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의 선사-고대관 전시실 입구에는 벽 한 면 전체를 차지할 만큼 큰 울산 반구대 암각화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물론 실물 암각화에는 흰색 표시가 없어서 그림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반구대 암각화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
설명문에 따라 왼쪽 상단에 있는 사람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 ― 나중에 동굴 벽화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라스코 동굴 벽화 속 사람 형상과 반구대 암각화 속 사람 형상이 비슷하게 생겼더군요. ― 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관람객이 사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울산에 가서 이 그림을 보고 온 거 기억하지?”
“그럼요. 그런데 이걸 무엇으로 그렸을까요?”
이 질문을 남기고 일행은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어, 물감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또 있네.’ 저는 옆 관람객의 질문이 당연히 물감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와 똑같은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기해했죠. 반구대 암각화를 채색화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1971년에 발견된 이후 오십 년 동안 침수가 반복되면서 그림이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림이 침수되면 색이 바랠 것이라고 걱정하곤 했습니다. ‘지금 내 눈앞의 사진 속 그림이 흑백으로 보이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색이 바랬기 때문일 거야.’ 그런데 이런 제 생각이 틀렸더군요. 위 사진 설명에도 나오듯이 반구대 암각화는 “바위 조각을 쪼아서” 만든 작품입니다. 물감을 사용하지 않은 거죠. 아래 사진은 제가 망원렌즈 없이 찍은 반구대 암각화 전경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바로 앞에 강물이 흐르고 있어서 채색보다는 암각이 더 현실적이고 영리한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반구대 암각화, 기원전 5,000~4,000년경. 울산. |
물론 바위에 윤곽선을 새긴 다음 채색하는 암각 채색화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 중에는 암각 후 채색한 부분이 여럿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구대 암각화는 채색화가 아닙니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반구대’는 거북이 모양의 절벽 지형을 의미하고 ‘암각화’는 바위에 새긴 그림을 의미합니다. 만약 일행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걸 무엇으로 그렸을까?”라는 질문은 물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새긴 도구나 그림을 그린 방법에 관한 것이 될 겁니다.
이왕 반구대 암각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깐 살펴보고 넘어갈까요? 반구대 암각화는 기원전 5,000~4,000년경,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두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단단한 석기로 그림의 윤곽을 새긴 후 내부를 고르게 쪼거나 긁어낸 면 새김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윤곽이나 동물의 특징적 요소를 선이나 점으로 새긴 선 새김 방법이랍니다. 면 새김 방법은 신석기 시대의 방법이고, 선 새김 방법은 청동기 시대의 방법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제가 ‘이걸 도대체 무엇으로 그렸을까?’라고 물감에 대해 처음으로 궁금해 했던 것은 2013년 여름에 스페인의 알타미라Altamira 동굴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사실, 알타미라 동굴은 벽화를 보존하기 위해 2002년부터 일반인 관람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대신 동굴 옆에 박물관을 지어서 재현 동굴을 공개하고 있죠. 라스코 동굴 역시 1963년부터 모형 박물관만 관람객에게 공개하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 동굴 벽화를 볼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역사적인 현장에 와 있다는 감동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알타미라 박물관 입구,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ntrada_al_Museo_de_Altamira.jpg#/media/File:Entrada_al_Museo_de_Altamira.jpg 제공. |
물론 박물관과 미술관에 전시된 역사적인 유물들을 볼 때도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빈의 자연사박물관Naturhistorisches Museum에서 26,000~24,000년 전에 제작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von Willendorf를 마주했을 때는 예상보다 훨씬 아담한 크기11.1cm에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고, 베를린의 페르가몬Pergamon 박물관에서는 기원전 575년에 세워진 바빌론의 이슈타르의 문Ishtar Gate 앞에서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의 진한 파란색에 압도됐죠. 로마의 국립 마시모 궁전 박물관Museo Palazzo Massimo Alle Terme에서 본 기원전 1세기에 그려진 리비아 빌라The Villa of Livia의 정원 벽화는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e l'Orangerie의 전시실 벽면을 휘감고 있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수련Les Nymphéas』 연작1920~1926년보다 더 감동적이었고요.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에서 투탕카멘Tutankhamun, 기원전 1332~1323년의 황금마스크를 봤을 때는 한 번만 보는 것이 아까워서 한 번 더 보고 왔습니다.
리비아의 별장 정원 벽화, 기원전 30~20년. 국립 마시모 궁전 박물관, 로마. |
클로드 모네, 『수련』, 1920~1926년.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
이슈타르의 문, 기원전 575년. 페르가몬 박물관, 베를린. |
그런데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실이 아니라 작품이 원래 있던 현장에서 작품을 접할 때의 감동은 이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왕가의 계곡에 있는 파라오들의 묘지로 땅속 깊숙이 들어가 묘실 벽과 천장에 그려진 벽화들을 봤을 때나 폼페이의 빌라 벽에 그려진 벽화들을 봤을 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기원전 490~432년을 방문했을 때, 천장부터 벽까지 모두 조토Giotto di Bondone, 1266/67 혹은 1276~1337년의 프레스코화로 뒤덮여 있는 파도바Padova의 스크로베니 예배당Cappella degli Scrovegni에 들어갔을 때, 라벤나Ravenna의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에서 모자이크548년가 만들어내는 찬란한 색의 향연을 봤을 때,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교회에서 식당 출입문을 만드느라 예수님의 발이 사라진 『최후의 만찬』1490을 봤을 때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1935에서 말한 “진품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알타미라 박물관에서는 어땠을까요? 비록 모형이라 해도 동굴 벽화의 “물질적 지속성과… 역사적인 증언 가치까지 포함해서… 원천부터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적어도 90퍼센트 정도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기원전 447~기원전 432년. 아테네 |
스크로베니 예배당, 1,300년경. 파도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dova_Cappella_degli_Scrovegni_Innen_Langhaus_West_5.jpg#/media/File:Padova_Cappella_degli_Scrovegni_Innen_Langhaus_West_5.jpg 제공. |
산 비탈레 성당, 548년. 라벤나. |
알타미라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질문 하나 드려 볼까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는 무엇일까요? 에른스트 곰브리치 경Sir Ernst Gombrich, 1909~2001년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는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장에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첫 번째 작품 사진으로 실려 있고요. 그렇다면 혹시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일까요? 아닙니다. 2017년까지만 해도 스페인 북부의 엘 카스테요El Castillo 동굴 벽화가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로 간주됐답니다. 이 동굴 벽화는 약 40,800년 전 구석기 시대에 그려졌죠. 그런데 2017년에 인도네시아 술라웨시Sulawesi 섬의 레앙 테동게Leang Tedongnge 동굴에서 약 44,500년 전에 그려진 돼지 그림이 발견됐습니다. 1위 자리가 바뀌게 된 거죠.
엘 카스테요 동굴 벽화, 40,800년 전. 스페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ueva_del_Castillo_interior.jpg#/media/File:Cueva_del_Castillo_interior.jpg 제공. |
술라웨시 동굴 벽화, 44,500년 전. 인도네시아. Baaran Burhan 사진. |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알타미라 동굴 벽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은 36,000년 전에 그려졌고 그 후 오랜 시간에 걸쳐 덧칠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재현된 것이라 해도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제가 그때까지 접해본 예술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6,000년 전에 제작된 것을 감안하면,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오랜 역사성과는 별도로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우선 크기 면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동굴 자체도 크고길이 1,000m, 벽화 속에 그려진 동물들도 컸습니다. ‘아주 큰 방’이라고 불리는 곳길이 18m, 너비 9m, 높이 1.2~2m에는 동물들 그림이 가득했습니다. 벽화 속 들소 무리와 말, 멧돼지, 암사슴은 실물보다 더 크죠. 암사슴 그림은 길이가 2.2m에 폭이 2m나 됩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중 구석기 시대 최후기인 마들렌기期에 그려진 들소 그림. By Museo de Altamira y D. Rodríguez,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4512679 제공. |
알타미라 동굴 갱의 천장 벽화 중 들소 그림. Yvon Fruneau 사진.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58155399 제공. |
알타미라 동굴 속 천장 벽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eocueva_de_Altamira.jpg#/media/File:Neocueva_de_Altamira.jpg 제공. |
벽화가 동굴 천장에 그려진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이나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 베르사유 궁전 등 수많은 교회와 궁전에서 천장화를 봤지만 인위적인 건축물이 아닌 자연적인 구조물에, 그것도 압도적인 크기의 천연 천장들에 그려진 그림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경이로웠습니다. 벽화 하면 으레 벽에 그려진 그림을 떠올렸으니까요. 천장이 나지막한 데다 평평해서 울퉁불퉁한 벽보다 그림 그리기가 더 용이했을 겁니다. 혹시 튀어나온 부분이 있으면 영리하게도 그 부분에 동물의 배를 그려 넣거나 해서 입체감을 살렸더군요.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또 다른 인상적인 특징은 색채였습니다. 동굴 벽과 천장에 그려진 수십 마리의 동물들 그림을 짧게 표현하면 검고 붉었습니다. 벽과 천장의 바탕색은 노란색이 많았지만 동물의 윤곽선은 검은색으로 그려지고 그 안은 붉은색으로 채워진 경우가 많았죠. 검은색으로만 그려진 동물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동굴 안에 설치된 조명으로 붉은색이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동굴에 살거나 혹은 주술 의식을 위해 동굴에 들어왔을 선사 시대 사람들은 횃불이나 모닥불 불빛에 비친 벽화들의 색깔과 크기에 틀림없이 압도당했을 겁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물감에 대해 궁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그 오래전 선사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물감을 구했을까? 어떤 재료로, 어떻게 저 물감을 만들었을까?’
오래전 기억을 되살리면서 구글에서 알타미라 동굴 벽화 사진들을 훑어보다 보니 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호모 사피엔스: 진화∞관계&미래?」 전시회2021를 개최한다는 뉴스가 눈에 띄더군요. 선사 시대의 미술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회였습니다. 선사 시대는 흔히 구석기기원전 40,000~9,000년, 중석기기원전 9,000~8,000년, 신석기기원전 8,000~2,300년로 구분됩니다. 기왕 선사 시대의 미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잠깐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미술작품은 무엇일까요? 범위를 조금 더 넓혀서 질문을 드리면, 가장 오래된 미술작품의 형태는 무엇일까요?
1. 동굴 벽화
2. 작은 조각상
3. 도자기
4. 서예
5. 자수
당연히 동굴 벽화는 선택하셨죠? 그런데 답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조각상들입니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해서 농경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유목 생활을 했기 때문에 들고 다니기 쉽도록 작은 크기의 조각상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반구대 암각화 박물관의 전시관에서는 이런 조각상들을 ‘지닐 예술품’이라고 설명해 놓았더군요. 이런 ‘지닐 예술품’ 중 대표적인 조각상이 풍만한 여성의 모습으로 다산성을 상징하는 작은 비너스 상들입니다. 사실 저는 이 전시회에 다녀오기 전에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26,000~24,000년 전가 가장 오래된 조각 작품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보다 더 오래된 비너스 조각상들도 많더군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너스 조각상은 『홀레펠스 비너스Venus of Hohle Fels』40,000~35,000년 전 조각상이라고 합니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동굴 벽화로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고 비너스 조각상으로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한 것 같습니다.
왼쪽 사진 -「호모 사피엔스: 진화∞관계&미래?」 전시회2021에 전시된 『홀레펠스 비너스』. 오른쪽 사진-『홀레펠스 비너스』, 40,000~35,000년 전. 높이 6cm, 독일.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VenusHohlefels2.jpg#/media/File:VenusHohlefels2.jpg 제공. |
이 전시회에서 선사 시대의 진짜 동굴 벽화들과 비너스 조각상들이 전시됐을까요? 그럴 리가요. 비너스 조각상들은 실물 크기의 모형이고 동굴 벽화들은 디지털 영상이었습니다. 그래도 가장 오래된 여러 비너스 조각상과 동굴 벽화들을 한 곳에서 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죠. 동굴 벽화의 영상은 동굴처럼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진 통로 양쪽 벽에 실물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상영됐습니다. 알타미라 동굴15,500년 전을 포함해서 프랑스의 쇼베 동굴Chauvet, 35,000년 전, 코스케 동굴Cosquer, 27,000년 전, 라스코 동굴Lascaux, 17,000년 전, 루피냑 동굴Rouffignac, 17,000년 전의 벽화가 소개됐죠. 그런데 들소나 말, 사슴, 곰, 멧돼지 같은 동물들을 그린 이 동굴 벽화들에 한 가지 공통된 특성이 있더군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마찬가지로 선사 시대의 다른 동굴 벽화들 역시 검은색과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진화∞관계&미래?」 전시회2021에 전시된 라스코 동굴 벽화 영상. |
도대체 그 오래전 선사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물감들을 구했을까요? 여기서 ‘물감’은 “물체에 색을 입힐 수 있는 색소”「위키백과」인 ‘안료’를 의미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물감은 그림을 그리거나 섬유 등을 물들이는 데 사용하는 재료”입니다. 이 물감 중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재료는 안료顔料, pigment, 옷감을 물들이는 데 사용하는 재료는 염료染料, dye라고 부릅니다. 통칭인 ‘물감’을 사용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조금 더 전문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안료’라는 용어를 사용해 보겠습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비롯한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에 사용된 다섯 가지 주요 색깔은 갈색과 검은색, 붉은색과 노란색, 흰색입니다. 이 다섯 가지 주요 색상의 재료를 한 번 추측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무래도 검은색의 원료를 추측하기가 가장 쉽지 않을까요? 네, 여러분의 추측이 맞습니다. 검은색 안료의 원료는 숯입니다. 불이 있는 곳에는 항상 숯이나 재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아궁이에 불을 지펴본 분들은 타다 남은 부지깽이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선사 시대 사람들도 그랬겠죠? 나무나 동물의 지방을 태워 만든 숯이나 재가 검은색의 원료라면 흰색 안료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요? 백토 혹은 백악white chalk이랍니다.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흰색 흙으로 고령토라고도 불립니다. 흰색 안료를 흰색 흙으로 만들었다면 노란색 안료yellow ochre의 재료는 노란색 흙인 황토라는 걸 쉽게 추측하셨죠? 붉은색 안료red ochre의 재료는 적철광赤鐵鑛, hematite이 많이 함유된 붉은 흙입니다. 이 붉은색 안료를 석간주石間硃라 부르더군요. 선사 시대 사람들은 황토를 불에 가열해서 빨간색 안료를 얻기도 했답니다. 이런 방법을 알아냈다니 대단하죠? 갈색 안료brown ochre는 갈색토로 만들거나 여러 가지 안료를 섞어서 만들면 되고요.
세 가지 색조의 안료,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rei_verschiedene_Ockert%C3%B6ne.JPG#/media/File:Drei_verschiedene_Ockertöne.JPG 제공. |
적철광,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ematite.jpg#/media/File:Hematite.jpg 제공. |
요약하면,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포함해서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에 사용된 안료의 재료는 백토, 황토, 적토, 갈색토, 숯과 재였습니다. 선사 시대의 미술에 관한 책들과 동영상에서는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에 사용된 안료를 ‘흙으로 만든 안료’earth pigments라고 간단하게 종합하더군요. 제가 미술 교과서로 삼아서 보고 또 보는 BBC의 『인문학과 과학 동영상들Films for Humanities & Sciences』중 「안료」2003 편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 안료를 어떻게, 무엇으로 동굴 벽과 천장에 칠했을까요? 숯으로는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만, 흙이나 재는 그냥 칠할 수가 없죠. 「인문학과 과학 동영상들」에서는 호주 원주민들이 석간주에 물을 넣은 다음 흙 입자가 고와지도록 돌로 열심히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사 시대 사람들도 그런 과정을 거쳐 물감을 준비했겠죠? 선사 시대 사람들은 안료가 동굴 벽에 잘 발리도록 물뿐만 아니라 식물의 수액이나 동물의 기름을 섞었고, 심지어는 침이나 피, 골수를 섞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감이 준비되면 나뭇가지나 나뭇잎, 동물의 털 등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고요. 붓 대용이죠. 때로는 손가락이나 손을 이용하고, 때로는 입이나 대롱으로 물감을 불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아래 첫 번째 그림은 손에 물감을 발라서 찍어낸 것이고, 두 번째 그림은 벽에 손바닥을 댄 다음 그 위에 물감을 불어서 그린 것입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 중 손 그림. http://www.quesabesde.com/noticias/nomada-altamira-museo,1_5259 제공. |
알타미라 동굴 벽화 중 손 그림. http://www.quesabesde.com/noticias/nomada-altamira-museo,1_5259 제공. |
이제 그림의 역사는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에서, 안료의 역사는 색깔 있는 흙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안료에 대한 제 궁금증이 다 해결됐을까요? 그럴 리가요. 알타미라 동굴 벽화 이후에도 ‘이 그림은 무엇으로 그렸을까?’라는 질문을 얼마나 자주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예쁜 색깔의 그림들이 무수히 많으니까요. 요한 야콥 디에스바흐Johann Jacob Diesbach, 1670~1748가 파란색 안료인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를 합성해 내는 데 성공한 1706년까지 수많은 천연 안료가 만들어졌고, 각각의 안료에는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독특한 역사가 있습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합성 안료도 마찬가지고요. 아마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안료에 대해 다 알아낼 수 없을지 모릅니다.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 1947~ 같은 학자는 『파랑의 역사Blue: The History of a Color』2001를 시작으로 『검은색의 역사Black: The History of a Color』2008, 『녹색의 역사Green: The History of a Color』2014, 『빨강의 역사Red: The History of a Color』2016, 『노랑의 역사Yellow: The History of a Color』2019, 『흰색의 역사White: The History of a Color』2022에 이르기까지 20년 넘게 색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오고 있더군요. 이런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하다 보면 ‘이 그림은 무엇으로 그렸을까?’에 대한 답을 조금은 찾아낼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