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독서 동아리를 소개합니다 ⑲
서울 ‘슬러시’
모임 장소_ 학교 도서관 또는 카페, 최근에는 ‘줌Zoom’ 이용
모임 시간_ 매주 화요일 저녁 8시 반
추천 도서_ 『사피엔스』 『선량한 차별주의자』 『죽음의 에티켓』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1984』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슬러시는 여름날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우리 독서동아리는 그때의 슬러시와 같은 존재다. ‘슬러시SLUSH’는 ‘Sociologic Library Until Searching for Hope’의 약자에서 따왔다. 동아리 이름은 사회학도로서의 거창한 목표를 표방하여 지었지만 동아리를 결성한 계기는 사소하고 개인적이었다. 2018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새내기였던 우리는 그동안 정해져 있던 학교 공부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공부를 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도 스스로 공부하기는커녕 독서조차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으리라! 동기 다섯 명과 모여 독서 소모임을 만들어 매주 한 번씩 모임을 하기 시작했다.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지음, 김영사 펴냄로 시작한 우리 독서 모임은 2018년 가을부터 2021년 1월 지금까지 『자아 연출의 사회학』어빙 고프만 지음, 현암사 펴냄, 『이갈리아의 딸들』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황금가지 펴냄,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지음, 창비 펴냄 등 사회학·인문학 도서를 중심으로 모두 스물여섯 권의 책을 읽었다. 현재는 여덟 명이 함께하고 있다.
책의 종류를 특정하지 않지만 동아리 구성원들이 사회학과 학생들이라 이와 관련된 도서의 비중이 높다. 모두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어 이 분야의 도서를 다룰 때면 토론이 치열하다. 그중에서도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와이즈베리 펴냄를 읽고 진행한 모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은 모두가 같지만, 그 속에서 정의란 무엇인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것인지. 이에 대한 의견들이 모두 달랐기에 열띠게 토론했다.
“‘능력주의’가 사회적 부를 나눌 수 있는 절대적 정의나 기준이 될 수 없다. 사회적 배경에서 벗어나는 ‘순수한 능력’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기의 발언이었는데 굉장히 인상 깊었다. 내가 지금까지 인정받고 달성한 성취들이 온전히 나의 것인지 성찰하게 되었다.
‘슬러시’는 학교 도서관, 카페, 칵테일바 등 여러 장소에서 모임을 진행했다. 코로나19 이후로 ‘줌ZOOM’을 이용해 온라인 모임을 하고 있다. 연말 파티, 놀이공원 탐방, 책 여행과 같은 즐거운 추억도 남기고 있다. 처음으로 독서동아리에서 한 여행은 파주 ‘지혜의 숲’으로 떠나는 여정이었다.
고요한 파주를 함께 산책하기도 하고 맛있는 태국 음식을 먹기도 하고 각자 독서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평소보다 들뜬 우리는 세 시간 넘게 독서 토론을 진행했다. 남은 밤은 보드게임과 수다로 보냈다. 이렇듯 많은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서로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대학 생활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다.
‘슬러시’의 첫 번째 약속은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해진 기간 내에 책을 읽지 못해도, 사소한 이유로 결석을 해도, 질타나 압박하지 않는다. 동아리 외에도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에서 ‘슬러시’마저 하나의 부담이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모임원들과 꾸준히 느리게 책을 읽어갈 수 있었다.
2년 반. ‘슬러시’에서 활동하면서 말로만 책을 읽겠다는 사람이 일주일에 한 번 책에 손을 뻗는 사람이 되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삶의 여유다. 책을 읽고 난 후, 여운에 젖어 나의 삶을 돌아보는 이 시간은 내게 굉장히 소중한 순간이다. 어느 날은 ‘슬러시’ 친구들과 읽은 책을 가지고 얼른 생각을 나누고 싶어 일주일 내내 독서동아리를 하는 화요일을 기다린 적도 있다. ‘슬러시’는 견해를 주고받는 것을 너머 새로운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나의 대학 생활에서 ‘슬러시’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슬러시’를 하기 전,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독서동아리를 하면서 언제나 틀릴 수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대해 더는 홀로 분노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같이 분노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 문제에 맞서는 멋진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시간을 공유하는 친구로서, 같은 고민을 나누는 동료로서, ‘슬러시’의 만남이 대학을 졸업해도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