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에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19년이 흘렀습니다. 기적의도서관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의미 있는 곳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한 번, 기적의도서관에서 ‘기적’을 만드는 사람을 만나 봅니다. 다섯 번째로 만난 사람은 ㈜기용건축건축사사무소의 김병옥 대표입니다. 김병옥 대표는 지금까지 개관한 16개의 기적의도서관 중에서 9개 관의 설계를 맡았으며, 정기용 선생의 유지를 이어 ㈜기용건축건축사사무소를 이끌고 있습니다.
김병옥 기용건축건축사사무소 대표. |
― 2003년에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참여하셨습니다.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를 기억하시나요?
저는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참여하지는 못했어요. 잠깐 기용건축에서 나와 있다가 정기용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2003년 7월부터 참여했습니다. 순천관 공사가 막 시작할 때였어요.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께 “이 설계비로 어떻게 진행해요?”라고 말씀드리기도 했어요. 비용만 놓고 보면 무리한 프로젝트였거든요. 우리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순천관, 진해관, 서귀포관, 제주관이 동시다발적으로 건립되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요.
그래도 정기용 선생님과 함께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전에 없던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프로젝트였으니까요. 정기용 선생님처럼 다르게 보고 자세히 보고 뜯어보는 건축가들이 많지 않아요. 정기용 선생님만큼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건축가도 없을 거예요. 매번 정기용 선생님의 설계에 놀랐어요. 저렇게 설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할 정도로 항상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셨어요. 남들이 생각 안 하는 부분을 고민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 내셨어요. 기적의도서관이 큰 건물은 아닌데 새로운 요소들을 가득 담으셨어요.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그런 새로운 생각과 구상을 책임지고 설계 도면에 구현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제대로 도면을 그리려고 애썼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도 우리 사무실에서 만든 도면이 다른 회사에 비해 부족함이 없어요. 그런 점에서 자부심을 느껴요.
― 정기용 선생님과 어떻게 함께 일하시게 되었나요?
대학생 때 처음 뵈었어요. 정기용 선생님께서 프랑스에 계시다 귀국하셨는데, 제가 다니던 한양대로 출강하셨거든요. 4학년 때 정기용 선생님의 설계 수업을 듣고, 졸업할 때 선생님께 일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가타부타 말씀을 안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실로 찾아가서 생떼를 부렸죠. 그렇게 정기용 선생님과 일을 시작했어요. 중간에 제가 도망갔다 온 적이 있긴 한데, 거의 평생을 정기용 선생님과 함께 일했습니다.
― 기용건축에서 순천과 진해, 서귀포, 제주 등 총 9개의 기적의도서관을 설계하셨습니다. 소장님께 기적의도서관은 어떤 의미인가요?
기적의도서관은 제 삶에 도서관을 다시 돌려주었어요. 대학 다닐 때 도서관에 미친 적이 있었어요. 공부하러 갔다가 도서관이 주는 느낌에 매료된 거예요. 점점 장서들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책 보는 재미로 갔어요. 매일 도서관에 가서 살았어요. 동물이랑 새 그림에 빠져서 백과사전이든 단행본이든 계속 봤죠. 친구들도 저를 찾을 땐 도서관으로 왔어요. 그러다 도서관에서 몇 번 가방을 도둑맞았어요. 값비싼 사전이나 교재를 누가 훔쳐 간 거예요.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에 그런 일을 당하니 도서관에서 마음이 떠나더라고요.
그렇게 도서관을 한동안 잊고 살다가 TV에서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를 본 거예요. 정기용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을 때 옛날 일이 생각나더라고요. 저는 안 좋은 경험 때문에 도서관을 떠났지만, 아이들에게는 좋은 경험을 만들어 주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이제 60대에 접어들었는데, 도서관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노년의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요. 오롯이 책과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잖아요.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남은 삶을 위해 새로운 공부도 할 수 있어요. 요즘에 고전을 외워서 쓰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그런 걸 하기에도 도서관이 최고의 공간이죠.
― 기적의도서관이 우리나라 도서관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건축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기적의도서관 전에도 큰 건물은 공사비도 많고 뭔가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는데, 작은 시설에서는 변화가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기적의도서관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 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줬어요. 벽이 없이 열린 공간에서 아이들이 중층에도 올라가고 오목 공간에도 들어가고, 숨을 수 있는 공간도 있고, 다양한 공간 경험이 가능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이전에는 그렇게 설계해도 공사비가 많이 든다고 실현이 안 됐어요. 기적의도서관 이후에는 그런 게 가능해졌죠. 지금은 도서관이나 다른 공공시설에 새로운 공간이 많이 생기고 있잖아요. 기적의도서관이 그런 공간 문화를 10~20년은 앞당겼다고 생각해요.
― 과거에 비해 도서관 건축의 질이 나아졌다고 봅니다. 새롭고 매력적인 도서관들도 많아지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도서관 건축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감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건축가는 설계 발주자와 도서관 운영자, 이용자 등의 생각을 공간으로 풀어내는 사람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도서관과 관계된 사람들과의 공감이 우선이에요. 건축가도 도서관에 대해 공부가 필요한데, 혼자 할 수 없어요. 발주자와 사용자는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 명확히 요구하고, 건축가는 그 요구에 담긴 욕구를 파악해서 공간으로 보여줘야 해요. 공감, 감응, 협업이 필요한데 여전히 잘 안되는 게 현실입니다. 건축 행정에도 변화가 필요해요. 설계대로 공사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행정적으로 처리하기 쉽게 설계를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 앞으로 공공도서관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접근성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도서관에 가려면 애써 찾아가야 하잖아요. 여전히 많은 도서관이 땅값 때문에 주거지 외곽에 있는데, 기본적으로 도서관은 상업지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해요. 동네에 학교나 빵집, 카페처럼 기적의도서관이 있는 거죠. 북카페 같기도 하기도 하고 만화방이나 놀이터 같기도 하지만, 도서관의 기능이 강화된 곳 말이에요. 특별한 혜택을 멀리 떨어진 도서관에 가서 누리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해요.
★ 인터뷰 및 글 : 서동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