘왕’만이 ‘왕관’을 씁니다. ‘왕’은 (거의) 항상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으니 이런 인접성을 바탕으로 ‘왕관’이 ‘왕의 지위’를 의미하게 된 겁니다. ‘왕관’이 ‘왕의 지위’ 대신 쓰이는 환유인 거죠.
‘왕관’과 더불어 ‘왕의 지위’를 나타내는 환유로 또 무엇이 있을까요? ‘왕좌throne’가 있습니다. ‘왕좌를 물려받다’나 ‘왕좌에 오르다’라는 표현 모두 ‘왕이 되다’를 의미합니다. ‘왕’을 상징하는 또 다른 환유로는 ‘왕홀王笏, scepter’이 있습니다. ‘왕홀’은 ‘왕권의 상징인 지휘봉’이죠. ‘왕홀을 내려놓다’라는 표현은 ‘왕위를 물러나다’라는 의미고 ‘왕홀을 휘두르다’라는 표현은 ‘군림하다’를 의미합니다. ‘왕관’ ‘왕좌’ ‘왕홀’ 모두 ‘왕’ 옆에 있는 물건들로 ‘왕권이나 왕위’를 나타내는 환유입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에 교황 비오 7세Pope Pius VII’를 초청했지만 교황이 왕관을 씌워주기 전에 직접 왕관을 머리에 써버렸습니다. 위 그림에서 나폴레옹은 이미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있고, 아내인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려 하고 있습니다. ‘왕관’을 쓴 나폴레옹의 모습은 위 그림을 통해 살펴봤으니, ‘왕관’인 월계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왕홀’을 쥐고 있는 나폴레옹의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래 그림은 다비드의 제자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가 그린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Napoleon I on his Imperial Throne; 프랑스어: Napoléon Ier sur le trône impérial』1806입니다. ‘왕권’ 혹은 ‘왕위’를 나타내는 환유 3종 세트를 통해 나폴레옹이 황제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그림입니다. 그림 속 남성이 나폴레옹이라는 걸 모른다 해도 주변의 여러 환유를 통해 그가 왕/황제라는 것쯤은 쉽게 유추할 수 있죠. 그런데 나폴레옹이 권위 있게 보이기보다는 환유 3종 세트에 치여서 오히려 위축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나요?
사실 그림을 보면서 은유나 환유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 이건 은유고 저건 환유네. 이 은유는 이런 의미고 저 환유는 저런 의미일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보시나요? 그럴 리는 절대 없겠죠. 그래도 의도적으로라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림의 의미가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겁니다. ‘왕관’을 비롯해 ‘왕좌’와 ‘왕홀’의 환유는 이쯤하고 두 번째 환유의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정강자 :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2023 전시회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에 환유의 예로 딱 좋을 것 같은 작품이 있더군요. 그림 속 어느 부분이 환유일지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정강자, 『뜨개질로 우주를』, 1995~1996년. 캔버스에 유화, 162 × 130 cm.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
이 작품은 정강자1942~2017의 『뜨개질로 우주를The Universe Through Knitting』이라는 작품입니다. 친절한 제목 덕분에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신문 기사에는 이렇게 작품 설명이 돼 있더군요. “팔이 네 개인 여성이 뜨개질로 자아낸 실이 하늘을 덮고 행성을 품는 모습을 그린 『뜨개질로 우주를』1995~1996에서 여성은 거미로 그려진다. 이는 울창한 열대우림 속에서 실을 뜨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거미』1995에서도 공통으로 드러난다. 여러 개의 손으로 전통적으로 여성의 노동이었던 뜨개질을 하는 여성의 모습은 자녀 양육과 화가로서의 야망을 동시에 추구하며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정강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강자는 19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남미, 아마존, 남태평양 등으로 여행을 자주 떠났는데,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은 이국적인 자연과 원시의 모습을 통해 환상과 꿈을 표현하고자 했다” 『경향신문』, 2023년 11월. 이 그림을 이해하는 데는 은유와 환유를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우선, 뜨개질하는 여성을 거미로 표현한 것은 은유입니다. 뜨개질하는 여성을 거미에 비유한 것이니까요. 은유에 관한 앞글에서 은유는 원관념tenor과 보조관념vehicle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매개로 연결된다고 말씀드렸죠. ‘뜨개질하는 여성’은 실로 ‘뜨고weave’, ‘거미’는 실로 ‘얽는다weave’라는 점에서 서로 닮았습니다. ‘거미’는 스스로 짜낸 실로 집을 얽어 만들어내고, ‘뜨개질하는knitting/weaving 여성’은 뜨개질로 우주를 만들어내죠. 거미의 실잣기와 여성의 뜨개질실잣기 모두 예술적인 창조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술적 창조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실잣기’로 비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뜨개질실잣기은 가사노동이면서 동시에 예술 활동이 되는 겁니다.
거미와 뜨개질하는/실 잣는 여성의 연관관계의 원조는 그리스 신화의 아라크네Arachne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라크네는 아테나 여신과 실잣기 시합을 벌이다 신들을 모독한 죄로 거미로 변신 당하는 벌을 받죠. 이것은 표면적으로 신들에게 대적한 오만함에 대한 벌이었지만,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여성의 창조성에 대한 억압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뜨개질하는 여성과 거미의 또 다른 유사성으로 여러 개의 팔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거미에게는 팔이 아니라 다리가 달려 있죠. 실제 거미의 다리는 네 쌍이지만 그림 속의 뜨개질하는 여성에게는 팔이 네 개 있습니다. 위 설명에 의하면, 이 네 개의 손은 “자녀 양육과 화가로서의 야망을 동시에 추구하며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정강자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네 개의 손이 주부로서, 화가로서, 수행해야 했던 작가의 여러 역할을 상징한다는 해석이죠. 이쯤 해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작가가 수행했던 여러 역할을 상징하는 네 개의 팔은 은유일까요? 아니면 환유일까요? 네 개의 팔을 어떤 비유법으로 이해해야 맞을까요?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요.” 일할 사람이 필요할 때 또 하는 말이 있죠. “일손이 필요해요.” ‘농장 일꾼’을 영어로는 ‘farm hand’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들 모두 ‘행위자’를 ‘손’으로 나타내고 있죠. 손은 사실 신체의 일부면서 일을 행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손’이라는 신체의 일부이자 도구로 행위자를 대체하는 거죠. ‘도움의 손길’이나 ‘일손’ 모두 인접성에 기초한 환유입니다. ‘손’은 행위자의 몸에 붙어 있으니까요. 『뜨개질로 우주를』 속 네 개의 손 역시 여성, 혹은 작가가 수행해야 하는 여러 역할을 나타내는 환유죠. 그러니까 사실은 두 개 (이상)의 분신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여성의 모습을 네 개의 손으로 대체해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림 속에 손을 네 개 이상으로 그려 넣었어도 의미가 바뀌진 않을 거예요.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화가로서, 아내로서, 온갖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역할이 손 네 개로 다 함축될 수 없을 테니까요.
손이 네 개인 여성을 그린 『뜨개질로 우주를』을 보다가 문득 손이 천 개인 천수관음보살千手千眼菩薩이 생각났습니다.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고 이끄는 관음보살은 중생의 모든 것을 듣고 보며 보살핀다는 의미에서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진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그런데 천 개의 눈과 손을 그리거나 만들기가 쉬운 일은 아니겠죠. 그래서 보통 42개 정도로 줄여서 표현된다고 합니다. 『뜨개질로 우주를』 속 네 손처럼 천 개의 손과 눈 모두 관음보살이 수행하는 여러 일에 대한 환유라 할 수 있습니다. 천 개의 관음보살 분신이 천 개의 손과 눈으로 대체되어 표현된 것이죠. 『뜨개질로 우주를』이나 천수관음보살상을 보면서 ‘왜 손이 네 개지? 왜 손과 눈이 천 개나 되는 거야?’라는 의문이 든다면 저처럼 ‘저 네 손은 무엇에 대한 비유일까? 또 저 천 개의 눈과 손은 무엇에 대한 비유일까?’로 질문을 바꿔서 생각해 보세요.
십일면천수관음보살좌상, 고려, 14세기. 금동. 덕수 4046. |
이제 환유의 세 번째 예를 살펴볼까요? 먼저 아드리안 판 위트레흐트Adriaen van Utrecht, 1599~1652의 『꽃다발과 해골이 있는 바니타스 정물Vanitas - Still Life with Bouquet and Skull』1614~1652을 보시길 바랍니다.
이 그림에는 꽃과 담뱃대, 진주목걸이, 금화, 금속 잔, 유리잔, 책, 시계들이 해골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 개별 정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해도, 해골 덕분에 죽음과 연관 있는 그림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상기시키는 정물화를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라고 부릅니다. ‘바니타스’는 ‘허무나 헛됨, 혹은 덧없음’을 나타내는 라틴어 단어입니다. 16,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시작된 이 바니타스 정물화의 주제는 ‘인생무상’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림 속 정물 모두가 어떤 식으로건 ‘헛됨 혹은 덧없음’을 상징하겠죠? 담뱃대와 진주목걸이, 금화, 화려한 금속 잔과 유리잔, 시계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책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탁월한 지식을 상징하고요. 이 정물들 모두 부귀영화와 탁월한 지식에 대한 환유라 할 수 있죠. 잘 사는 사람들 옆에는 이런 화려한 물건들이 있고,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 옆에는 책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다발은 어떨까요? 은유일까요? 환유일까요? 꽃은 ‘덧없음 혹은 헛됨’을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피었다 곧 지고 마니까요. 영원히 피어 있는 꽃은 없죠. 부귀영화와 탁월한 지식을 상징하는 온갖 물건들이 해골로 상징화된 죽음 앞에서는 꽃처럼 시들고 마는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해골은 어떨까요? 해골은 은유일까요? 아니면 환유일까요? 해골은 항상 죽음 옆에 존재하는 것이니 ‘죽음’을 ‘해골’로 나타내는 것은 환유입니다. ‘죽음은 해골 같다’라는 문장은 이상하죠? 이 그림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주 선명합니다. 은유와 환유로 표현된 여러 정물을 통해 ‘너는 반드시 죽는다. 죽고 나면 부귀영화도 지식도 소용없다. 그러니 항상 죽음을 생각하면서Memento mori! 짧은 네 삶을 가치 있게 살아라!’라고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이런 메시지를 힘들여 찾아낼 필요도 없습니다. 담뱃대 밑의 종이에 적혀 있으니까요.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전도서 1:2;12:8
이제는 환유의 네 번째 예로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프랑스어: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1830을 살펴보도록 하죠. 워낙 유명해서 이 작품을 모르는 분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이 작품은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입니다. 1830년 샤를 10세Charles X, 1757~1836가 의회를 해산시키고 투표권 대상자를 제한하는 새 선거법으로 재선거를 치르려 하자, 7월 28일 라파예트Marquis de La Fayette, 1757~1834가 이끄는 공화당원들이 무력 봉기를 일으켜서 국왕군과 격돌했죠. 이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쫓겨나고 루이 필리프 1세Louis-Philippe I, 1773~1850가 입헌 군주로 즉위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7월 혁명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림을 통해 혁명에 가담한 시민들의 용감함을 찬양했습니다. 먼저 그림을 보고 환유의 예를 찾아보도록 하죠.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캔버스에 유화, 260 × 325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ug%C3%A8ne_Delacroix_-_Le_28_Juillet._La_Libert%C3%A9_guidant_le_peuple.jpg#/media/File:Eugène_Delacroix_-_Le_28_Juillet._La_Liberté_guidant_le_peuple.jpg 제공. |
루브르 박물관은 항상 관람객으로 넘쳐나기 때문에 작품만 담긴 사진을 찍기가 힘듭니다. 그림 앞에서 관람객들이 사라지길 하염없이 기다려도 소용없습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처럼 유명한 작품들은 작품 사진만 찍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이 그림의 의미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분이 설명했기 때문에 저는 환유의 예에 집중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그림은 자유라는 가치를 위해 여러 계층의 시민들이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투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각형 구도를 이루며 무기를 들고 그림 중앙에 서 있는 네 사람 중 가장 크게 그려진 여성은 자유를 상징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각각 다른 계층의 시민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상징하는 여성과 세 사람의 복장에서 공통점을 하나 발견하셨나요? 네 사람 모두 모자를 쓰고 있죠? 그런데 모자가 모두 다릅니다. 모자가 (더불어 복장이) 네 사람의 신분과 신원을 알려주는 단서입니다. 먼저 자유를 상징하는 여성부터 살펴볼까요? 이 여성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마리안Marianne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대개 로마신화의 자유의 여신, 리베르타스Libertas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이 여성이 자유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여성이 쓰고 있는 프리기아 모자프랑스어: Bonnet phrygien가 열쇠입니다. 자유의 여신은 자유의 상징인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그려졌습니다. 프리기아 모자가 자유의 모자라 불리고, 자유를 상징하게 된 것은 고대 로마에서 해방되어 자유민의 신분을 얻게 된 노예들이 이 모자를 썼기 때문이랍니다. 프리기아 모자가 그것을 쓴 사람의 자유로운 신분에 대한 환유가 된 겁니다.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시민들이 프리기아 모자를 즐겨 썼고, 이후 이 모자는 자유에 대한 상징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들라크루아는 자유를 여성으로 의인화한 다음 그녀의 머리에 프리기아 모자를 씌움으로써 그녀가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거죠. 자유에 대한 환유인 프리기아 모자가 그림 속 여성이 자유를 나타내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표식으로 작용합니다. 아놀드 뵈클린Arnold Böcklin, 1827~1901의 『자유의 여신독일어: Die Freiheit』1891에서도 자유가 프리기아 모자를 쓴 여성으로 묘사됩니다. 제목을 보지 않더라도 모자를 보고 그림 속 여성이 자유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아놀드 뵈클린, 『자유의 여신』, 1891년. 캔버스에 유화, 지름 96 cm. 구 미술관, 베를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C3%B6cklin_Die_Freiheit_1891.jpg#/media/파일:Böcklin_Die_Freiheit_1891.jpg 제공. |
프리기아 모자가 자유에 대한 환유라면, 자유의 여신 양옆에 서 있는 세 사람의 모자 역시 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보여주는 환유입니다. 자유의 여신 오른쪽에 있는 남성은 검은색 코트에 넥타이를 매고 실크해트top hat을 쓰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에 상류층과 중산층 남성이 입었던 전형적인 복장이랍니다. 모자를 포함해 복장으로 이 남성이 부르주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부르주아 남성 옆에 서 있는 남성은 작업복에 앞치마를 두르고 베레모를 쓰고 있는 장인匠人입니다. 모자와 복장으로 그가 노동자 계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의 여신 왼쪽의 소년이 쓰고 있는 검은색 벨벳 모자는 학생용 베레모입니다. 이 모자를 통해 그가 귀족의 폭압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어린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림 속 등장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모자와 복장이 각 인물의 신분과 그가 속한 사회 계층에 대한 지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환유의 예로 든 ‘백의민족’처럼, 『민중의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도 모자를 비롯한 복장으로 사용자를 나타내는 환유가 사용된 거죠. 그림 속 각 인물이 들고 있는 무기도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무기는 모자처럼 사용자에 대한 환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부르주아와 사냥총, 노동자 계층과 칼, 학생과 권총에서 인접성에 의한 연관관계를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니까요. 각 인물의 모자와 복장이 사용자가 속해 있는 사회 계층을 보여주는 환유라면, 동시에 그림 속의 각 인물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계층을 대표하는 환유입니다. 그림 속의 노동자와 학생, 부르주아는 개별적인 참여자로서의 의미를 넘어서서 노동자 계층과 학생들, 부르주아 계급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모두 참여했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으니까요. 이것은 부분이 전체를 대체하는 환유입니다. 사실 환유의 예는 그림 속 모든 인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처럼 환유의 예시를 찾는 과정을 그림 속 모든 인물에 대입하면 되니까요.
지금까지 네 작품을 보면서 환유의 예를 찾아봤습니다. 환유가 인접성을 토대로 A를 B로 대체하는 비유법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그림에서 환유의 예를 찾기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숨은 그림을 찾듯 그림에서 은유와 환유를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며 그 의미를 해독하는 과정이 재미있죠? 은유에 관한 앞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1994에서 우편배달부 마리오Mario는 은유 덕에 사랑도 쟁취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도 갖게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데,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환유 덕에 안토니오가 목숨을 건지죠. 은유와 환유로 마리오나 포오샤처럼 거창한 일을 해낼 수는 없겠지만, 작품에서 은유와 환유를 찾으며 작품의 의미를 이해해 가는 소소한 즐거움은 누구나 맛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 같은 미술 초보도 예외가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