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나라 프랑스, 예술의 도시 파리! 이렇게들 말하지만, 동시에 그 나라와 도시는 제국의 심장이었고 혁명의 피가 흘러넘친 곳이었다. 이 예술의 나라의 수많은 미술품들 또한 혁명과 반혁명, 급격한 도시 변화와 신경증이 뒤엉켜 있는 작품들이다.
프랑스의 근대화 과정, 곧 정치혁명과 산업혁명의 이중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크게 발달한 사회사상으로 흔히 ‘톨레랑스’tolerance를 꼽는다.
‘감수한다’, ‘지탱한다’는 의미의 라틴어 ‘tolerare’에서 유래한 것으로, 흔히 ‘관용’으로 번역된다. 이 번역어는 너그러운 마음이나 자선행위 같은 느낌, 즉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베푸는 듯한 느낌을 많이 주기 때문에 요즘은 번역하기보다 그냥 ‘톨레랑스’라고 한다. ‘텔레비전’이나 ‘오리엔탈리즘’을 억지로 번역하기보다는 그냥 쓰는 게 일상 소통이나 학문적 소통이 쉽고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톨레랑스는 정서적으로 뭔가를 베풀어주는 미덕이 아니라,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사상적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적극적인 사회행위를 뜻한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말의 역사적 근원지는 프랑스지만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이 의미있는 작용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홍세화의 저작과 활동 덕분이다. 홍세화는 자신의 저서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 개정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한다. 사실이다. 내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세상이 바뀐 덕이다. 그러나 그 변화란 불평등과 억압, 배제의 형태만 바뀐 것, 다시 말해 그것들이 노골적이었던 데서 은밀하게, 그러나 구조적으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희망과 기대, 그리고 의지와 동력은 오히려 약해진 게 아닐까? 이처럼 ‘달라졌으면서 달라진 게 없는’ 세상이라서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 즉 차이를 차별, 억압, 배제의 근거로 삼지 말라는 ‘톨레랑스’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은 1995년에 초판이 나왔고 방금 소개한 서문이 실린 개정판은 2006년도에 나왔다. 초판이 나온 지 9년 만에 홍세화는 ‘세상이 달라졌다고들 한다’고 차분하게 냉소했지만, 개정판이 나오고 나서 12년이 흐른 2018년 현재, 그의 비관대로 세상이 달라졌다기보다는 더 험해졌다. 개정판 서문에서 홍세화는 1995년 무렵의 노골적인 불평등과 억압과 배제의 형태가 은밀한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했는데, 아예 2018년 지금은 다시 노골적으로, 집단적으로, 과감하게 횡행하고 있다. 온갖 형태의 혐오와 차별이 구조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러니까 노골적이면서 은밀하게, 은밀한 듯하면서도 노골적으로 곳곳에서 벌어진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노동자는 구속당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정서적인 것과 동시에 법률적으로도 구속할 만한 조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6년 개정판 서문의 ‘톨레랑스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지금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 문단의 끝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그것톨레랑스은 앞으로도 긴 세월 동안 계속 유효할 것이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면, 우리의 긴급한 필요에 의하여 이 나라의 주된 정서 중 하나, 즉 톨레랑스를 공수하여 여러 모로 중요하게 활용하였으나, 실은 이 나라의 주도적인 이념은 톨레랑스가 아니라 ‘라이시테’laicite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이었고, 그 이후 반혁명과 왕정복고 등의 와중에서 거듭 시민혁명을 추구하여 공화정을 수립해 나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국가 이념으로 작용했다. 일반적으로는 세속주의나 정교분리 사상으로 이해되는데, 현실에서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톨레랑스를 ‘관용’으로 옮기지 않듯이 이 라이시테도 세속주의 같은 말로 옮기기 어렵다.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되 종교에 대한 어떠한 특별한 협조나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는 혁명의 시대에 왕정 복고를 차단하는 이념이 되었고 그 이후 시대에 프랑스의 공화주의와 시민생활을 지탱하는 기준이 되었다. 프랑스 헌법 가장 첫 머리에 ‘종교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 공화국’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종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이것이 선출 공직자와 공무원들에게 하나의 이념으로 요구되거나 그것을 표출해서는 결코 안 된다. 공공장소에서 가톨릭을 포함하여 모든 종교단체나 종교인이 공공연한 선교를 하거나 해당 종교의 상징물을 개인적 소지품 이상으로 크게 전시하는 것 등은 금지된다. 기독교의 대형 십자가, 유대교의 다윗의 별, 그리고 성탄절의 말구유 장식 등도 다중 공간에 전시되거나 장식되는 게 금지되어 있다. 히잡이나 부르카에 대한 단속도 최소한 이런 흐름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 라이시테는 부분적인 내용과 적용의 차이는 있지만, 프랑스를 포함한 서구 전역의 근대 국민국가의 초석이 되었다. 그런데 이 근대 국민국가는 ‘부르주아 남성’이 주도한다. 따라서 이 범주와 이념형 안에 포함되지 않는 ‘수많은 소수자’를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라이시테는 공화국의 이념이며 그 공화국은 애국주의로 건설되는데 여기서 ‘애국’은 남성들의 격전과 전쟁으로 결합한다. ‘수많은 소수자’는 동원되거나 배제된다.
그런 상황의 여파로 21세기 들어 프랑스 전역에서, 특히 파리에서, 그 중에서도 파리 북쪽의 ‘방리유’도시 외곽지대인 생 드니 지역 일대에서 라이시테는 흔들리게 된다. 수많은 노동자들, 빈민층들, 이주자들, 비기독교 사람들이 모여 사는 생 드니의 방리유에 라이시테는 공화국의 보전을 위하여 때로 ‘노골적인’ 억압과 ‘은밀한’ 차별의 정념이 된다. 특히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옛 프랑스 식민지와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같은 서아프리카 출신자들에게 이 지역은 공격적인 차별과 수세적인 배제의 ‘게토’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2005년이나 2015년에 큰 ‘폭동’이 일어났다. 라이시테와 톨레랑스가 충돌하는 순간이다.
이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해 온 에티엔 발리바르가 총괄적인 글을 쓰고, 프랑스의 사회 상황을 방리유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해온 국내 학자들의 글이 총집된 <공존의 기술>은 이 충돌의 원인과 여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책이다. 2005년 10월 27일부터 11월 18일까지 프랑스 전역 274개 방리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방리유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안산이나 구로지역을 이해하고 서울과 한반도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풍등을 날린 스리랑카 노동자는 법률적 판단과 연민의 호소에 의하여 구속은 면했다. 그것은 그것대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세화가 걱정했던 노골적인 차별과 은밀한 배제는 더욱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라, 양창렬 등이 함께 쓴 이 책의 ‘서문’을 읽어보자.
“‘방리유’는 대도시 주변의 신도시가 아니라 형식적으로는 포함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배제되어 있는 모든 불안정한 존재들이 거주하는 바로 그곳에 있다. 그렇기에 방리유 소요를 과거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으로 치부하거나 한국에 프랑스식의 방리유가 있느냐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책에서 드러내고자 한 ‘포함과 배제의 동학’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헤아리고, 그 어디에도 정확히 위치지을 수 없는 그 배제된 자들이 ‘도처에서’ 일어설 수 있음을, 아니 이미 일어서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2018년 10월 15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