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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너머 불어온 세월의 향기
독서동아리 ‘실버북토킹’
모이는 곳
서울 금천구 금천구립가산도서관
모이는 사람들
책을 사랑하는 중장년층
추천도서
·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 (제니스 캐플런 지음, 워너스북 펴냄)
· 백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지음, 덴스토리 펴냄)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펴냄)
·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림 (이소영 지음, 소울메이트 펴냄)
당신의 일주일은 언제 시작되나요? 대부분 사람은 월요일이 한 주의 출발선일 것이다. 하지만 ‘실버북토킹’은 금요일을 기준으로 한 주의 문을 활짝 열고 있다. 매주 금요일 도서관에 모여 웃음꽃을 피우는 시간, 그들은 굴곡 없이 3년째 모임을 유지 중이다.
“지영이의 삶이 나의 삶이었더라구요”, “여자의 일생이 아주 잔잔하게 흘러감을 마주했어요” 오늘은 얼마 전 다 같이 관람한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감상평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화를 자신들의 인생으로 걸러낼 때 그들의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조금 느리지만 찾아온 자료를 또박또박 말하려 애쓰는 이, 경청하며 노트에 꼼꼼히 필기하는 이… 과거의 나에게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깨달아가는 모습에는 푸근한 세월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실버, 은처럼 반짝이는 삶에 책을 더하다
어르신들의 자체적인 독서모임은 누군가에겐 의아함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능동적이고 의욕 넘치는 독서모임을 꾸준하게 유지하다 보니, 주변에서도 다른 독서동아리와는 다른 점을 느껴 관심과 지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실버북토킹’이 함께 책을 읽는 방식 또한 남다르다. 여느 독서동아리처럼 책 한 권을 선정해 기간 내 읽어와 토론하는 방식이 아니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돌아가며 발표하는 날을 정한다. 이는 시간이 촉박해서 이야기를 끝맺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날 발표를 맡은 사람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이나 회원들에게 추천하는 책을 골라와 회원들에게 소개한다. 흥미로운 점은 발표 형식 또한 자유라 각 회원의 특색에 따라 진행된다는 점이다. 책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을 중심으로 소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두 조사해 곁들여 발표하는 사람도 있다. 그 때문에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을 파악해서 발표를 준비하는데 쏟는 노고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초기에 ‘실버북토킹’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꾸린 모임이 아니었다. 도서관 지원 프로그램 중 하나였으나, 인원수가 작아 모임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때 김정미 대표가 합류하게 되면서 모임의 분위기가 활기를 띠었다. 이에 회원들이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웃과 지인을 모임에 초대하면서 회원 수가 증가했다. 회원들이 모인 사연을 듣다 보면 인연은 작은 우연이 만들어낸 기적임을 알 수 있다. 모임 내 최고령자인 권시혁 선생님은 가산구립도서관에 매일같이 신문을 보러 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서가 위층에 올라가 볼 것을 권했고, 그렇게 ‘실버북토킹’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는 “다들 열심히 책 읽으려는 모습에서 배울 점이 많다”며 결석 한번 없이 열심히 모임에 참석 중이다. 회원들은 너도나도 개근이라 외치며 모임에 대한 열의를 보였고 그 모습은 어느 청년 못지않았다.
모임에 대한 애로사항을 묻자 그들은 입 모아 “없다”고 말하며, 대표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정미 대표님은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에 강사로서 참여했으나, 지금은 ‘실버북토킹’ 대표이자 회원이다. 부드럽고 귀에 쏙쏙 박히는 진행으로 회원들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끄는 모습이 남달랐다. 간혹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나 갈피를 잡기 힘든 토론 주제도 대표님의 한마디면 순풍에 앞으로 뻗어나가는 배처럼 순탄하게 진행됐다. 그를 통해 회원들은 좋은 리더의 필요성에 대해 알게 됐다. 김정미 대표님은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한다 해도 선생님들이 살아온 인생의 시간만큼은 어디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선생님들이 저에게 굉장히 유익해요”라며 서로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기
‘실버북토킹’ 모임이 장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판단과 평가가 없다는 점이다. 모두가 서로의 경험과 삶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오래갈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다. 위로 올라가고 싶어 치열하게 애쓰는 세대와는 달리 회원들은 그런 짐을 덜어둔 상태다. 그 때문에 한 사람이 살아온 삶에 대한 수용, 받아들임에 능숙한 것이다.
대부분의 회원이 누군가 앞에서 자신이 보고 느낀 점을 발표하기가 선뜻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용기를 북돋아준 덕에 가능했다. 다른 이의 발표를 경청하고 무조건적인 지지보다 적절한 비판과 함께 생각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다. 또한 나이대별로 전하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에, 예전에 쉽게 지나치던 것들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공유한 이야기를 생활에서 실제로 실천하려는 노력도 하게 됐다. 건강에 관한 책을 이야기했을 때는 바르게 걸으려고 애쓰고 틈틈이 스트레칭했다. 이는 사소하지만 독서모임이 전달한 긍정적인 에너지임이 틀림없다.
어릴 때는 책을 서둘러 읽어 책장에 쌓이는 책을 위해 중압감 속에 독서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자리에는 조급함이 사라지고 여유가 찾아왔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는 것’, 나이가 들고 지혜라고 불리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깨달은 것이었다. 많은 양의 페이지를 읽고 버겁게 한 권을 완독하는 것보다 읽을 수 있는 만큼 천천히 여유롭게 읽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그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책을 접하려는 노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 독서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강주희(청년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