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의 이집트 국립 박물관the Egyptian Museum을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진열창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지듯 전시된 수많은 유물이었습니다. 누가 하나 집어 가도 모를 것 같더군요. 새 박물관이 완공됐다는데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직 가보질 못했습니다. 이제는 유물 보안이 강화됐겠죠? 박물관 정원 연못에 자라고 있던 파피루스papyrus 역시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박물관 건물 자체도 그리 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원도, 연못도 아주 아담했습니다. 작은 연못을 키 높이 정도 되는 갈대가 가득 채우고 있더군요. 투어가이드가 파피루스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냥 갈대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넘겼을지 모릅니다.
파피루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yperus_papyrus-pjt3.jpg#/media/File:Cyperus_papyrus-pjt3.jpg 제공. |
말로만 듣던 파피루스를 난생처음 본 거라 마냥 신기하기만 했죠.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파피루스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원주의 뮤지엄 산Museum SAN에는 야외 공간의 온실에서 파피루스가 자라고 있습니다. 정원에는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도 있고요. 미술관에 종이 박물관이 있다 보니 종이와 관련된 식물이 많습니다. 파피루스 온실 앞에 로비 형태의 원형전시장이 있는데 이곳에 백남준1932~2006의 『위성 나무Satellite Tree』1992가 전시돼 있습니다.
백남준, 『위성 나무』, 1992년. 2채널 모니터, 326 × 183 × 94 cm. 뮤지엄 산, 원주. 뮤지엄 산 제공. |
이 작품에는 안테나처럼 생긴 원형의 테두리 안에 TV와 작은 부처상들이 달려 있습니다. 사진으로는 분간하기 어렵지만 네모난 물체는 TV고, 작은 금색 물체는 가부좌를 한 부처상들입니다. (아쉽게도 제가 찍어온 사진들은 외장 하드가 파손되는 바람에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파피루스 온실을 보고 돌아 나와 이 작품 앞에 서 있을 때, 유치원 선생님이 꼬마들을 인솔해서 작품 앞으로 다가오더군요.
“와, 여기 좀 봐요. 신기하게 생겼네요. 텔레비전도 있고 부처님도 보이죠?”
이 말을 끝으로 선생님이 꼬마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하더군요. ‘와, 저게 다라고? 작품 캡션이라도 읽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럴 때면 누구라도 나서서 작품 설명을 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됩니다. 직업 병이죠. 예전에 영화관에서 멜 깁슨Mel Gibson, 1956~ 이 주연한 『햄릿Hamlet』1990을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삼촌의 범행을 밝히기 위해 햄릿이 무대에 올린 연극에 왕비가 등장하자, 단체관람을 하러 온 고등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더군요. “어, 남자네. 왕비 역을 왜 남자가 하는 거야?” 마이크라도 있으면 벌떡 일어나서 왜 남자 배우가 여자 역할을 하는지 학생들에게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Shakespeare in Love』1998를 보신 분이라면 그 이유를 아실 겁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성이 무대 위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대신 소년 배우가 여성 역을 맡았죠. 무대 위에서 남녀상열지사가 펼쳐지는 것을 막기 위한 교회의 조치였답니다. 영화 속 연극 장면에 남자 배우가 왕비 역으로 등장한 것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무대 전통을 살린 거죠.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발표하거나 토론할 때 간혹 끼어들어 설명해 줄 수 있지만, 영화관이나 미술관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유치원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춰 작품 이야기를 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요. 작품 이해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꼬마들 스스로 작품의 의미를 찾아내겠죠.
이 작품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수많은 TV와 부처상이 열매처럼 달린 ‘위성 나무’는 현실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대상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대개는 비디오아트 작품으로 분류되지만요. TV와 부처상은 친숙한 대상이지만, 이 두 대상을 나란히 배치해 놓으면 낯익은 사물들이 굉장히 낯설어집니다. 초현실주의의 ‘낯설게 하기’ 기법이죠. 그런데 은유에 관한 앞 두 글에서도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초현실주의 기법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TV와 부처상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둘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는지, TV와 부처상이 무엇에 대한 비유인지 밝혀지는 경우에만 작품의 의미가 일부라도 드러날 겁니다.
미술관의 설명에 의하면, 『위성 나무』는 “기계와 생명의 조화를 나타낸 작품으로, 과학과 종교, 찰나와 영원 등 상반된 가치들이 대립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표현”했답니다. TV가 과학을, 부처상이 종교를 대변한다는 거죠. 또한 순간적인 이미지의 연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TV는 찰나성을,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진리를 추구한 부처는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이고요. 여기까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TV와 부처상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둘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걸까요? 은유의 공식, ‘A는 B다’나 조금 더 직설적인 직유의 공식 ‘A는 B처럼 ~하다’를 이용하면 둘 사이의 연관관계를 조금 더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원관념tenor인 A와 보조관념인 B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직유/은유의 기본 원리가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이라는 건 아직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저는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TV와 부처상을 연결해 주는 유사성이 무엇인지 찾아봤습니다. 바로 부처님의 자세와 TV 시청자의 자세입니다. 두 자세가 닮지 않았나요? ‘TV 시청자들은 부처님과 똑같이 면벽수행面壁修行 하는 자세로 앉아서 TV를 시청한다’라는 거죠. 의자가 아니라 안방 방바닥에 앉아서 TV를 시청하는 사람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는 TV 시청자의 자세가 부처님과 더 많이 닮아 보였을 겁니다. TV 시청자의 모습에서 부처를 생각해 낸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지 않나요? 어느 날 저녁, 아파트 복도를 지나는데 앞 동 아파트 거실에서 한 주민이 바닥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린 자세로 TV를 보고 있더군요. 멀리 보이는 그 주민의 실루엣이 영락없이 부처님의 결가부좌 자세였습니다. TV 시청자는 명상하는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죠. 결가부좌 자세로 명상을 통해 구도했던 부처와 똑같은 자세로 현대의 TV 시청자들은 TV를 보며 세상에 대한 소식도 얻고 지식도 쌓습니다. TV 시청자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구도자이자 잠재적 부처인 거죠. 그러니 세상에는 TV 시청자 수만큼 부처가 생겨납니다. 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걸쳐 TV 동시 시청이 가능해지고, TV를 통해 시청자들은 공동의 지식 원천을 갖게 됐습니다. TV 덕분에 TV 공동체가, 부처들의 공동체가 형성된 거죠. 하나의 위성을 통해 만들어진 위성 공동체이자 TV 공동체를 작가는 한 나무에 주렁주렁 열매가 매달려 있는 ‘나무’에 비유해서 ‘위성 나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겁니다. ‘TV 시청자’를 ‘부처’에, ‘TV 시청자들의 네트워크’를 ‘위성 나무’에 비유한 거죠. TV를 통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위성 나무』를 해석해도 괜찮겠죠?
그런데 미술관 설명처럼 부처상이 종교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결가부좌의 부처상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넣어도 작품의 의미가 유지될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을 TV 시청자의 자세와 연결하기는 힘들죠. 부처 대신 참선하는 선승禪僧을 집어넣어도 결가부좌나 면벽수행의 의미는 유지될 것 같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나 참회하는 수도사의 모습에서 그런 의미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앞글, 「저 불쌍한 수도사는 누구예요?」에 등장한 성 제롬St. Jerome을 한 번 보시겠어요? 기독교의 수도사가 고행하는 자세와 불교의 수도승이 수행하는 자세는 확연히 다릅니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가 그린 『참회하는 성 제롬Saint Jerome in Penitence』1798 밑에 있는 사진은 제가 쾰른의 작은 동네 성당에 들어갔을 때 찍은 두 수사의 모습입니다. 성 제롬이나 두 수사의 수행 모습을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연결하기는 조금 어렵겠죠?
쾰른 성당의 두 수도사. |
여기서 잠깐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백남준 작가는 TV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을까요? 아니면 부정적으로 평가했을까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TV’를 ‘지식으로 이끌어주는 창’이자 ‘자기 자신을 찾는 성찰의 창’으로, ‘TV 시청자’를 ‘부처’로 승격했으니 당연히 TV의 긍정적인 효과를 확신했을 겁니다. ‘TV’를 ‘자기 성찰의 창’이자 ‘구도의 창’으로 보는 시각은 『TV 부처』1974(2002)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백남준, 『TV 부처』, 1974(2002년). 석불좌상 1기, CRT TV 모니터 1대, 폐쇄회로 카메라 1대, 가변 크기. 백남준 아트 센터, 용인. https://images.app.goo.gl/KaHiAmyWboqBpgT16 제공. |
백남준에게 TV는 지식과 진리로 이끌어주는 창이자, 온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주는 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TV 화면 속에서 자신을 찾으며 나를 찾는 구도의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TV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죠. 아마도 이것이 『다다익선The More, The Better』1988이라는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일 겁니다.
백남준의 작품을 관람할 때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제목이 큰 도움이 됩니다. 제목을 보면서 ‘아, 이 작품이 이걸 보여주려고 하는 거구나!’ 깨닫는 경우가 많거든요. 『달은 가장 오래된 TV』1999라는 작품도 제목이 없었다면 이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2021에서 처음 본 『달은 가장 오래된 TV』1965/2000에는 13대의 TV 모니터에 보름달에서 초승달로 줄어들었다 다시 보름달로 변해가는 달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이게 뭐지? 변하는 달의 모습을 왜 보여주는 거야? 이 작품은 말하려고 하는 게 뭘까?’ 제목이 없었다면 TV와 달의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음 사진을 보고 작품의 의미를 ‘A는 B처럼 ~하다’는 직유의 형식으로 표현해 보세요. ‘TV는 달처럼 ~하다’에서 ‘~하다’만 채우면 되겠죠? TV와 달의 연관관계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닮았을까요? TV와 달의 유사성을 찾아보세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1965/2000년. CRT TV 모니터 13대, 12-채널 비디오, 컬러, 무성, LD; 〈E-Moon〉, 1-채널 비디오, 컬러, 유성, DVD, 가변 크기. 백남준 아트 센터, 용인. https://njp.ggcf.kr/collections/215 제공. |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모두 작품의 제목에 담겨 있습니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제목 자체가 은유니까요. 하늘의 달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달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TV’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세요? 달이 절대 TV는 아니죠. 그렇다면 어떤 연관관계로 이 둘은 연결될까요? TVtele-vision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대표적인 기능은 ‘먼 곳의’‘tele’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세상 사람 모두가 실시간으로 동시에 ‘볼 수 있게’‘vision’ 해준다는 겁니다. 먼 옛날 TV가 없었던 시절에도 세상 사람이 모두 (약간의 시차를 두고) 볼 수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달과 태양이죠. 태양의 형태는 항상 똑같지만 달은 한 달을 주기로 계속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달은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항상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거죠. TV의 화면이 계속 바뀌는 것처럼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는 볼거리였다는 점에서 달은 TV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겁니다. 자연의 대상인 달과 현대 기술의 산물인 TV를 연결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녹여낸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지 않나요? 제가 외국의 대형 미술관에서 우리나라 작가의 전시실이 따로 있는 것을 본 것은 백남준 작가가 처음이었습니다.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백남준 전시실을 봤을 때는 감회가 남달랐죠. 백남준이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참신하고 독창적인 은유를 만들어 낸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닐까 혼자 추측해 봅니다. 이런 은유들 때문에 백남준의 작품들을 보면서 ‘와, 똑똑한 작품이다!’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백남준의 작품 못지않게 똑똑한 은유로 저를 감탄하게 만든 작품이 또 있습니다. 다음 작품을 보고 제목이 무엇인지 맞혀 보시길 바랍니다.
안규철, _________, 2014년. 화분과 나무 받침대, 가변 크기. HITE Collection, 서울. HITE Collection 제공. |
제목이 무엇일지 비교적 쉽게 유추하실 수 있겠죠? 이 작품은 안규철1955~ 의 『평등의 원칙』2014입니다. 안규철은 국립현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에서 제작한 「MMCA: 작가와의 대화」 동영상 시리즈를 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작가입니다. 제목을 알고 나니 작품의 의미가 더 선명해지지 않나요? 이 작품은 각각 다른 높이의 화분과 받침대 같은 일상적인 대상을 이용한 일종의 레디메이드ready-made 작품입니다. 메렛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1985의 『오브제, 모피로 된 아침 식사프랑스어: Le Déjeuner en fourrure』1936나 맨 레이Man Ray, 1890~1976의 『선물프랑스어: Le Cadeau』1921 역시 기존의 일상적인 대상을 이용한 레디메이드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찻잔을 모피로 감싸거나 다리미 바닥에 압핀을 달아서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대상들을 만들었죠. 반면에 『평등의 원칙』에서 받침대 위에 놓인 화분들은 변형이 가해지지 않은 일상적인 대상 그 자체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레디메이드 대상을 이용해서 새로운 의미와 관점을 제시하는 이런 미술 양식을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라고 부르더군요. 개념미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에 의하면 개념미술에서는 “개념concept이나 관념idea”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 간주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작품을 만들 때 완성된 작품이라는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품 뒤에 자리 잡은 생각이나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평등의 원칙』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개념이나 관념”은 무엇일까요? 이 “개념이나 관념”을 표현할 때 은유가 사용됐을까요?
물론입니다. 이 작품의 “개념이나 관념”을 은유 말고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겠어요?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을 ‘A는 B처럼 ~하다’는 직유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평등이란 키 작은 화분에게 높은 받침대를 놓아줌으로써 키 큰 화분과 높이를 똑같이 맞춰주는 것과 같다’ 정도가 될 겁니다. 키 높은 화분에게나, 키 작은 화분에게나 똑같은 높이의 받침대를 대주는 것이 평등이 아니라, 화분의 키 높이에 따라 받침대의 높이를 달리해서 모두 똑같은 키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평등이라는 거죠. 평등한 분배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진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적게, 가진 것이 적은 사람에게는 많이 나눠 줘서 다 같이, 평등하게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과정을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똑같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평등이라는 거죠. 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죠? 평등에 대해 이런 시각을 갖게 되면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정책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키 작은 화분에게 더 높은 받침대를 대주는 분배의 원칙을 정치 철학자인 존 롤스John Rawls, 1921~식으로 표현하면 ‘최약자 보호의 원칙’이 될 겁니다. 롤스는 『정의론A Theory of Justice』1971에서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분배의 원칙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기본적 자유를 설정하는 ‘자유 원칙’이고, 두 번째 원칙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균등의 원칙’과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게 불평등을 허용하는 ‘최약자 보호의 원칙,’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죠. 롤스가 600쪽이 넘는 한 권의 두꺼운 책으로 제시한 평등의 원칙을 안규철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평등의 의미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요?
설마 저 혼자만 백남준과 안규철의 작품에 감탄하는 건 아니겠죠? 지금까지 뛰어난 은유가 들어 있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봤으니 마무리도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으로 해볼까 합니다. 올여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한 점 하늘_김환기」2023 전시회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을 보고 있을 때, 제 옆에서 그림을 보던 두 관람객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왜 점으로만 그림을 그렸을까?”
“글쎄.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멋있어 보여.”
아래 그림을 보고 점의 의미가 무엇일지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캔버스에 유화, 236 × 172 ㎝. 개인 소장. |
우선 의미는 제쳐두고, 형태적인 측면에 대해 여담을 해보겠습니다.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2021 전시회에서는 김환기의 푸른 점화, 『19-Ⅵ-71 #206』1971 앞에 『분청사기 인화문 자라병』조선 15세기이 놓여 있더군요. 김환기의 그림 속 점들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백 년 전의 분청사기에서 같은 DNA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전시 의도였습니다. 전시회 팸플릿에는 “『분청사기 인화문 병』 표면의 인화문印花紋과 김환기의 점화點畫는 공통적으로 구형의 반복을 통한 시각적 리듬을 만들어 낸다. 분청사기와 추상회화가 약 500년의 시대를 뛰어넘어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진 정연함 속에서도 변화와 역동성이라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더군요. 김환기의 점화와 분청사기의 인화문을 연결해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 참신한 연관관계를 찾아낸 큐레이터를 찾아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이 둘의 연관관계를 여러 평론가가 이미 지적했더군요. 저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꽃이나 용, 물고기 같은 구상화가 그려져 있는 도자기들 속에서 도장으로 눌러 점을 새겨넣은 분청사기 인화 승렴문繩簾文, 빈틈없이 줄지어 찍힌 점이 발을 쳐놓은 것처럼 보이는 문양은 굉장히 현대적이고 세련돼 보입니다. 분청사기 인화문 도자기를 볼 때마다 어떻게 15세기에 이런 추상적인 문양을 만들 수 있었을까 감탄하곤 했죠. 도자기를 사랑했던 김환기가 분청사기의 인화문에서 점화에 대한 영감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가설에 “좋아요”를 꾹 눌러 봅니다.
분청사기 인화 승렴문 병, 15세기. 리움 미술관, 서울. |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점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김환기식 추상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김환기의 작품 활동 과정은 흔히 파리 시기1955~1959, 서울 시기1959~1963, 뉴욕 시기1963~1974로 구분되는데 점화는 뉴욕 시기의 산물입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작품이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모하면서 추상화abstraction의 방식이 로스코식 색면color field으로 표출된 것과 비슷하다 할까요. 그러나 분청사기 인화문과 점화의 연관성이 입증된다 해도 이것은 형태의 연관성일 뿐 점의 의미까지 밝혀주진 않습니다. 점의 의미는 다른 식으로 찾아봐야겠죠. 김환기의 그림 속 점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김환기의 일기를 토대로, 그림 속 “점 하나하나가 고향 신안 앞바다와 산, 달과 별, 그리고 가족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점이 이 모든 것에 대한 비유라면 둘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림 속 점을 김환기의 개인사와 연관시켜서 해석하는 방법을 감상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평론가들에게는 리움미술관 전시 큐레이터의 다음 인터뷰가 훨씬 더 객관적인 설명이 될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면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면은 선이 모여 만들어지고, 선은 점이 모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점은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죠. 그래서 김환기1913~1974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점에 담아 점화點畵를 그렸습니다. (…) 김환기의 그림에 찍혀있는 점들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의미를 품은 점들입니다. 천지인天地人이 들어있는 우주적인 개념입니다.”
그림 속의 점들이 우주와 하늘, 산과 사람을 포함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은유라면, 점들과 우주와 하늘, 땅과 사람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유사성이 있는 걸까요? 이 해석을 토대로, 우주와 하늘과 땅을 점으로 표현한 두 그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우주』라는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진 두 폭짜리 푸른 점화인 『05-Ⅳ-71 #200』1971이고, 두 번째 그림은 점으로 하늘과 땅 혹은 산을 표현한 『하늘과 땅 24-Ⅸ-73 #320』1973입니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중간 부분의 능선 덕분에 하늘과 산을 쉽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김환기, 『우주(원제: 05-IV-71 #200)』, 1971년. 캔버스에 유화, 254 × 254 cm. 개인 소장. |
김환기, 『하늘과 땅 24-Ⅸ-73 #320』, 1973년. 캔버스에 유화, 263.4 × 206.2 cm. 개인소장.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달리 이 두 그림에서는 구상적인 요소가 조금 더 남아 있는 것 같죠? “사람을 그린 그림은 안 보여주나요?”라고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사람을 그린 그림 아닐까요? 그림 제목을 통해 그렇게 유추해 봤습니다. 위 세 그림 속의 점들이 우주와 하늘, 산과 사람을 포함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은유라면, 점들과 우주와 하늘, 땅과 사람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유사성이 있는 걸까요? 그림의 의미를 가장 간단한 직유의 형식, ‘A는 B와 같다’부터 시작해서 ‘A는 B처럼 ~하다’로 표현하면 유사성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요? ‘우주, 하늘, 땅, 사람들과 점들’ 사이에서 제가 찾아낸 유사성은 ‘무수함 혹은 무한함’입니다. ‘무수함’은 ‘무한함’으로 이어지니까요. 조금씩 다르지만 아주 비슷한 무수한 점들을 끝없이 이어 그림으로써 우주와 하늘과 땅의 무한함을, 지구 위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인간과 생명체와 사물들의 무수함을 그림 속에 담아낸 거죠. 그림의 의미를 직유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우주와 하늘, 땅과 사람은 무수한 점들과 같다’ 혹은 ‘우주와 하늘과 땅과 사람들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것은 무수한 점들처럼 무한하다’가 될 겁니다. 김환기 그림 속에 표현된 점들의 무한함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이것을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숭고함the Sublime’과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환기의 그림을 보면서 무한한 점들의 세계와 대면할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함에 압도되면서 점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때 불쾌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은유의 형식을 빌려서라도 이 알 수 없음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정신의 힘을 느끼죠. 불쾌감이 쾌감으로 바뀌는 그 순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숭고함입니다. 이것이 김환기의 점화를 보면서 ‘멋있다’라고 느끼는 감정의 정체일지 모릅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 제목이 김광섭1905~1977의 「저녁에」1969의 한 구절이라는 것은 모두 아시리라 믿습니다.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아마도 작은 점이 되어 다시 (못) 만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우리나라 작가 세 사람의 작품들을 직유/은유의 관점에서 살펴봤습니다. 이 세 작가의 작품을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살짝은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을 하나 갖게 된 것 같죠? 이 해석의 틀을 사용하면 작가에 대한 전기적인 사실을 모르더라도, 작품의 양식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작품 속의 대상들이 맺는 관계에 의지해서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겁니다. 미술관에서, 혹은 책에서, 어떤 작품을 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직유의 형식, ‘A는 B처럼 ~하다’에서 빈칸을 채워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