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 년 동안 성인지감수성에 관해 교육 받은 바 없고, 그래서 무지몽매한 채 살아왔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 지금 여기서, 50대 남성인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거나 화가 나는 50대 이상 남성이라면 ‘개저씨’ 소리를 들어도 억울해 하지 마시라.
몇 년 전, 십수 년 만에 만난 옛 직장 여성동료한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함께 일하던 시절 가끔씩 야한 농담을 해서 화통하다고 생각했던 동료였다. 그이는 자기가 그런 농담을 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남자들이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하니까, 어색해하는 대신에 도리어 내가 막 나간 거다. 더 하지 말라고.” 말하자면 그 여성동료가 성적인 농담을 했던 까닭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남자들의 그런 말들을 앞서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함께 일을 할 때만 해도 나는 그 동료가 유쾌하고 거침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이 역시 남자들이 늘어놓는 성적 농담에 대해 매우 불편해 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런 속내를 십수년이 지나 털어놓았다는 사실은 그 불편함이 그만큼 크고 깊고 오래 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로서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후 관심을 가지고 다른 여성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우리 연배 대다수 여성들이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반응하지 않거나 그냥 웃는 것으로 그 시간을 넘기려 했다고 답했다. 얼굴을 붉히거나 화를 내면 그 또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웃자고 한 소리를 가지고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같은 더 불쾌한 언사가 이어질까 봐 눈에 띄게 반응하지 않았을 뿐이다. 반응하지 않는 것이 그런 시간을 짧게 끝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50대 이상 평범한 한국 남자들 가운데 아직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며칠 전 SNS를 뜨겁게 달군 일이 하나 있었다.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바닷가 돌조각상에 관한 글을 ‘전체공개’로 올렸다. 선정적인 묘사가 문제였다. 그는 “탐스런 인어 유방”을 손으로 “애무”하는 “복 좀 받으려고” 그 바닷가에 가끔 간다고 했다. 조각상에 “올라탄” 어린아이의 입을 빌어 “엄마 젖보다 엄청 크네”라고 말하고, 만지면 “이 느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적었다. 이 글에 대해 여러 사람이 문제 제기를 했고 글쓴이는 해당 글을 내리는 대신 다른 글을 하나 남겼다. 해명을 한다는 글에서 ‘재미있는 글’과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을 보면, 애당초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지에 대해 그는 여전히 모르는 듯했다.
그 남성의 글과 관련해 어느 여성은 “특정 연령 이상 (한국)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지적했다. 특정 연령 이상이라고 했지만 ‘50대 이상 남성들’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가 보기에, 내가 속한 50대 이상 남성 가운데 많은 이들이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대한 거부감이나 자기검열 같은 내적 장치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와 관련해 ‘할 말’ ‘못할 말’을 구별할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 전형적인 사례 하나가 최근 국민 대표기구인 국회의 공식 석상에서 또 등장했다. 6월 1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첫 회의에서 이용호 의원은 말했다. “우리 한정애 위원장님...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셔서.” 당사자는 덕담이라고 했겠으나 ‘남성 위원장님’의 외모 관련 발언을 아무도 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의 말이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이런 발언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한국의 중장년 남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면 발언 당사자 대부분은 “칭찬을 했는데 왜 그래?”라고 반문한다. 4년 전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선교 의원이 발언을 하다가 유은혜 의원을 향해 “왜 웃어요? 내가 그렇게 좋아?”라고 했다. 성희롱에 대해 사과하라는 다른 의원들의 요청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됐습니까? 그렇게 왜곡하지 마세요.” 성차별 발언을 공개적으로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런 발언이 왜 문제가 되는지도 모르고 도리어 왜곡한다고 뒤집어씌우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하고 똑같은 반응이다.
위 세 사람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여성의 외모에 대해 무신경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많은 50대 이상 남성들 사이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병든 문화이다. 물론 성인지감수성을 갖춘 이들도 있으나 그런 이들은 중장년 세대에서 소수에 속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세대는 성장기에 생물학적인 성sex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성gender에 대해서는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장 왕성한 중고교 시절에는 남자와 여자가 남중(고)/여중(고)으로 완전히 갈라져서 공부를 했다. 이성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기회가 원천 봉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성과 만나는 것을 죄악시하는 분위기에서 10대 성장기를 보냈다. 가정이든 학교든 어른에 대한 예의만 가르쳤을 뿐 사람이나 이성에 대한 매너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예의가 있는 줄도, 있어야 하는 줄도 몰랐다. 고교 생물시간에 남자 교사는 생식기관을 설명하면서 “밖에 나가서 악용하지 마라”라고 농담삼아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성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두드러졌을 뿐이다. 비단 우리 학교만의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50대 이상 남자들은 성인지감수성에 관한 한 대부분 무식하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문제가 되는 줄도 모르고 다른 성을 거리낌없이 대상화하는 데는, 그들이 나고 자란 환경 또한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장년 남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상대적으로 특권층이었다. 아들은 대학공부를 시키면서 딸은 안 시키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토에서 그들은 성장했다. 누이들이 공장에서 돈을 벌어 남자 형제들을 공부시키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런 남자들은 성sex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고, 젠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대학과 사회로 진출했다. 무지는 무시와 차별, 성적 대상화 등으로 이어졌다. 남성을 우대하는 문화 속에서 줄곧 살아왔으니 성인이 되어서도 여성을 차별하고 성적 대상화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나 죄책감 같은 것을 갖지 않았다. 남자들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어도 여자들은 취업 경쟁에서 번번이 밀렸다. 밀린 정도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대기업 공채는 여성 대졸자들에게 지원 자격조차 주지 않았다. 남자들에 대한 이런 특혜는 우월감으로 이어지게 마련. 그런 우월감이 사회에서 만난 여성 동료들 앞에서도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발언을 거리낌없이 하게끔 만들었다. 고질적인 문화였다. 한선교 의원이 “왜 웃어요?”에 “내가 그렇게 좋아?”라는 말을 무심결에 이어간 것은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 연유한다. 흉기를 휘두르면서도 그것이 흉기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흉기라고 지적해도 인정을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성인지감수성에 관해 교육 받은 바 없고, 그래서 무지몽매한 채 살아왔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국회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성 외모를 품평하고, 모든 사람이 보는 SNS 개인 미디어에서 돌조각상의 ‘탐스런 유방’을 ‘애무’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그게 마치 재미있는 묘사 방법인 양 주장하는 것은 ‘구린’ 것을 넘어 저급하고 야비한 욕설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지금 여기서, 50대 남성인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거나 화가 나는 50대 이상 남성이라면 ‘개저씨’ 소리를 들어도 억울해 하지 마시라. 뭐가 뭔지 모르겠고, 왜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있는 자리에서만이라도 외모 품평이나 성적인 농담을 입에 올리지 마시라. 그것이 개저씨 소리 듣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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