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장 가뱅Jean Gabin, 1904~1979이 출연한 영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이라 영화 제목도, 줄거리도 가물가물하지만 대사 하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영화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장 가뱅이 숨어 지내던 도시에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한 돈 많은 여자가 나타납니다. 장 가뱅은 친구와 함께 여자의 보석을 훔칠 계획을 짠 다음 호텔 방으로 여자를 찾아가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자를 만나고 돌아온 장 가뱅에게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묻죠.
“왜 이리 오래 걸린 거야? 그 여자랑 뭘 했어?”
“수채화를 그렸어.”
“수채화를 그렸어”라는 대사가 너무 멋있었다는 진행자의 말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업 시간에 이 대사를 은유의 예로 활용하기로 했죠.
“‘수채화를 그렸어’라는 장 가뱅의 대사 중에서 ‘수채화’는 무엇에 대한 은유일까요?”
학생들이 모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더군요.
“‘수채화를 그렸어’라는 게 은유인가요? 왜요?”
“진짜로 수채화를 그린 게 아닐까요?”
학생들의 반응에 저 또한 의아해졌습니다. ‘아니, 장 가뱅이 대화를 나누고 돌아왔다고 분명히 말해 줬는데도 진짜로 수채화를 그린 건 아니냐고 묻다니 이건 뭐지? 학생들 모두 너무 멋진 표현이라며 감탄할 줄 알았는데. 이 이상한 반응은 뭘까? 왜 이게 은유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당연히 제 답답한 마음에 공감해 줄 거라 기대하면서 문학 전공자 친구들에게 하소연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반응도 학생들과 다를 바 없더군요.
“‘수채화’가 은유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아?”
“그게 은유야?”
“근데 왜 수채화를 그린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성적으로 뭔 일이 있었다는 말이지?”
‘수채화’를 은유로 받아들인 제가 잘못된 건가요? 여러분은 ‘수채화’를 비유법으로, 은유로 받아들이셨나요? ‘수채화’가 은유라면 무엇에 대한 비유일까요? 지난 글, 「그림에도 은유가 있나요? ①」에서 말씀드린 대로, ‘수채화’라는 은유의 원관념tenor은 무엇일까요?
학생들이 ‘수채화’에 대해 아는지 궁금해서 ‘수채화’와 ‘유화’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초·중·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그려보지 않은 학생은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유화를 그려본 학생이 많지는 않더군요. 수채화와 유화를 직접 그려본 경험이 있으면 수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쉽게 이해했을 텐데요. 수채화는 물과 물감을 섞어서 그림을 그리고, 유화는 유화물감을 휘발성유인 테레핀Turpentine에 희석해서 그립니다. 무엇보다도, 수채화는 투명하고 유화는 불투명하죠. 수채화는 물감으로 한번 그리고 나면 수정이 어려운 반면, 유화는 붓질이 쉽고 덧칠로 수정이 가능합니다. 수채화를 그릴 때도 덧칠할 수는 있지만 가능하면 색을 많이 섞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물론 진하게 그린 수채화도 더러 있지만, 일반적으로 수채화는 맑고 투명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채화와 유화는 바탕 배경색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유화에서는 진한 색으로 초벌칠을 할 수 있겠지만 수채화에서는 그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래 그림에서처럼 바탕을 연한 색으로 아주 가볍게 바르거나 그냥 흰색으로 남겨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한 색으로 두껍게 발랐다가는 색이 너무 탁해질 테니까요.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수채화 정물화와 유화 정물화를 비교해 보면 수채화와 유화의 차이점을 좀 더 명확하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일반적으로 수채화는 투명하고 맑은 반면, 유화는 불투명하고 진합니다.
폴 세잔, 『녹색 병 속의 잎들』, 1902년. 종이에 수채화, 47.5 × 30.5 cm. 개인 소장. https://www.wikiart.org/en/paul-cezanne/leaves-in-a-green-pot 제공. |
폴 세잔, 『튤립 화병』, 1888~1890년. 마분지를 댄 종이 위에 유화, 72.5 × 42 cm 노턴 사이먼 미술관, 패서디나. https://www.wikiart.org/en/paul-cezanne/tulips-in-a-vase-1892 제공. |
이 정도 말씀드렸으니 ‘수채화를 그렸어’라는 대사에서 ‘수채화’가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 아시겠죠? 두 사람이 ‘수채화’를 그렸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수채화처럼’ 뭔가 맑고 투명한 유대감이 형성됐다는 거겠죠? 한 친구의 해석처럼 두 사람 사이에 성적인 뭔가가 일어났다면 그 상태를 ‘수채화’로 표현하는 것은 무리일 겁니다. ‘수채화를 그렸어’라는 장 가뱅의 대사는 ‘그 사람을 만나서 맑고 순수한 대화를 나눴어’라는 것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요? 제 해석이 맞는지 사실 백 퍼센트 자신하진 못합니다. 가능한 여러 해석 중 하나겠죠. 미술 작품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미술 작품 속의 은유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작품 속의 이미지가 나타내는 원관념을 찾아내기 힘들 때, 아니면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다층적이고 풍부한 은유일 때, 여러 가지 의미가 나올 수 있습니다. 메렛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1985의 『오브제, 모피로 된 아침 식사프랑스어: Le Déjeuner en fourrure』1936가 그런 작품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메렛 오펜하임, 『오브제』, 1936년. 모피로 뒤덮인 찻잔, 스푼과 잔 받침, 11 × 23.7 × 20 cm. 현대미술관, 뉴욕. |
이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모피로 뒤덮인 찻잔과 스푼과 잔 받침으로 이루어진 레디메이드ready-made 조각작품입니다. 메렛 오펜하임은 우리나라에서 ‘메레 오펜하임’으로 더 많이 알려졌지만, 오펜하임에 관한 동영상을 보다 보니 모두 ‘메렛’이라고 하더군요. 오펜하임에 대한 책을 쓴 조카가 고모를 ‘메렛’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메렛’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파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Meret’을 프랑스어식으로 ‘메레’라고 부르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오펜하임은 독일에서 태어나서 스위스에서 성장했고, 파리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metti, 1901~1966, 장 아르프Hans Arp, 1886~1966,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맨 레이Man Ray, 1890~1976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교류했죠. 하늘에 떠 있는 바게트를 그린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의 『황금 전설프랑스어: Legende Dorée』1958처럼 찻잔을 모피로 감싼 오펜하임의 작품 역시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대상을 다룬 초현실주의Surrealism 작품입니다. 모피로 뒤덮인 찻잔과 받침과 스푼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수채화’에 대한 해석처럼 ‘모피를 두른 찻잔’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는 것 같더군요. 하나는 초현실주의 기법이나 강령과 연관해서 ‘모피를 두른 찻잔’을 해석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작품을 은유로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첫 번째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하려면 초현실주의에 동원된 개념들과 강령들에 대한 정보가 조금 필요합니다. 우선, ‘오브제프랑스어: objet’가 있습니다. ‘오브제’란 “예술과 일견 무관해 보이는 것을 본래의 용도에서 분리해서 우연적이고 심리적인 조합에 의해 진열한” 대상을 가리킵니다「위키백과」. 일상적인 의미에 “연상작용과 잠재의식이 작용해서 몽환적이면서 기괴한 효과가 부여”「위키백과」되는 겁니다. 일상적인 찻잔에 모피가 부착된 순간 찻잔은 차를 마시는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띄는 미술 작품인 오브제로 바뀌죠. ‘오브제’로서 ‘모피를 두른 찻잔’은 동시에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옷이나 구두, 핸드백, 혹은 오펜하임이 디자인했다는 팔찌 같은 액세서리에 털이 부착돼 있으면 “몽환적이면서 기괴해” 보이진 않습니다. 털이 장식적인 요소로 자주 사용되니까요. 그런데 차를 담는 찻잔에 털이 부착돼 있으면 양립할 수 없는 두 요소가 충돌하면서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일상적인 사물이나 관념이 낯설게 만들어져서 새로운 느낌이 나는 거죠. 이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라는 초현실주의 기법입니다. ‘모피를 두른 찻잔’은 ‘유용한 물건function을 쓸모없는 물건으로 만들기dysfunction’라는 초현실주의 강령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유용한 찻잔에 모피가 더해지는 순간 찻잔은 차를 담는 그릇의 기능을 상실한 쓸모없는 물건이 되죠. 이렇게 함으로써 소비 대상으로서 찻잔과 받침, 스푼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기능으로부터 찻잔과 받침, 스푼을 해방하고자 하는 초현실주의의 목표가 달성된다고 합니다. 초현실주의의 기법이나 철학과 연관시키면, 오펜하임의 ‘모피로 뒤덮인 찻잔’은 ‘오브제’로, ‘낯설게 하기’와 ‘쓸모없게 만들기’의 예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현실주의 기법과 연관해서 작품을 이해하는 방식은 작품의 의미보다는 작품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더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털로 덮인 찻잔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는 거죠. 그렇다면 ‘모피를 두른 찻잔’을 은유로 해석하는 방식은 어떨까요? 은유에 관한 앞글에서 연습했던 것처럼 오펜하임의 『찻잔』을 ‘A는 B처럼 ~하다’ 형식으로 표현하면 어떤 문장이 나올까요? 르네 휴버트Renée Hubert, 1916~2005 같은 학자는 이 작품을 성적인 은유로 해석하더군요. 우묵하면서 둥근 찻잔은 여성의 신체 부위에 대한 은유고, 스푼은 남성의 신체 부위에 대한 은유라는 거죠. 이 은유는 찻잔과 여성의 신체 부위, 스푼과 남성의 신체 부위의 생김새의 유사성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의미를 직유로 표현하면 ‘여성의 신체 부위는 찻잔처럼, 남성의 신체 부위는 스푼처럼 생겼다’가 되겠죠. 오펜하임의 『찻잔』을 보면서 성적인 의미를 연상하셨나요? 흥미로운 해석이죠?
휴버트처럼 저도 이 작품에서 은유를 한 번 찾아봤습니다. 제가 찾아낸 은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오브제’나 ‘낯설게 하기’ 같은 초현실주의의 개념이나, 휴버트의 성적인 은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미술에 대한 지식도, 초현실주의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는 미술 초보가 은유의 개념에 의지해서 이 작품의 의미를 생각해 본 겁니다. 찻잔과 모피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을지 열심히 찾다 보니 한 가지 연관관계가 떠오르더군요. 물론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차가운 커피나 차를 도자기 찻잔에 담아 마실 수도 있겠지만, 차가운 음료를 마실 때는 보통 유리잔을 사용합니다. 도자기 찻잔에는 따뜻한 차나 커피를 담아 마시죠. 그런데 처음에는 따뜻했던 차도 시간이 지나면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차가 식지 않도록 찻주전자를 촛불로 덥히는 워머warmer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도구도 많이 필요하고 번거롭죠. 찻잔 속의 차를 식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상적이지 않은) 한 가지 방법은 찻잔에 모피를 둘러놓는 걸 겁니다. 모피로 만든 토시처럼요. 도자기 찻잔의 용도는 따뜻한 차를 담는 것이고, 모피의 용도는 따뜻함을 유지하는 겁니다. 여기서 도자기 찻잔과 모피의 연관관계가 생겨납니다. ‘따뜻함’이라는 유사성을 매개로요. 도자기 찻잔에 모피를 둘러놓으면 차가 식지 않고 따뜻하겠죠? 따뜻한 차를 마실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와, 차가 따뜻하네. 찻잔에 모피를 둘러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작품의 의미를 직유로 표현하면, ‘찻잔에 모피를 둘러놓은 것처럼 차가 따뜻하다’ 정도가 될 겁니다. 찻잔 세트의 일부니 ‘찻잔’과 ‘잔 받침’과 ‘스푼’을 분리할 필요는 없겠죠? 그런데 보온을 위해 찻잔과 받침, 스푼에 모피를 둘러놓으니 초현실적인 오브제가 탄생하게 된 거죠.
오펜하임이 『찻잔』 작품을 제작하게 된 일화를 읽다 보니 ‘찻잔’과 ‘모피’를 ‘따뜻함 혹은 보온 작용’이라는 유사성으로 연관시킨 제 해석이 완전히 허무맹랑하지는 않은 것 같더군요. 오펜하임이 파리의 한 카페에서 친구들인 도라 마르Dora Maar, 1907~1997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를 만났다고 합니다. 오펜하임은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털 달린 팔찌를 끼고 있었는데, 피카소가 팔찌를 보고 감탄하면서 모든 것을 모피로 덮을 수 있다고 농담을 건넸죠. 오펜하임은 “이 찻잔과 받침도요?”라고 맞받아쳤고요. 그녀는 마시던 차가 식자 “웨이터, 털 좀 더 주세요!”라고 주문했답니다. 오펜하임의 『오브제』를 소장하고 있는 뉴욕 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설명에 의하면, “털 좀 더 주세요!”라는 오펜하임의 요청은 “차가 식지 않도록 찻잔에 토시를 붙여달라”는 터무니없는 요청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후 오펜하임은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찻잔 세트와 스푼을 산 다음 짧은 털로 완전히 감쌌다고 합니다. 농담 속에서 불현듯 찻잔과 모피의 연관관계를 파악하고 그것을 멋진 초현실적인 작품으로 표현해낸 거죠. 오펜하임이 『오브제』라는 간단한 제목으로 털로 감싼 찻잔을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출품했을 때,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은 이 작품에 『모피로 된 아침 식사』라는 제목을 붙여서 전시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차를 마실 때의 기분과 연관해서 이 작품에서 또 다른 직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직유는 오펜하임의 일화에서 실낱같은 뒷받침 근거를 찾을 수 있었지만, 이번 직유는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차를 마실 때, 특히 추운 겨울날, 따뜻한 차를 마실 때면, 온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모피를 두른 것처럼요. 이 직유 역시 차의 ‘따뜻함’과 모피의 ‘따뜻함’이라는 유사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펜하임의 『찻잔』이 ‘따뜻한 차가 모피를 두른 것처럼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 준다’라는 느낌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제가 좋아하는 오래된 노래 중에 「찻잔」1979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오펜하임의 작품을 보다가 이 곡이 떠올랐습니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 김창완 작사, 「찻잔」, 1979년.
지금까지 오펜하임의 ‘털 달린 찻잔’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 방법은 이 찻잔뿐만 아니라 다른 초현실주의 작품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방법들을 재활용하면 이해하기 난감한 작품의 의미를 조금은 포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첫 번째로 살펴볼 작품은 맨 레이의 『선물프랑스어: Le Cadeau』1921입니다. 이 작품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다리미 바닥에 열네 개의 압핀을 붙여놓은 레디메이드 조각작품입니다. 제목이 『선물』인 이유는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자신에게 개인전을 열어준 갤러리 주인이자 초현실주의 시인이었던 필리프 수포Philippe Soupault, 1897~1990에게 줄 선물이었기 때문이랍니다. 맨 레이는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와 함께 거리를 배회하다 공구점에 들어가 다리미와 압핀을 사서 다리미 바닥에 열네 개의 압핀을 한 줄로 붙여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원본은 전시회 첫날 분실됐고, 1972년에 11점, 1974년에 5,000점의 한정판 복제품이 제작됐답니다. 복제된 작품 수가 많다 보니 웬만한 현대미술관은 이 작품을 한 점씩 다 소장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요. 무목MUMOK이라 불리는 빈 현대 미술관Museum Moderner Kunst에서 압핀이 달린 다리미를 처음 봤는데, 며칠 뒤에 들른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The Tate Modern에 똑같은 다리미가 또 있더군요. 뉴욕의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에도 이 다리미 작품이 있습니다. 여러 미술관에 이 다리미 작품이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작품을 보셨을 겁니다. 작품을 먼저 보여 드리죠.
맨 레이, 『선물』, 1921/1974년. 무쇠와 구리 못. 현대미술관, 빈. |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리미가 분명한데, 바닥에 붙어있는 압핀thumb tack 때문에 옷을 다릴 수는 없어서 다리미라고 부르기가 난감합니다. 다리미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다리미인 거죠. 다리미 바닥에 붙어있는 압핀을 어떤 글에서는 ‘못nail’이라고 부르더군요.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는데, 바닥의 압핀들 때문에 다리미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압핀처럼 보이지 않나요? 맨 레이가 작품에 사용한 이 다리미flat-iron는 바닥 윗면과 아랫면이 특히 더 평평해서flat 압핀압정 머리와 닮았습니다. 바닥 밑에 붙여놓은 압핀 다리가 조금 짧고 빈약하긴 하지만 열네 개를 붙여놓았기 때문에 힘줘서 박으면 나무에도 박힐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다리미질도 ‘press’고 압핀을 눌러 박는 것도 ‘press’라는 점에서 다리미와 압핀은 여러 가지로 닮은 점이 많죠. 다리미 바닥에 압핀을 붙여서 다리미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압핀처럼 보이게 만들다니 이것도 대단하지 않나요? 오펜하임의 『오브제』를 해석할 때 사용했던 초현실주의 개념을 빌려오면, 이 작품 역시 일종의 ‘오브제’로, ‘낯설게 하기’의 한 예로, ‘쓸모없게 만들기’의 한 예로 볼 수 있겠죠? ‘모피에 뒤덮인 찻잔’처럼 일상적인 다리미에 압핀이 부착된 순간, 다리미는 옷을 다리는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띄는 미술 작품인 오브제로 바뀝니다. ‘오브제’로서 다리미는 바닥에 부착된 압핀 때문에 친숙하고 일상적인 대상에서 낯선 대상이 되고요. 또한 ‘압핀이 부착된 다리미’는 더 이상 다림질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말죠.
그렇다면 ‘털투성이 찻잔’처럼 ‘압핀 달린 다리미’ 역시 성적 은유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압핀’의 모양 때문에 ‘압핀 달린 다리미’는 넓은 의미에서 남성의 신체 부위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압핀 달린 다리미’는 여성의 옷을 찢어놓고 싶은 남성의 사디즘적 욕망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옷의 주름을 펴주는 것이 다리미의 기능이라면, ‘압핀 달린 다리미’는 오히려 옷을 찢어놓을 테니까요. ‘압핀 달린 다리미’를 은유로 이해하면, 원관념은 ‘남성의 성적 욕망’이고 보조관념은 ‘압핀 달린 다리미’입니다. 이것을 직유의 형식인 ‘A는 B처럼 ~하다’로 표현하면 ‘남성의 성적 욕망은 압핀 달린 다리미처럼 옷을 찢고 싶어 한다’가 되겠죠. 맨 레이의 작품을 매매했던 화상이자 그에 대한 논문을 썼던 아르투로 슈바르츠Arturo Schwarz, 1924~2021에 의하면, 맨 레이 자신이 ‘압핀 달린 다리미’에 성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압핀 달린 다리미로 옷을 갈기갈기 찢을 수 있어. 그렇게 해본 적이 한번 있지. 아름다운 열여덟 살 흑인 소녀에게 찢어진 옷을 입고 춤을 춰달라고 부탁했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찢어진 틈새로 살이 보이더군. 마치 브론즈가 움직이는 것 같았어. 정말 아름다웠지.”
사실 이런 성적인 은유는 남성 관람자의 관점에서 찾아낸 은유일 겁니다. 여성 관람자의 관점에서는 다른 은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남성 관람자에게는 ‘압핀 달린 다리미’가 성적인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도구일 수 있지만, 여성 관람자에게는 여성의 억눌린 분노와 불만에 대한 은유일 수 있습니다.
에드가 드가, 『다림질하는 여인들』, 1884~1886년. 캔버스에 유화, 76 × 81.5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
다림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던 수많은 여성 세탁부나, 다림질을 포함해서 가사 노동을 전담했던 주부들에게 ‘압핀 달린 다리미’가 성적인 욕망의 표출이라고요? 이럴 때 저희 어머니가 잘 쓰시는 표현이 있습니다. “택도 없는 소리.” 세탁부나 가정주부들이 다림질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 지겨운 다림질. 남의 옷을 다림질하는 이 지겹고 힘든 일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 거야? 쥐꼬리만큼 보수를 받으면서 말이야. 이 옷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 ‘언제까지 남편 셔츠나 다리면서 살아야 하지? 이 옷들을 다 찢어버리고 싶어.’ ‘압핀 달린 다리미’는 여성들의 억눌린 분노와 불만의 배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관점에서 작품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니 참 신기하죠?
오펜하임의 『오브제』에 대한 해석 방법을 활용해서 살펴볼 두 번째 초현실주의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의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1931입니다. 이 그림 역시 현실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녹아내리는 시계’라는 초현실적인 대상을 그린 작품이죠.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다들 아실 거라 믿습니다. 사진으로는 얼마나 작은지 감이 안 오지만 실제로 보니 굉장히 작더군요. 그나마 그림 옆에 여백을 크게 두고 액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작품이 실제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년. 캔버스에 유화, 24 × 33 cm. 현대미술관, 뉴욕. |
오펜하임과 맨 레이의 작품 해석에 동원됐던 초현실주의 개념들이 달리의 그림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그림에는 ‘오브제’ 개념이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펜하임과 맨 레이의 작품은 둘 다 레디메이드 조각작품의 범주에 들기 때문에 ‘오브제’로 설명될 수 있지만, 그림은 그럴 수가 없죠. 대신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과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이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데포르마시옹’이란 대상을 왜곡해서 표현하는 기법으로 녹아서 축 늘어진 시계들이 바로 이 기법의 예입니다. ‘데페이즈망’은 매우 사실적으로 주변 대상을 묘사하면서 그 속에 이질적인 요소들을 배치하는 기법인데요. 카탈루냐 해변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 반면, 그림 전면의 녹아내리는 시계들이나 그림 중앙의 기이한 형체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죠. 친숙하고 일상적이었던 시계는 “카망베르 치즈처럼 녹아내리면서” 낯선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동시에 시계는 시계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요.
그림에 사용된 초현실주의 기법데포르마시옹, 데페이즈망, 낯설게 하기, 쓸모없게 만들기을 모두 열거해 봤는데 아직 그림의 의미가 드러나지는 않았죠? 이 그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녹아내리는 시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그림도 결국에는 은유의 관점에서 의미를 따져봐야 합니다. 다행히도 이 그림은 오펜하임의 ‘털 달린 찻잔’이나 맨 레이의 ‘압핀 달린 다리미’에 비해 이해하기가 조금 더 쉽습니다. 달리가 ‘기억의 지속’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의 의미에 대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으니까요. 1,500점 정도 되는 달리의 작품 중에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2013년 퐁피두 센터에서 열린 달리 특별전에서는 200점이나 되는 달리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정말 원 없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작품 중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더군요. 200개의 물음표 다발을 머리에 이고 그 무게에 짓눌려 무거운 발걸음으로 좌절하면서 전시회를 나왔죠. 무의식의 흐름에 작품 제작을 맡기는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 Automatism으로 그려진 이미지들뿐만 아니라 기발하고 난해한 달리의 은유들은 해석이 아니라 해독이 필요한 암호체계 같았습니다. ‘녹아내리는 시계들’ 그림은 ‘기억의 지속’이라는 친절한 제목 덕분에 다른 작품보다 그나마 이해하기가 조금 더 편합니다. ‘기억의 지속’은 영어로는 ‘persistence of memory’이고 카탈로니아어로는 ‘la persistència de la memòria’입니다. ‘persistence’에 ‘고집,’ ‘지속,’ ‘집요함’ 등 여러 의미가 있다 보니, 이 작품은 글 쓰는 사람에 따라 때로는 ‘기억의 지속’으로, 때로는 ‘기억의 고집’으로, 또 때로는 ‘기억의 집요함’으로 번역되더군요. 이 중 어느 단어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라는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해 줄까요? 달리가 ‘시간의 상대성’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아서 저는 중립적인 느낌이 드는 ‘기억의 지속’을 선택했습니다. ‘고집’이나 ‘집요함’은 살짝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것 같아서요.
‘모피로 뒤덮인 찻잔’이나 ‘압핀 달린 다리미’처럼 ‘녹아내리는 시계’ 역시 은유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녹아내리는 시계’를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은유로 보는 해석입니다. 시계가 상징하는 것은 시간이므로, 그림의 의미를 직유의 형식인 ‘A가 B처럼 ~하다’ 형식으로 표현하면 ‘녹아내리는 시계로 잰 것처럼 시간이 길게 늘어났다’가 될 겁니다. 원관념인 ‘늘어진 시간’과 보조관념Vehicle인 ‘녹아내려서 늘어진 시계’ 모두 ‘늘어짐’이라는 유사성으로 연결되는 거죠. 딱딱했던 시계가 “카망베르Camembert 치즈처럼 녹으면” 부드럽고 유연해지겠죠? 그러면 시간이 일정하게 동일한 속도로 흐르지 않고 쭉 늘어날 겁니다.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 그림은 다른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고 항상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의 “절대시간” 개념을 부정하고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년의 “상대적 시간” 개념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으로 흔히 해석됩니다. ‘녹아내리는 시계’가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시각적 은유라는 거죠. 사실, “시간 팽창 혹은 시간 늘어짐” 이론은 저 같은 과학 문외한에게는 설명은 고사하고 이해하기도 벅찹니다. 재미있는 일을 할 때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재미없는 일을 할 때는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는 정도가 시간의 상대성에 대한 제 이해 수준입니다. 시간이 사람의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달리 자신은 ‘녹아내리는 시계’가 상대성이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햇빛을 받아 녹아내리는 카망베르 치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인터뷰했다고 합니다.
은유의 관점에서 ‘녹아내리는 시계’를 이해하는 두 번째 해석은 달리 자신이 붙인 그림의 제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친절하게 힌트를 제공해 주는 그림의 제목, ‘기억의 지속’을 묵혀버리면 안 되죠. 시간의 상대성을 표현한 직유, ‘시간이 녹아내리는 시계로 잰 것처럼 길게 늘어났다’에서 ‘시간’의 자리에 ‘기억’을 집어넣으면 ‘기억이 녹아내리는 시계로 잰 것처럼 오래 지속된다’가 됩니다. ‘녹아내리는 시계’가 ‘기억의 지속력’에 대한 은유가 되는 거죠. 제목에 ‘기억’이라는 단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성이론에서 ‘녹아내리는 시계’의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던 달리의 말을 토대로 저는 달리가 ‘기억의 지속력’이라는 주제를 상대성이론보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 분석 이론에서 가져오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프로이트는 기억, 특히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중요한 사건의 기억이 억압되거나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면서 현재의 행동과 정서적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도라Dora, 꼬마 한스Hans, 늑대 인간Wolf Man 등 여러 사례 연구를 통해 어린 시절의 무의식적 기억이 환자에게 어떻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죠. 지금도 아이의 문제행동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갈등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해 주는 여러 TV 프로그램에서 프로이트의 주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건, 어른이건 문제의 원인이 유년기의 기억에 있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런데 사람들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동물의 행동 교정 프로그램에서도 반려견이나 반려묘의 문제 원인을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에서 찾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런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우리의 심리가 유년기의 경험에 지배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과거의 경험 중 중요한 기억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무의식 속에 잠재된 상태로 지속됩니다. 그러다가 꿈을 통해 의식으로 비집고 나오기도 하고요. 이런 기억의 지속력이 그림에서는 ‘녹아내리는 시계’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기억의 지속』에는 은유뿐만 아니라 환유도 들어 있습니다. 그림의 왼쪽 아래 주황색 회중시계에는 개미 떼가 몰려 있고, 이 회중시계 옆의 늘어난 시계에도 파리가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이 둘은 부패한 고기에 몰려드는 곤충으로 죽음과 부패를 상징하는 환유입니다. 앞글, 「그림에도 은유가 있나요? ①」에서 잠깐 말씀드렸듯이, 은유는 유사성similarity에, 환유는 인접성contiguity에 토대를 둔 비유법입니다. 죽어서 썩어가는 고기 옆에는 개미와 파리가 꼬이는 법이죠. 개미와 파리를 통해 죽음과 부패를 나타낸 겁니다. 녹아내려서 늘어진 시계는 시계로서 기능을 상실한 죽은 시계입니다. 무의식 속에 억압된 기억의 관점에서 보면 일정한 속도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계로서의 시계는 죽어 있는 거죠. 무의식에서는 기계적,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치즈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 또 늘어났다 줄어드는 심리적 시간만이 존재합니다. 흔히 달리 자신의 자화상으로 여겨지는 그림 중앙의 괴물 같은 형체는 감은 눈 하나에 여러 겹의 속눈썹이 달려 있어서 꿈을 꾸고 있는 상태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그림 전체가 꿈을 통해 드러난 무의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앞에서 사실적인 이미지와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섞어놓는 기법이 데페이즈망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아직 기억하고 계시죠? 달리는 데페이즈망 기법으로 꿈의 무의식 상태를 보여줍니다. 꿈속에서는 사실적인 이미지와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뒤섞여 있으니까요. 간단하게 요약하면, 『기억의 지속』은 물리적 시간은 정지되고 심리적 시간만 존재하는 꿈의 무의식 상태를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초현실주의 작품을 세 점 살펴봤습니다. 이 세 작품에서 공통으로 찾을 수 있는 초현실주의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공통점은 오브제, 낯설게 하기, 쓸모 있는 물건을 쓸모없게 만들기, 데포르마시옹, 데페이즈망 같은 초현실주의 특유의 여러 기법일 겁니다. 이전의 미술 양식에서는 보기 힘든 새로운 기법들이죠.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세 작품 모두 은유를 잘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원관념은 숨겨둔 채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이미지와 형태로 이루어진 보조관념만 전면에 드러낸 작품이 많다 보니 초현실주의 작품은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숨겨진 원관념을 찾아내지 못하면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죠. 미술관에서 ‘이게 뭐지? 이 작품의 의미는 뭐야?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한 작품은 초현실주의 작품인 것 같습니다. 러시아 형식주의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 1896~1982 역시 「언어의 두 측면과 실어증의 두 형태Two Aspects of Language and Two Types of Aphasic Disturbances」1956에서 초현실주의 작품이 은유적 상징주의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을 정도니까요. 저 같은 미술 초보가 초현실주의 기법이나 양식을 논하는 것은 언감생심, 언어도단이죠. 다만 은유의 관점에서 작품을 논하는 것은 문학 전공자로서 용기를 내서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존의 여러 해석에 제 생각을 조금 덧붙여 봤습니다. 혹시 말이 안 되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