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민의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촛불혁명과 개벽세상의 주인노릇을 위해」. 백낙청 책의 서문 제목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서문의 내용은 그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거의 모든 현실의 과제를 다 망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66년 일찍이 “동양 역사의 효과적 갱생을 준비하는 작업”까지를 염두에 둔 ‘창작과 비평’이라는 잡지 제목의 이름짓기부터 시작해서 시민문학론,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근대의 이중과제론, 적당한 성장론 등 백낙청 이름짓기의 집대성은 아마도 ‘개벽세상의 주인’으로서 이름짓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주인노릇이란 촛불 주권자들의 인식 전환을 전제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행동이 없는 지식이나 깨달음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함행동이 있어야 앎인식이 생긴다. 촛불 이후 주권자로서의 행동이 없으면 주권자로서의 정체성과 인식은 지속불가능하다. ‘빼앗긴 주권’을 탈환하지 못하면 주권자는 다시 노예의 상태로 전락한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민주공화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민주주의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40조 이하부터는 차례로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이 국회와 정부, 법원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위임 민주주의, 대의정 체제다.
대한민국 헌법은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와 대의정이라는 한 회사 두 사업부 체제의 이중구조였다. 작전권이 없는 군대가 시체 군대이듯 입법-행정-사법권을 엘리뜨 대리인에게 빼앗긴 인민은 정치 주권자로서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나마 선거권 하나만 달랑 있어 간신히 숨만 쉬면서 연명하는 것이 현재 한국 주권자의 정치 현실이다.
촛불시민이 주인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런 헌법 체제의 변혁, 새로운 민주공화국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현실, 국가체제 자체에 대한 인민들의 인식 대전환이 필요하다. 백낙청이 강조하듯이 ‘공부와 연마’가 필요하다.
백낙청과 김용옥, 박맹수가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는 서구 근대의 시각으로 보아 왔던 세상을 이제는 다시 우리의 눈으로 완전히 다른 곳에 서서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하고 세상을 다시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들이 저지른 불의의 전쟁이었다. 아랍인뿐만 아니라 유태인도 닥치는 대로 학살한 대량 학살과 약탈의 전쟁이었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은 성지회복을 명분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동시에 동서 교회의 사실상의 1인 수장이 되고자 한 교황의 야욕, 상권을 확대하고자 한 베네티아 상인들의 농간, 물자 약탈과 일확천금을 노린 농민들과 불량배들의 합작품이었다. 교황은 십자군 병사들에게 미리 죄를 사해주었고 상당한 전리품을 약속했다. 당연히 십자군이 지나가는 원정로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마을들은 약탈과 방화의 표적이 되었다.아인 말루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이와는 백팔십도 달랐다. 동학농민군은 비폭력 평화 혁명을 천명했고 이를 실천했다. 동학농민군은 권력과 영토 확장, 학살과 약탈과 점령을 목적으로 일어선 것이 아니었다. 동학농민들은 탐관오리들을 내쫓아 나라를 바로 세우고보국, 輔國 도탄에 빠진 인민들의 삶을 구제함으로써 세상을 구하려고구세제민, 救世濟民 했다.
우리 동학군은 칼에 피 묻히지 않고 이긴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 목숨은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행진하면서 지나갈 때는 민폐를 절대 끼치지 않는다. 효자-충신-열녀-존경하는 학자가 사는 동네의 십리 이내에는 주둔하지 않는다.「대적시 약속 4항」 그리고 병든 자는 치료해주고 항복한 자는 받아들이고 굶주린 자는 먹여주고 도망간 자는 쫓지 않는다.「12조 계군호령」 그 당시 특파원들도 이런 농민군의 규율을 칭찬해요. (중략) 동학의 비폭력이 3.1운동, 그리고 2002년 효순이 미선이 미군 장갑차 사건 촛불집회, 2016년 촛불집회로 이어집니다.
- 특별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 『창작과 비평』 (2021년 가을호), 128쪽
동학농민군은 실제로 12개 군호軍號가 적힌 군기를 들고 행진했다. 조경달은 이런 농민군의 비폭력 평화 기조를 향촌의 공동체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정의로움으로 확신하면서 그 도덕성과 규율성을 내외에 과시한 것으로 해석한다.조경달의 『이단의 민중반란』, 178쪽 전주화약 이후 동학농민군이 펼친 ‘집강소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치와 마을공동체 민주주의의 극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결전이었던 공주대회전大會戰과 우금티전투에 대해서 죽창을 들고 ‘가자 한양으로’ 식의 서사극이 많이 유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가장 왜곡된 오독이다. 동학농민군은 그렇게 죽창으로 기관총을 상대할 만큼 어리석은 대오가 결코 아니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냉정하게 정세를 파악한 상태에서 월가 점령 시위처럼 서울 이남의 요충지인 공주를 점거농성하여 유생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려고 했었다. “요컨대, 충군애국지심을 가진 전국의 사민士民들과 함께 항일 의려를 형성한 뒤 공주를 확거·고수確據·固守하면서 호서도회를 개최하여 ‘전주화약’ 때처럼 평화적인 ‘정치협상’을 시도한다는 전술”이었다.지수걸, 「1894년 ‘공주 대회전’의 성격과 의미」 그러나 이 전술은 동학군 내부의 배신과 이탈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30만 명 이상의 동학농민군과 조선 인민들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당시 조선의 인민은 약 1천8백만 명 정도였다.
‘홀로’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더불어’의 개벽 세상이 온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살면서 동시에 언어라는 소통체계를 통해 마을공동체와 국가를 만들어 공존의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근대 자본주의는 가족공동체까지 해체시키면서 79억 개 이상의 세상을 제각각 칸막이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우리는 이 감옥을 깨고 다시 79억 개 이상의 세상을 공존과 공유의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기후위기에 적응하고 극복하는 생존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개목걸이처럼 우리 목에 채워진 서구 근대의 이원론과 극단의 개인중심주의 세계관을 과감하게 우물에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의 우물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성찰과 반성을 통해 자신의 우물 안 세계관을 뿌리부터 뽑아내는 대전환의 도약을 감행해야 한다. 검색에서 사색으로, ‘홀로’에서 ‘더불어’로 공동체를 재생시켜야 한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않으면 개인도 해방될 수 없고 사회와 국가 체제의 전환도 불가능하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원전 9세기에서 2세기까지를 ‘축의 시대’라고 이름지었다. 이 시기에 계속된 전쟁과 폭력으로 인민들의 삶은 불안정하고 불안했다. 대량 살육과 살인은 일상이었고 불평등은 극에 달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삶을 스스로 실천하고 모범을 보이는 현자와 예언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인간 내면의 깊숙한 끝까지 들어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고 명상과 초월의 체험을 통해 인간성의 원리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다. 이들은 인민들에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다른 삶을 창조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나아가 기존의 지배 체제를 허물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인도에서는 붓다와 우파니샤드 명상가들이, 중국에서는 공자와 맹자, 노자, 묵자 등의 사상가들이,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아, 이사야 등의 선지자들이, 그리스에서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이 그들이었다.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울리히 두크로 외의 『탐욕이냐 상생이냐』
이들이 공히 인민들에게 깨우친 지혜는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라는 상호주의의 도덕이었다. 이들은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당연한 상식에서 출발했다. 타인, 나아가 타민족에 대한 공감과 자비행의 실천이야말로 나의 삶을 고양시키고 전쟁과 폭력을 근절하는 지름길이었다. 나는 곧 너이고 우리이며,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돼 있는 ‘서로 주체’의 이웃이었다. 틱낫한 스님은 이를 상호존재inter-being라고 이름짓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훈련을 받아 습관이 된 자비심의 실행이었다.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삶이었다.
축의 시대 선각자들은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 정신의 고양을 잠깐 체험했다가 다시 자기중심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늘 자비의 삶을 다시 환기시켰다. 이들은 정치를 외면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가장 철저하게 정치의 근본 지점으로 들어가 국가 폭력과 국가 간 전쟁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민 개개인들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었다.
붓다는 자아란 우리의 감각기관과 신경계가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라고 설파했다. 작자作者는 없고 오직 행위만이 있을 뿐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나를 버릴 때 비로소 죽음의 공포와 온갖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붓다는 꼬쌀라국의 위두다하 왕이 자신의 종족인 샤까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군대를 몰고 쳐들어갈 때 세 번씩이나 침략을 저지하기도 했다. 붓다의 고향이기도 한 샤까족의 수도 까삘라왓투로 가는 길 중간의 죽은 고목 아래 뙤약볕 속에서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꼬쌀라국의 대군을 가로막은 것이다. 당시 붓다는 모든 나라에서 존경받는 수행자이자 스승이었고 위두다하도 재가신자였다. 위두다하는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가다국의 아자따쌋투 왕이 왓지족을 공격하려고 할 때도 붓다는 이를 저지했다.
경전이 전하고 있는 붓다의 모습에서 나는 천안문 사태 당시 윗통을 벗은 채 맨몸으로 홀로 탱크 부대 앞에 선 중국의 어떤 청년을 떠올린다.
촛불 주권자들을 주목하고 동학과 원불교의 후천개벽 세상을 주목하는 백낙청은 여전히 먼저 깨닫는 선각자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오늘날에는 기후위기가 곧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라는 점이 어느 정도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도 상식을 넘어 한 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 「기후위기와 근대의 이중과제」, 같은 책 360쪽
이 지점에서 나는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주의’가 개벽세상의 실천에서 어떤 행동으로 구체화될지 자못 기대가 된다.
붓다는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八正道을 설파하면서 바른 견해, 바른 생각과 함께 바른 언어를 제시한다. 백낙청이 강조하는바 변혁적 중도주의의 그 중도는 개벽세상을 여는 행동의 이름짓기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이해한다.
백낙청은 인민의 삶을 해방시키기 위한 선각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서원誓願, panidhi의 삶을 살아왔다. 기후위기 시대 그가 새로운 개벽사상으로 가는 길을 위해 지을 ‘앎과 함’의 새로운 서원과 이름짓기는 과연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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