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 |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인류사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 거작은 신학, 경제학, 역사학, 문헌학, 철학, 윤리학, 미학, 음악 등을 총망라하여 유럽의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과 그 정신세계를 분석하였다.
밤의 하이델베르크는 그제야 하이델베르크다웠다. 글쎄, 이 말조차 서푼어치 감상자가 ‘상상한 하이델베르크’이겠지만, 어쨌거나 뜨거운 여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관광 시즌이기에 하이델베르크 곳곳이 사람으로 넘쳐났고 나 역시 그 인파에 섞여 칼 테오도르 다리를 혼잡하게 만들고 산정까지 올라가는 산악철도의 대기시간을 한참이나 늘렸으며 고즈넉한 고성을 테마파크인 듯 돌아다녔다. ‘관광객tourist’이란 구경꾼sightseeing이기에 나는 다국적의 인파에 섞여 하이델베르크를 구경하느라 저녁에는 지치고 말았다.
저녁이라고는 해도 서머타임에 약하나마 백야 현상이 있어 밤 9시가 넘어서야 하우프트 거리가 어둑해졌다. 백야 현상은 위도 약 48도 이상에서 한여름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현상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위도는 정확히 49.24도로 사실상 그 도시로부터 백야가 시작된다고 봐도 된다.
낮에, 그리고 저녁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백야에, 두 번이나 칼 테오도르 다리를 건너 고성 맞은편의 ‘철학자의 길’을 올라가보고, 닫힌 문틈으로 3층짜리 고풍스런 저택을 훔쳐본 것은 오로지 막스 베버 때문이었다. 진부하긴 해도 이 오랜 대학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막스 베버의 그림자를 잠깐이라도 밟아보는 것은 마흔 중반이 넘어서야 더듬더듬 사회학을 전공하였으나 그 심원한 학문의 ‘가갸거겨’조차 떼지 못한 나로서는 각별한 일이었다. 이 도시의 산상묘지에 그의 무덤이 있고 그 묘비명에는 ‘Wir finden nimmer seines Gleichens’라고 쓰여 있다. 이를 이홍균은 ‘우리는 그에 필적할 만한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옮겼고, 김덕영은 ‘그만큼 큰 그릇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옮겼다.
관광객이 저마다의 숙소나 맥주집을 찾아 기어들어간 다음에, 나는 다시 하우프트 거리를 걷다가 하이델베르크대학 도서관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다리쉼을 하느라 광장 한편에 앉아 있다가, 하아 그런대로 아름다운 풍경이구나, 생각하다가 그만 숙소로 돌아왔다. 남의 나라, 남의 대학 앞에서 너무 오랫동안 감상에 젖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무려 신성로마제국962~1806 시기까지 그 뿌리가 이어지는 이 대학은 정확히 1385년에 교황 우르반 6세의 승인을 받아 선제후 루프레히트 1세가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1556년 오트 하인리히 선제후의 종교개혁에 따라 신교 대학으로 전환하여 신구교 갈등에 따른 30년 전쟁으로 폐쇄와 개교를 반복하다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참혹한 전쟁이 마무리된 후인 1652년에 다시 개교했다. 그 후로도 왕위계승전쟁, 보불전쟁, 히틀러 전쟁 시기에 이 대학은 대학다운 대학으로, 깊은 상처와 탄압을 받았다.
그러는 중에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인 저마다의 이름이 학문과 지성의 별자리가 되는 학자들이 이 대학에 주좌했고, 그 중 사회과학 분야에 한정한다면 역시 막스 베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베를린대학으로 가서 박사학위를 받은 베버는 1894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취임하였다가 1896년에 모교의 경제학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심각한 질환에 시달리게 되어 지속적인 강의와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자 병 치료와 요양을 전전한 끝에 1903년, 스스로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하이델베르크 전경. 칼 테오도르 다리 건너편에서 오른쪽으로 여섯 번째 있는 흰색 3층 건물이 베버 하우스(빨간 원 안). |
공식적으로 대학을 떠나게 되었지만 도시를 떠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간이나마 건강이 호전되었고 이로부터 그야말로 ‘황금시대’가 개막하게 된다. 유유히 흐르는 네카어강을 가로지르는 칼 테오도르 다리, 그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유서 깊은 하이델베르크대학과 가히 자웅을 겨룰 만한 공부 모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는데, 흔히 ‘베버 서클’이라고 한다. 정치, 사회, 예술, 문학, 자연과학 등 전 분야의 전문가들이 베버의 집을 찾아왔다. 소수의 엘리트 지식인들이 폐쇄적으로 모임을 가졌던 슈테판 게오르게 서클에 비하여 이 베버 서클은 참여자들의 다채로운 출신 배경과 성향, 극단적 관점의 거침없는 논박, 광범위한 사상의 스펙트럼으로 인하여 ‘작은 노아의 방주김덕영의 표현가 되었다. 막스 베버 하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또 하나의 대학이었다.
1904년, 베버는 베르너 좀바르트와 함께 학술지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을 책임편집하게 되면서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 『세계 종교의 경제윤리 문제』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인류사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 거작은 신학, 경제학, 역사학, 문헌학, 철학, 윤리학, 미학, 음악 등을 총망라하여 유럽의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과 그 정신세계를 분석하였다. 단지 병렬적인 나열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학문적 자료가 낱낱의 세계가 되어 철두철미한 논문으로 묘파되어 어떻게 자본주의의 발달의 핵심 요소가 되는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와 ‘자본의 규칙적인 투자’가 유럽에서 가능했는가가 밝혀진다. 내 개인의 관심사인 중세 놀이문화와 근대 스포츠의 이행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베버가 곳곳에서 구사하고 있는 청교도 금욕주의와 사회 합리화 명제는 유효했다.
베버는 두 개의 중요한 논문으로 구성된 이 거작 앞에 ‘종교사회학 논총 서문’을 실었는데 이른바 자본주의 하면 떠올리게 되는 충동적인 이윤 추구 욕망 “자체는 자본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우선 밝힌다. 베버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개념 규정은 이미 육아실에서 배우는 문화사 수준에서 영원히 불식되어야 할 것”이라고 쓰면서 “무제한적으로 영리를 탐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러한 비합리적 충동의 억제,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이라고 썼다.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경영을 통한 이윤 추구인데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베버는 서문에서 강조하였다.
이 책에 대한 이견과 반론들 또한 이 책만큼이나 견고하다. 당대의 작업으로는 R. H. 토니의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이 대표적이다. 토니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자본주의 발전은 베버가 주장한 것처럼 ‘신교 국가’라는 강한 특징 때문이 아니라 사회 전면에 걸쳐 진행된 경제혁명의 결과라고 말한다.
한참이나 후속 세대에 속하는 작업 중에서는 콜린 캠벨의 『낭만주의 윤리와 근대 소비주의 정신』이 대표적이다. 캠벨은 당연히 베버의 거작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 서문에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간의 관계의 성격과 관련한 베버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운동의 합리적인 금욕적 측면과 감상적인 경건주의적 측면 모두가 근대 경제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한편으로는 금욕적인 청교도이지만 동시에 낭만주의 정념에 휩싸여 인류사상 최초의 엄청난 소비를 행사한, 그 동전의 양면을 캠벨은 추적했다. 그것이 “학자로서의 베버에 대해 경의를 표시하는 동시에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을 보완”하는 길이라고 캠벨 또한 서문에 썼다.
★ 이 글은 2018년 8월 27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