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동부독일의 여러 도시를 돌아보고 있다. 뮌헨에서 뉘른베르크로, 거기서 바이로이트를 거쳐 바이마르, 라이프치히로 이어지는 여정이다. 최종의 목표는 베를린과 드레스덴이다. 그 중에서도 뉘른베르크!
아무래도 나는 70·80년대에 자아가 형성되고 세상을 보는 감수성이 버무려진 세대다. 독일에 오면 전쟁과 그 기억, 분단과 그 후유증부터 생각하는 낡은 세대인 듯하다. 그러니까 필기구 애호가들에게 뉘른베르크 하면 파버카스텔의 도시다.
그렇기는 해도 나는 오늘의 뉘른베르크가 아니라 이 도시의 과거,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뉘른베르크를 찾는다. 아닌 게 아니라, 뉘른베르크 구도심지의 건물들은 대체로 잿빛으로 어두웠고, 자신들의 기나긴 역사를 담은 박물관으로 가는 입구에는 흰색 기둥이 도열해 있으며, 기둥마다 세계인권선언문을 29개 언어로 새겨놓았다.
이 도시는 히틀러가 자신의 야심을 독일 전역에 펼친 곳이다. 1933년 10일부터 16일까지 독일 국민 50만여명이 참가한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가 열린 도시이며, 바로 그 나치의 주요 인물들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전범재판을 받은 장소다. 히틀러는 자살하였으니, 이 도시와 종막을 같이 한 사람으로 알베르트 슈페어를 생각해본다. 그는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막대한 부와 명예를 이룬 건축가였고, 그의 아들 또한 2008 베이징 올림픽 스타디움에 참여하는 등 현재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인들의 독특한 이름 붙이기 전통에 따라 세 사람 모두 이름이 알베르트 슈페어다.
히틀러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그가 연출한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는 강렬한 빛이 수직의 힘으로 치솟는 장관이었다. 그 자신이 이를 ‘빛의 대성당’이라고 불렀다. 회고록 『기억-제3제국의 중심에서』에서 슈페어는 이렇게 썼다.
“12m 간격으로 비행장 주위에 늘어선 130대의 가늘고 긴 광선은 6000m, 8000m 상공까지 닿아 빛의 해면海面을 만들어냈다. 광선은 무한으로 뻗어나가 외벽의 열주列柱가 거대한 공간을 이루어내는 것을 느꼈다. 때때로 빛다발 가운데로 구름이 통과하면 장대한 광경에 초현실주의적 비현실감이 더해졌다.”
지금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 장소!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장은 슈페어를 통한 히틀러의 폭력적 낭만주의의 전시장이다. 오늘날 독일인들은, 두 사람의 광기 어린 열망을 생생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인 영상과 인상적인 공간 구성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당대회를 전후로 한 히틀러의 광기가 어떻게 전쟁으로 이어지고, 대량학살과 각종 전범을 낳았으며, 결국 바로 이곳 뉘른베르크에서 전범재판을 받았는지 정교하게 보여준다. 관람자들은 숨막힐 듯이 구성한 폐허와 잔해와 좁은 통로 사이를 겨우 지나간 끝에 압도적인 스케일의 대회장을 내려다보게 된다. 그런 후에 다시 비좁은 통로를 내려오면 슈페어에 관한 각종 기록을 마주하게 되고, 광기어린 벽 위로 영사되는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슈페어는 유대인 박해에 어떻게 협력하였는가?” “슈페어는 비정치적인 건축가인가?” “슈페어는 독일연방에서 어떻게 인지되고 있는가?” “가짜 슈페어들은 어떻게 폭로되었는가?” 단순하지만, 누구도 쉽게 답하기 어려운, 이른바 ‘악의 평범성’ 혹은 ‘악의 진부함’을 날카롭게 찌르는 질문들이다.
슈페어는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의 건축과에서 조교를 할 때 히틀러를 처음 보았다. 1931년 겨울의 일이다. 히틀러의 연설은 젊은 건축가의 심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26살 때 일이다. 『기억』에서 슈페어는 히틀러의 연설 모습을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덧 음성이 높아졌다. 그는 다급한 듯 말했고, 마치 최면을 거는 듯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연설 내용보다 훨씬 심오했다. 나는 그의 열정에 빨려들어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8살 때 슈페어는 히틀러의 선택을 받았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독일 지식인들의 운명을 묘사하는 오래된 문장을, 그도 썼다. “나는 나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찾았다”라고.
슈페어는 히틀러의 건축가가 되었다. 한때 화가를 꿈꿨던 히틀러는 슈페어라는 붓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미학, 즉 파괴적인 정념의 스펙터클을 보여주고자 했다. 베를린의 주요 도시를 거대하게 직립한 온갖 조각과 구조물로 채웠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및 그밖의 수많은 열병식이나 행진에서 나치의 휘장이 온갖 형태로 찬란하게, 강력하게 휘날리도록 했다. 파리를 점령한 후 수치심에 시달리는 파리 시민들을 제3제국의 상징인 거대한 독수리 조각상으로 한 번 더 짓누르고자 했다.
이미 히틀러에게 베를린올림픽 경기장을 신축하여 선물한 그는 베를린 자체를 허물고 새 도시를 짓는 일에 착수한다. 세계를 장악하고자 한 히틀러는 그 야심을 실현하기도 전에 베를린을 허물고 거대한 건축물들이 일제히 들어서는 신도시 ‘게르마니아’를 짓고자 했다. 이 모든 일을 슈페어가 주도하고 실현했다. 나치당 주임 건축가, 건축부 수장, 제국의회 의원이었던 슈페어는 1937년에 또 다른 직함, 즉 ‘제국 수도 건설 총감독관’을 갖게 된다.
뉘른베르크는 슈페어가 전당대회장과 체펠린 비행장을 건설한 곳이며, 전후에 전범재판을 받은 곳이다. 그는 전범재판에서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형을 선고 받지 않았다. 슈페어는 법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대부분 인정했고 과오를 반성했다. 패전의 불안과 광기에 사로잡힌 히틀러는 연합군에게 함락당하기 전에 수도 베를린의 도시 기반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슈페어는 이 명령을 은밀하게 거부했다. 그가 사형을 면한 이유 중 하나다.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지금 내가 스쳐지나가듯이 머물고 있는 뉘른베르크에 대하여 슈페어는 『기억』의 서문에 이렇게 쓴다.
“뉘른베르크에서 나는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역사를 정리하는 데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죄의 대가는 치르도록 했다. 비록 역사적 무게에 비해 형량은 미미했다 하더라도, 시민으로서의 내 존재에 종말을 고하기에는 충분했다. 뉘른베르크는 나의 삶을 파괴했고, 선고한 형량을 넘어 아직도 나를 벌하고 있다.”
슈페어는 감옥 안에서 자신의 기억 및 수집 가능한 자료들을 나름대로 망라하여 출옥 후 자서전 『기억』를 냈다. 이 책은 냉정하게 읽어야 한다. 일각의 비판처럼 ‘길게 쓴 변명’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호에 언급한 소설가 귄터 그라스는 문제의 자서전 발간 이전부터, 자신이 어렸을 때 나치가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믿었고 뉘른베르크 재판이 벌어지기 전에는 나치가 저지른 범죄를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 ‘완전히 눈이 먼 나치’였다고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소년이었고 세상을 잘 몰랐다. 그러나 슈페어는 다르다. 숱한 전쟁범죄의 기획자이자 수행자이자 책임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의 서문에 쓴 슈페어의 다음 문장은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작업 내내 과거를 왜곡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시절에 화려함이나 잔혹함을 치장하지 않으려고 무엇보다 애썼다. 당시의 동지들이 나를 비난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진실하기 위해 노력했을 따름이니.”
★ 이 글은 2017년 8월 29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