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 캐나다 장애인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점은 ‘분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는 최선을 다해 장애인을 ‘메인스트림’으로 가게 했다. 우리가 원하던 바였다. 장애인도 메인스트림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반 아이들로 하여금 장애인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지난주에 소포를 하나 받았다. 이번 여름에 대학공부를 마친 큰 아이의 학교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졸업식을 할 수 없게 되자 캐나다 대학들은 집으로 졸업장을 발송해 주었다. 소포상자에는 졸업가운 휘장, 기념 티셔츠와 파티용 폭죽까지 들어 있었다. 비록 교정에서 사진 한 장 찍지 못했으나 아쉬움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아이가 졸업장을 받은 것 자체만으로도 많이 기뻤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취직까지 했으니, 내 생애에 이렇게 ‘빛나는 졸업장’을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큰 아이는 청각장애자이다. 두 살 때 아이의 청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우리 부부는 아이의 교육에 줄곧 몰입해왔다. 목표는 단순했다. 아이가 보통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아이 엄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잘 듣지를 못하니 수화를 가르쳐야 했으나 수화를 사용하면 일반인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을 것 같았다. 우리 아이처럼 청력이 미세하게나마 살아 있으면 보청기를 끼고 어떻게든 소통하게 하려고, 입 모양을 보고라도 소통하게 하려고 우리 같은 부모들은 사력을 다했다. 장애를 가졌으나 정상인처럼 보이게 하고, 또 정상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소통하게 해야 했다. 그래야 차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소통방식의 다름으로 인해 겪게 될지도 모를 사회의 차별과 배제가 정말 두려웠다.
캐나다에 이민을 오게 된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 역시 큰 아이의 장애 문제였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별 문제가 없었다. 운좋게도 학교 안팎에서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2학년이 되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담임교사는 “아이가 학교생활을 조용하게 잘 한다”고 했다. 듣는 데 문제가 있으니, 분위기 파악 못하고 큰 소리로 말을 해 수업에 지장이나 주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터였다. 학교생활을 ‘조용하게’ 잘 한다고 하니 그런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는 그냥 방치되었다.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들을 수 없었던 아이는 뒷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만화책만 봤다. 아이가 조용하게 잘 있으니 선생님은 문제삼지 않았다. 선생님이고 학교고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학교나 교사가 아이를 일부러 방치하거나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대로 두었을 뿐이다. 학교에는 시스템은 물론 청각장애인 교육에 관한 매뉴얼조차 없었다.
그즈음 미국에 특파원으로 나갔다가 들어온 어느 선배의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미국은 장애인 천국이더군.” 선배는 스키장에서 직접 경험한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스키를 즐기더라는 것이다. ‘놀이’에 대해 이만큼 배려하는 사회라면 ‘교육’에 대해서는 몇 배는 더 배려할 것 같았다. 이민 수속기간이 비교적 짧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뉴욕 출장길에 들른 토론토에서 어떤 광경을 보고 캐나다로 가자고 마음을 굳혔다. 이른 아침 출근시간에 토론토 시내버스를 탔다. 어느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춰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바깥을 내다보니 시각장애인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던 버스 기사가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건너고 있었다.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는 출근길인데도 “빨리 가자”고 말하는 승객은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모두가 무신경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감동적이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캐나다에 살러 와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그런 일들을 숱하게 경험했다. 버스 승객들처럼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비교를 할 수 있는 우리 눈에는 그 당연한 일들 하나하나가 대단히 특별한 배려로 보였다. 집 근처 공립학교에 아이를 보냈더니 사흘쯤 뒤에 교장, 담임교사, 교육청 관계자, 사회복지사가 모여 우리 아이를 위해 긴급회의를 했다. 아이에게 맞는 청각장애 교육 프로그램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있었다. 아이를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한 후 교육청에서는 다음 학기 스쿨버스가 배정될 때까지 등하교 시간에 택시를 보내주었다. 비용은 교육청에서 지불했다. 택시비는 한국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비쌌다. 아이가 간 곳은 청각장애 아이들만 모여 있는 일반 학교의 특수반이었다. 선생님은 두 분이 계셨다. 특수반이라고 하지만 고립된 것이 아니었다. 수학이든 영어든 아이들이 일반 반‘메인스트림’이라고 부른다에 가서 공부할 능력이 된다고 판단되면 선생님들은 해당 과목 시간에 아이들을 그곳으로 보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과목 수가 늘어났다. 우리 아이는 10학년고1쯤 되자 모든 과목을 메인스트림에 가서 공부했다. 일반 반의 선생님들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공부를 하러 오면 당연히 배려했다. 그렇게 공부하고 성적을 받아 대학에 진학했다.
내가 보기에, 캐나다 장애인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점은 ‘분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는 최선을 다해 장애인을 ‘메인스트림’으로 가게 했다. 우리가 원하던 바였다. 장애인도 메인스트림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반 아이들로 하여금 장애인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장애인에게 학과 공부를 시키면서, 장애인과 보통 학생들이 그냥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했다. 일반 학생들로 하여금 장애인을 몸이 조금 불편한, 그래서 때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로 보였다. 십수 년 동안 학교에서 늘 보면서 함께 생활한 사람이니 장애인이라고 특별하게 보일 리가 없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배웠으니, 도움을 주는 일 또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장애인이라고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이다 보니,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 중에 비하의 뜻이 담긴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내 선배 말마따나 캐나다도 장애인들에게 천국이나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지급하는 재난지원금도 장애인들은 더 많이 받는다. 그러나 그 천국이라는 것도 한국 시각으로 보면 그런 것일 뿐 이곳 시각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린이 노인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우선 보호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몇 주 전에 한국의 국회에서 사용된 ‘절름발이’라는 용어가 큰 관심을 모았다. 비하의 뜻이 담긴 그 말을 왜 굳이 쓰느냐는 젊은 의원의 지적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용어 자체가 아니다. 절름발이가 되었든 외팔이가 되었든 말이 중요한 게 아니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사는 세상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캐나다처럼 보통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배려받는 세상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특별하게 대접 받는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관용적으로 쓰이던 표현에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정도라면, 국회의원들은 한국사회 도처에 남아 있는 장애인 차별과 배제 문화를 걷어내기 위해 열배, 백배는 더 신경쓰고 일을 추진해야 마땅하다. 그럴 의지가 없다면 용어에 대한 문제제기는 한낱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장애인을 이용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유권자들이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대목이다.
★ 이 글은 뉴스퀘스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