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1994에는 칠레의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와 이탈리아인 우편배달부 마리오Mario가 “메타포metaphor”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속 다른 장면은 잊었어도 네루다가 “메타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장면은 기억하고 계신 분이 많을 겁니다. 이 영화 때문에 “메타포”가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게 된 분도 많을 거고요. 추억 여행 삼아 ‘메타포’ 장면을 한 번 떠올려 볼까요?
“자네, 왜 그렇게 서 있나?”
“네?”
“우체통처럼 서 있잖은가?”
“장승처럼요?”
“아니, 장기판 말처럼 요지부동이었어.”
“도자기 인형보다도 조용했죠.”
“내 앞에서 ‘메타포metaphor’와 ‘시멀리simile’를 사용하지 말게.”
“파블로 선생님.”
“‘메타포’ 말인가?”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 ‘메타포’란… 이걸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뭔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을 다른 것에 견주어서 말하는 것일세.”
“선생님이 시에 쓰시는 건가요?”
“맞아. 그렇지.”
네루다는 은유를 “뭔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을 다른 것에 견주어서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A’를 표현하기 위해 ‘A’가 아닌 ‘B’로 바꿔서 ‘A는 B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표적인 은유는 ‘내 마음은 호수요’겠죠? 영어권에서는 로버트 번즈Robert Burns, 1759~1796의 ‘내 사랑은 한 송이 붉고, 붉은 장미’ 정도가 될 겁니다. 여기서 ‘내 마음’과 ‘내 사랑’은 원관념tenor, ‘호수’와 ‘붉은 장미’는 보조관념vehicle이라고 불립니다. ‘내 마음’과 ‘내 사랑’을 ‘호수’와 ‘붉은 장미’에 빗대어 표현한 거죠. 연습 한 번 해볼까요? 다음 중 은유가 아닌 것을 찾아보세요.
1. 백과사전은 사전이다.
2. 세상은 무대다.
3. 사랑은 컴퍼스다.
4. 죽음은 잠이다.
은유가 아닌 것은 1번입니다. 백과사전은 사전의 일종이죠.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같습니다. 이렇게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동일하면 그때는 은유가 아니라 ‘정의definition’가 됩니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 중 하나가 ‘정의’를 내려야 할 때 은유를 만드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봐요”라는 요청에 “사랑은 밥”이라거나 “사랑은 봄날의 오후”라고 답하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은유’가 되는 거죠.
2번은 셰익스피어의 『당신 뜻대로As You Like It』1599 2막 7장에 나오는 제이퀴즈Jacques의 대사입니다. 그는 인생을 일곱 단계유아기, 아동기 학창 시절, 사랑에 빠지는 청년 시절, 군인, 법관, 노인, 죽음을 앞둔 노년로 나눈 다음 각 단계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워낙 유명한 대사이니 몇 구절만 살펴보고 갈까요? 행마다 은유가 들어 있습니다. 세상은 무대로, 남녀는 배우로, 죽음과 출생은 퇴장과 등장으로, 인생의 일곱 단계는 연극의 7막으로 비유됐죠.
세상 전부가 하나의 무대다.
세상의 모든 남녀는 단지 배우일 뿐.
무대에 등장했다 퇴장한다.
사람은 일생 동안 여러 역을 맡는데
그 일생은 7막으로 구분된다.
― 셰익스피어, 『당신 뜻대로』, 2막 7장.
3번은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의 「슬픔을 금하는 고별사A Valediction: Forbidding Mourning」1611에 나오는 은유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을 컴퍼스의 두 다리로 비유한 발상이 굉장히 기발하죠. 멀리 떠나면서 연인에게 “당신만 중심을 잘 잡고 기다리고 있으면 나는 돌아올 거야”라고 말하는 시 속 화자가 조금 얄밉긴 하지만, 은유가 멋있어서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설사 둘이라 해도,
그 둘은 뻣뻣한 컴퍼스의 두 다리가 둘인 것처럼 둘입니다.
고정된 다리인 당신의 영혼은 움직일 기색이 전혀 없지만,
다른 다리가 움직이려 하면 그제야 반응하죠.
당신의 다리는 중심에 있지만,
다른 다리가 먼 곳을 배회할 때는,
함께 몸을 기울이며 귀를 기울이다가,
다른 다리가 돌아오면, 똑바로 섭니다.
당신은 내게 이런 존재가 될 것입니다.
나는 다른 다리처럼 항상 비스듬히 달려야 하는 운명.
당신의 꿋꿋함 덕에 나는 똑바로 원을 그리고,
출발했던 곳에서 끝맺음할 수 있습니다.
― 존 던, 「슬픔을 금하는 고별사」 중 일부분.
4번은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1599~1611 3막 1장에 나오는 은유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로 시작하는 햄릿의 독백에 나오는 구절이죠. ‘죽음’을 ‘잠’에, ‘사후 세계에 벌어질 일’을 ‘꿈’에 견준 이 은유는 이제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클리셰cliché’가 된 것 같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참아내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물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
이를 물리치는 것이 더 고상한가.
죽음은 잠드는 것. 다만 그것뿐이다.
잠들면 모두 끝난다.
번뇌도,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도.
그것이야말로 진심으로 원하는 바의 극치다.
죽음은 잠드는 것.
잠들면 꿈도 꾸겠지. 아, 그게 문제다.
이 육체의 굴레를 벗어났을 때
그 죽음의 잠을 자며 어떤 꿈을 꿀 것인지.
― 셰익스피어, 『햄릿』, 3막 1장.
여러분도 멋진 은유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나요? 『일 포스티노』에서 마리오는 은유 덕에 사랑도 쟁취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도 갖게 됩니다. 은유로 인해 여러분의 삶도 마리오의 삶처럼 극적으로 바뀔지 모릅니다. 더 좋은 은유를 만들 수 있도록 은유에 대해 더 알아보죠.
네루다가 ‘메타포’와 더불어 ‘시멀리simile’를 언급했는데, 시멀리는 ‘직유’입니다. ‘A는 B다’라는 은유의 공식에 ‘~처럼’이나 ‘~ 같다’를 넣어서 ‘A는 B와 같다’나 ‘A는 B처럼 ~하다,’ 혹은 ‘B와 같은 A’라고 표현하면 직유가 됩니다. 직유直喩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비교하는 방법입니다. ‘사랑은 컴퍼스다’나 ‘죽음은 잠이다’보다 ‘사랑은 컴퍼스와 같다’나 ‘죽음은 잠과 같다’라고 표현하면 이해하기가 더 쉬워지죠. 그런데 ‘백과사전은 사전과 같다’는 말이 안 되죠? 어떤 표현이 은유인지 아닌지 헛갈릴 때는 ‘~와 같다’를 집어넣어 보세요. 말이 되면 은유인 거죠. 위 영화 대화에서도 직유의 예가 여럿 있습니다. ‘우체통처럼 서 있다,’ ‘장승처럼 서 있다,’ ‘장기판 말처럼 요지부동이다’ 모두 직유입니다. 중,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는 직유와 은유를 별개의 비유법으로 배웠지만 사실, 직유에서 ‘같다’를 빼도, 은유에 ‘같다’를 집어넣어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 같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굳이 은유와 직유를 구분하지 않고, 직유 역시 넓은 의미의 은유로 간주합니다. 다만, 직유에서는 은유를 구성하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모두 드러나 있어서 이해하기가 쉬운 반면, 은유에서는 원관념은 드러나지 않은 채 보조관념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죠. ‘원관념이 숨겨져 있는 비유’라는 의미에서 ‘메타포’가 ‘은유隱喩’로 번역됐을 겁니다. 예를 들어, ‘그는 우리 사회에서 암 덩어리 같이 유해한 존재다’에서는 원관념인 ‘유해한 존재’와 보조관념인 ‘암 덩어리’가 나란히 존재합니다. 반면에, ‘삶에 맑은 하늘만 펼쳐지지는 않는다’에서는 ‘맑은 하늘’의 원관념인 ‘행복 혹은 행복한 시간’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A는 B다’라는 은유 공식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A’를 ‘B’로 대체할 때 무작위로 대체가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것이나 B 자리에 올 수는 없다는 거죠. ‘A’와 ‘B’는 다르되, ‘A’와 ‘B’ 사이에 닮은 점이 있어야 합니다. 은유에서는 비슷한 점, 즉 유사성similarity을 토대로 대체가 일어납니다. 전혀 달라 보이는 ‘A’와 ‘B’ 사이에서 독창적인 연결점을 찾아내는 것. 문학에서는 이것이 바로 은유인데, 요즘에는 이것을 ‘창의성’이나 ‘통섭通涉 혹은 융합’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더군요.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사물 사이를 ‘연결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마음의 작용connecting minds’이 상상력이자 창의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꾼 위대한 시인과 작가, 예술가들, 과학자들이란 두 사물에서 새롭고 독창적인 연관관계를 찾아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은유의 힘이 대단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미술에서는 어떨까요? 그림에도 은유가 있을까요? 그림에도 은유가 사용된다면, 그림에서는 은유가 어떻게 나타날까요? 문학 작품 속의 은유와 그림 속의 은유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까요? 다음 두 에피소드는 그림에도 은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 같습니다.
라벤나Ravenna의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에 들어갔을 때, 측면 후진Apse의 돔 천장에 하얀 말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천장 가장 높은 곳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말의 존재가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의미겠죠. 그런데 그 흰 말이 어떤 존재이길래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궁금증을 혼자 해결할 수 없을 때는 무조건 ‘직원 찬스’를 쓰자는 것이 저의 미술관 관람 요령이자 철칙입니다.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안내 직원이 곁에 있는데 혼자 끙끙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저기 천장에 보이는 흰 말은 뭔가요? 무슨 의미가 있나요?”
“아, 저건 ‘호스horse’가 아니라 ‘램브lamb’입니다. ‘램브’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램’을 ‘램브’라고 발음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대로 옮겨 봤습니다.
산비탈레 성당, 548년. 모자이크, 라벤나. |
산비탈레 성당 천장 부분, 라벤나. |
산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는 앞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기 때문에 익숙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천장 가운데 있는 동물이 양처럼 보이나요? 제 눈에만 말처럼 보이는지 궁금해서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무슨 동물처럼 보이냐고 물어봤습니다. 모두 양이라고 답하더군요. 그렇지만 어떻게 양이 저렇게 우람하고 다리가 길 수가 있죠?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 388~450 영묘靈廟, Mausoleum에서는 수반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있는 새들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중앙 돔 아래 네 곳의 반원형 벽간壁間: lunette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두 명의 사도와 함께요. 사실, 새들에 대해 별생각 없이 무심히 지나쳤는데, 기념품 가게에 새들의 그림엽서가 있더군요. ‘어라, 뭐지? 새 그림이 중요한 그림이었어? 왜?’ 영묘 다음에 들른 라벤나의 국립박물관이탈리아어: Museo Nazionale di Ravenna에서도 비슷한 새 그림 모자이크를 발견했습니다. 사실 제가 라벤나를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선생님의 추천 때문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 올 때마다 라벤나를 들른다는 데이비드 선생님이 최애 작품이라며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사진으로 보여준 그림이 바로 물을 마시고 있는 새들의 모자이크였습니다. 사진을 봤을 당시만 해도 ‘에계? 왜 저게 최애 작품이지? 특별한 점이 없는 것 같은데?’라고 의아해하다 금세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국립박물관에서 새들의 모자이크를 보다 데이비드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아, 데이비드 선생님이 보여준 그 사진이 아까 영묘에 있던 새들의 모자이크였구나. 그런데 물 마시는 새들의 모자이크가 영묘에도 있고, 여기 박물관에도 있는 걸 보면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 무슨 의미일까?’ 당연히 박물관 ‘직원 찬스’를 써야죠.
“안녕하세요,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여기 물 마시고 있는 새들은 뭔가요? 방금 영묘에 들렀다 왔는데 그곳에도 물 마시고 있는 새들의 모자이크가 있더군요. 기독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나요?”
“기독교에서 물은 ‘세례’를 의미해요. 물을 마신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죠. 이 새들은 그냥 새가 아니라 불사조인 피닉스phoenix예요.”
위 모자이크 속 새들이 불사조처럼 보이나요? 박물관 직원은 이 새들을 “불사조”라 불렀지만 대개는 “비둘기”로 불리더군요. 이 모자이크의 원조는 아드리아나 빌라Villa Adriana의 모자이크기원전 2세기라고 합니다. 기독교와 상관없는 이 모자이크에서도 물은 죽음과 출생과 재생의 순환을 상징했답니다.
산비탈레 성당의 후진 돔에 그려진 ‘램브’와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의 ‘물 마시는 비둘기들’ 모두 그냥 ‘양’과 ‘비둘기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기독교도들’을 나타내는 은유인 거죠. ‘양’과 ‘비둘기들’은 보조관념이고, 원관념은 “하느님에게 바쳐지는 거룩한 제물인 예수, 인간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사의 제물이자 세상의 죄를 없애는 그리스도인 예수”「위키백과」와 ‘세례를 통해 영생을 얻는 기독교도들’입니다. 양과 예수님, 비둘기와 기독교도 사이의 연관관계를 직유로 표현하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예수님은 의식에서 제물로 올려지는 양과 같다’와 ‘영생을 얻기 위해 세례를 받는 기독교도들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시는 비둘기들과 같다’가 될 겁니다. 양과 예수님은 ‘희생’이라는 유사성으로, 비둘기와 기독교도들은 ‘물을 마시고자 하는 갈증’이라는 유사성으로 서로 연결된 거죠.
기독교 상징체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저는 사실 ‘물 마시는 비둘기’ 모자이크를 보고 그 의미를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새들을 보면서도see 그 의미를 알지see 못 한 거죠. ‘양’의 경우에는 ‘양’이라는 것조차 알아보지 못했고요. 사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는 양과 같다’와 ‘기독교도들은 물 마시는 비둘기들과 같다’라고 직유를 글이나 말로 표현하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모두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동시에 드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관념은 드러내지 않고 보조관념만 제시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죠. 문학 작품보다 그림에서 원관념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 문학 작품과 그림 속 직유/은유의 한 가지 차이점인 것 같아요. 만약 그림에서도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나란히 제시되어 있다면 그림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지겠죠. 미술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조관념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원관념을 유추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보조관념만 있는 그림을 보고 원관념을 유추해낼 수 있는 능력, 즉 은유를 찾아내는 능력이 결국 미술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에서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창의성이고 상상력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은유를 만들어내는 것 못지않게 은유를 이해하는 데도 창의성과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 능력도 연습을 통해 키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연습문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다음 그림을 보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찾아서 그림의 의미를 직유로 표현해 보세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글이나 말 속의 직유에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다 드러나지만, 그림에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한 화면에 동시에 나타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나란히 등장하는 경우는 진짜 드뭅니다. 뮌헨의 신미술관인 노이에 피나코테크독일어: Neue Pinakothek 전시실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 피식 웃음이 나오더군요. 그림 속의 직유가 너무 적나라했으니까요. 그림 자체는 웅장하지만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투명하게 드러나 있죠? 모든 그림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의미를 드러낸다면 그림을 감상하는 일이 지금보다는 훨씬 수월해질 텐데요.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고민하지 않아도 그림의 의미가 저절로, 친절하게 우리에게 다가올 테니까요. 다만 한 의미를 너무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제한될 수 있죠. 좋은 은유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주는 것인데 한 가지 의미만 가능하다면 독자나 관람자가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확 줄어드니까요. 아래 그림은 월터 크레인Walter Crane, 1845~1915의 『넵튠의 말들Neptune’s Horses』1892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A는 B처럼 ~하다’ 형식으로 문장을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월터 크레인, 『넵튠의 말들』, 1892년. 캔버스에 유화, 86 × 215 cm. 노이에 피나코테크, 뮌헨. |
물론, 이 그림은 로마 신화 속 바다의 신인 넵튠이 신화에서나 존재 가능한 해마海馬 전차를 모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르를 따지자면 신화를 주제로 한 종교화에 해당합니다. 예전에는 종교화가 역사화와 더불어 미술 장르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했었답니다. 역사화/종교화 아래가 초상화였고, 그 아래가 장르화풍속화, 맨 아래쪽이 정물화와 풍경화였죠. 미술 장르에도 서열이 있었다는 게 이상하면서도 재미있죠? 굳이 신화적 존재인 넵튠과 해마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빠르게 밀려오는 파도의 모습에 덮칠 듯 거칠게 질주해 오는 말들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경마를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 LA 근처의 산타 아니타Santa Anita 경마장에 간 적이 있는데, 1,200미터 거리를 말들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휙 지나가 버리더군요. 말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경마장에서 질주하던 경주마들이 떠오릅니다. 질주하는 말의 속도와 밀려오는 파도의 속도에서 아주 쉽게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관념이 ‘빠르게 밀려오는 파도’라면 보조관념은 ‘빠르게 질주하는 말들해마들’이죠. 이 그림을 넵튠까지 포함해서 직유로 표현하면 ‘파도가 삼지창을 든 넵튠이 모는 말들처럼 빠르게 밀려온다’나 ‘삼지창을 든 넵튠이 모는 말들처럼 빠르게 밀려오는 파도’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그야말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파도를 덮칠 듯 질주해 오는 말들에 비유한 그림입니다.
이번에는 조금 난이도를 높여 보겠습니다. 아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황금 전설프랑스어: Legende Dorée』1958입니다. 이 그림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림을 보고 ‘A가 B처럼 ~하다’ 형식으로 직유를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이 그림에서는 특이하게도 보조관념이 정체를 조금 숨기고 있어서 보조관념 자체를 찾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 『황금 전설』, 1958년. 캔버스에 유화, 97 × 130 cm. 개인 소장. https://www.wikiart.org/en/rene-magritte/the-golden-legend-1958 제공. |
창문 밖으로 바게트baguette가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하늘에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빵이 하늘에 떠다니다뇨? 이런 일은 절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죠. 초현실적인 사건을 그린 이 작품은 당연히 초현실주의Surrealism 작품입니다. 빵이 하늘에 떠다니는 이 그림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이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모두 바게트를 드셔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겉이나 속이 모두 부드러운 우리나라 바게트와 달리 파리의 바게트는 위험할 정도로 겉이 딱딱합니다. 먹다가 입천장이 까질 정도죠. 그래도 속은 부드러운 편입니다. 황금색 껍질 안의 하얗고 부드러운 안쪽 빵을 뜯어 먹다 보면 흰 뭉게구름이 연상됩니다. 특히 갓 구워낸 부드러운 식빵을 뜯어 먹을 때 그런 느낌이 듭니다. 너무 부드럽고 가벼워서 빵이 구름처럼 하늘을 둥둥 떠다닐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부드럽고 가볍다’는 유사성으로 인해 빵과 구름이 연결됩니다. 원관념이 ‘가벼운 빵’이라면 보조관념은 ‘가볍게 떠다니는 구름’이겠죠. 이 둘을 연결하면 ‘빵이 구름처럼 가볍고 부드럽다’는 직유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빵이 구름처럼 부드럽고 가볍다’ 혹은 ‘구름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빵’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초현실적인 장면이 탄생하지 않을까요?
정말로 하늘을 떠다닐 수 있을 정도로 ‘구름처럼 가벼운 황금색 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자 ‘황금 전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 『황금 전설』1260년경은 중세 후기에 유럽에서 널리 읽혔던 책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보라기네의 야코부스Jacobus de Voragine, 1230~1298가 쓴 153개의 성인전 모음집이죠. 이 모음집에는 성인들이 행한 기적들이 나와 있습니다. ‘황금 전설’이라는 제목과 ‘구름처럼 가벼운 빵이 하늘을 떠다니고 있다’라는 직유를 연결하면 ‘하늘을 떠다닐 수 있을 만큼 구름처럼 가벼운 황금색 빵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성인들이 행한 것과 같은 황금 기적이 될 것이다’라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문학 작품에서는 은유에서 대부분 원관념은 숨겨지고 보조관념만 남아 있죠. 독자가 해야 할 일은 은유에서 원관념을 찾아내는 겁니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이 빵을 먹으면서 “나는 지금 구름을 먹고 있어”라는 은유로 부드럽고 가벼운 빵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 작품에서는 원관념인 ‘빵’은 드러나고 보조관념인 ‘구름’이 숨겨져 있습니다. 보조관념인 ‘구름’을 생각해내지 못하면 이 그림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워지는 겁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떠 있는 것은 ‘구름’이니 설사 ‘구름’이 그림에 보이지 않더라도 ‘구름’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접성contiguity’을 토대로 무언가를 연상해내는 것이 환유입니다. 사실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은유와 환유를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환유에 대해서는 은유에 대한 글 이후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설사 그림 속에 ‘구름’이 보이지 않더라도 위 그림에서 직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진 않습니다. 원관념을 ‘가벼운 빵’으로, 보조관념을 ‘구름’ 대신 ‘하늘에 떠다님’으로 보면 되는 거죠. 그러면 ‘빵이 하늘에 떠다니는 것처럼 가볍다’는 직유가 나오니까요. 물론 ‘구름’이 들어가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이 되면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지겠죠. 보조관념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으로 보든, ‘하늘에 떠다님’으로 보든, 이 그림을 이해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둘 다 ‘가벼움’을 ‘하늘에 떠다니는 것’으로 비유한 거니까요. 다음 그림에도 ‘하늘을 나는 것’이라는 행위가 보조관념인 직유가 들어 있습니다. 기왕 하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늘을 나는 것과 연관된 아래 작품을 살펴보고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그림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마을 위로Over the Town』1918입니다. 이 그림은 마그리트의 바게트 그림보다는 이해하기가 더 쉽지 않나요? 그림을 보고 직유를 찾아내는 법을 연습한 보람이 있죠? 다시 어려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직유를 찾아내는 것은 연습을 통해 나아질 수 있습니다. 앞에서 연습했던 대로 다음 그림을 보고 그림의 의미를 직유 형식인 ‘A는 B처럼 ~하다’로 표현해 보세요.
마르크 샤갈, 『마을 위로』, 1918년. 캔버스에 유화, 45 × 56 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신관, 모스크바. |
이 그림을 보니 겨울에 모스크바에서 미술관을 찾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트레티야코프Tretyakov 미술관 본관에서 지하철을 타고 현대미술관인 신관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모스크바에 가기 전에 주변에서 인종 차별 단체인 스킨헤드Skinhead에 대한 공포심을 잔뜩 주입해 준 바람에 지하철역에서 나와 신관까지 걸어가면서 주변을 얼마나 두리번거렸는지 모릅니다. 혹시 납치라도 당하는 건 아닌가 해서요. (물론 기우였습니다. 모스크바 시민들 모두 감동적일 정도로 친절했습니다. 지하철역에서는 환승 승강장까지 직접 데려다준 분도 있었고, 푸슈킨 미술관까지 같이 걸어가며 길을 찾아준 분도 있었습니다.) 그림 속 여자도 얼핏 보면 남자에게 납치당해 끌려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여자가 도와달라고 손을 흔드는 것 같고요. 그런데 납치당하는 사람이라면 납치하는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손으로 저항하며 안간힘을 쓰겠죠. 그림 속 여자처럼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진 않을 겁니다. 적어도 여자가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요? 이 두 사람은 어떤 마음 상태일까요?
아무런 기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맨몸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분으로는 하늘을 날 수 있죠. 어떤 마음 상태일 때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지 모두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너무나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큰 걱정거리에서 벗어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이럴 때를 모두 아울러서, 행복할 때, ‘날아갈 것 같다’라고 하죠. 그림 속 두 사람이 날아갈 것처럼 행복한 게 맞겠죠? 네, 맞습니다. 샤갈은 1909년에 고향인 러시아의 비테브스크Vitebsk에서 벨라 로젠펠드Bella Rosenfeld, 1889~1944를 1909년에 만나 1915년에 결혼해서 벨라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가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위 그림은 두 사람이 약혼했을 때의 행복감을 그림으로 표현한 거랍니다. 너무 기뻐서 하늘로 두둥실 떠올라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겠죠?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는 결혼식 날의 샤갈과 벨라를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마을 위로』와 아래 그림, 『에펠탑의 신랑 신부프랑스어: Les mariés de la tour Eiffel』1938~1939 속 두 사람의 행복지수를 한 번 비교해보시길 바랍니다. 두 사람의 개인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마르크 샤갈, 『에펠탑의 신랑 신부』, 1938~1939년. 캔버스에 유화, 150 × 136.5 cm. 퐁피두 센터, 파리. |
약혼 후의 행복감이 더 큰 것 같지 않나요? 약혼 후에 두 사람이 훨씬 더 높게 하늘을 날고 있으니까요. 약혼할 때는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지만, 결혼식을 올릴 때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요소들을 다 처리해야 하죠. 결혼식 장소도 골라야 하고, 악단도 섭외해야 하고, 하객도 초대해야 하고, 드레스와 턱시도도 갖춰 입어야 하고요. 이런저런 문제로 정신이 없어서 행복할 겨를이 없지 않았을까요? ‘에펠탑의 신랑 신부’는 날긴 나는데, 신부의 발이 거의 땅바닥에 닿아 있습니다. 하늘 높이 날고 있다면 에펠탑이 신랑 신부의 눈 아래로 보여야 하겠죠.
미술관에서 수도 없이 많이 하는 질문은 ‘이 그림은 뭐지? 무슨 의미야? 이 그림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작가가 왜 이 그림을 그린 거야?’일 겁니다. 물론 저만 그러는 건지도 모릅니다. 누가 옆에서 “이 그림은 이런 의미야”라고 명쾌하게 설명해준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면 결국 혼자 힘으로 열심히 그림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작품에 대한 정보도 얻고, 작품에 대한 논문도 읽고, 유튜브 동영상도 보면서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에 대한 뜬구름 잡는 애매모호한 설명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내 수준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단순명쾌하면서도 논리적인 의미를 내 힘으로 찾아보는 거겠죠.
이때 여러 가지 방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작가의 전기적인 사실과 그림을 연결해서 이해하는 방법도 있고, 한 미술 사조의 제작 기법이나 철학을 토대로 작품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성화聖畫나 불화佛畫 같은 종교화를 감상할 때는 각 종교 특유의 상징체계를 활용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겠죠. 예수님을 ‘목자 혹은 목동’으로, 신도들을 ‘양 떼’로 비유하는 것은 아주 흔한 기독교적 상징입니다. 불교에서는 혼탁한 속세에 물들지 않는 ‘수행자’를 더러운 곳에 있어도 향기를 잃지 않는 ‘연꽃’에 비유하고요. 물론 이런 상징 중 다수가 유사성에 토대를 둔 은유입니다. 꼭 종교화가 아니더라도 은유와 환유 같은 문학적인 수사법을 활용해서 미술 작품을 이해하는 것도 유용한 감상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림을 보고 그림의 내용을 하나의 은유/직유로 표현하게 되면 모호했던 그림의 의미가 조금은 선명해지니까요. 물론 모든 그림에 다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는 옵아트Op Art 작품에서 은유를 찾는 것은 시간 낭비죠. 제 상상력 빈곤으로 그림에서 은유/직유를 찾아낼 수 없는 경우도 많고요. 아무리 그림을 보고 또 봐도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무엇에 대한 비유인지 떠올릴 수 없을 때가 무수히 많죠. 그래도 ‘이건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눈앞에 짠하고 그 의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요? 그림에서 은유와 환유 같은 비유법을 찾아내서 그림을 이해하는 과정은 시에서 은유와 환유를 찾아내서 시를 이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림을 시로, 시를 그림으로 표현했을 겁니다. 한 편의 시를 읽듯이 그림을 감상하는 것. 그림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괜찮지 않을까요?
“그림은 눈에 보이는 시고, 시는 마음에 느껴지는 그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