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영이 소망한 바와 같이 너스바움도 ‘서문’에서 분명하게 다른 사회를 갈망한다. “자신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인간성을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는 사회다.”
모처럼 좋은 책, 귀한 책,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돌아볼 수 있을 만한 책을 읽었다.
‘1급 지체장애인으로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 과정을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로스쿨로 진학하여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는 김원영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다. 나는 방금 저자의 약력을 쓰면서 일부러 따옴표를 달았는데, 왜 그런가 하면, 장애인이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했다는 우리 사회의 익숙한 시선을 비판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다.
물론 당연히 저자 김원영은 이 ‘성공신화’를 거부한다. 이러한 시선은 자주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뒤집어진 거울이 된다. 열심히 공부하여 어엿하게 사회에 진출한 장애인, 그리고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부모와 기꺼이 도움을 준 친구들. 개인적 차원에서 이러한 상황과 관계들은 너무나 아름답고 진실로 감동적이지만, 그것이 사회적 차원에서 평면적으로 구성될 경우 편견을 가리는 가면이 되고 차별을 은폐하는 차단막이 되기 쉽다.
김원영은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야한’ 장애인, ‘나쁜’ 장애인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이 역시 이중삼중의 겹들이 쳐져 있는 표현들인데, 한마디로 하자면 존재 그 자체로 인정되고 서로 존중되는 삶에 대한 갈망이 이 책의 핵심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갈망의 윤리적 원천은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는 칸트다.
이를 학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김원영은 어빙 고프먼의 ‘상호작용 의례’ 이론을 원용하여 ‘품격의 퍼포먼스’와 ‘존엄의 퍼포먼스’로 설명한다. 우리의 사회적 활동과 행위는 배우가 무대에 오른 것과 같은 일종의 ‘일상 속의 퍼포먼스’가 되는데,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그 퍼포먼스는 ‘품격 대 존엄’으로 대별된다.
품격의 퍼포먼스는 권력자를 위한 의전이나 장애인을 동원하는 정치행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행위자의 사회적 품격을 연출하거나 강화하기 위한 행동들이다. 선거철마다 복지시설을 찾거나 재래시장을 찾는 퍼포먼스가 그러하거니와 기실 이런 행위는 정치인만이 아니라 우리도 일상에서, 자신의 품격을 위해, 타자를 도구로 삼는 경우로 쉽게 행한다. 반면 존엄의 포퍼먼스는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는, 그러나 그 대하는 행위 자체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심지어는 무신경하게 배려하는 행동이다.
김원영의 표현에 따르면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만 아이가 없는 대학 동기 앞에서 육아가 화제가 되었을 때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친구, 시한부 선고를 받은 가족 앞에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들, 카페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소음을 내는 자폐 아동에게 무관심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책으로 눈길을 돌리는 대학생” 등이 존엄의 퍼포먼스가 된다. 그리하여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고 김원영은 말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단계에서 그 차별에 ‘저항’하는 단계로의 이행 그리고 ‘존재 그 자체로서 아름답고 존귀함’을 증명하고 획득하는 단계로 말이다. 탄탄한 이론적 근거와 풍부한 현실의 사례를 특유의 유머와 통찰로 써나가면서, 김원영은 “몸을 욕망해야 한다. 종교나 도덕, 정치가 뭐라고 하든 너의 ‘신체’와 함께하고 싶다는 선언이야말로 타인을 향한 욕망이고, 곧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존재 그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에 대한 이 갈망이 한 뼘이라도 실현된다면 그것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방식으로 차별받고 실격당한 모든 비장애인들에게도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함께 읽을 만한 책이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의 수치심』이다. 이 두꺼운 책의 맨 앞에 월트 휘트먼의 시가 실려 있다. 필경 노련한 대학자의 선택이므로 무슨 까닭이 있어 제시했겠지, 하면서도 당장은 그 뜻이 분명치 않아 일단 본문으로 넘어갔는데, 너스바움이 제시한 휘트먼의 시 「나는 몸의 흥분을 노래한다」는 다음과 같다.
오, 나의 몸이여! 나는 다른 남성과 여성에게서 너와 같은 것을, 너의 일부와도 같은 것을 지우지 못한다. 나는 너와 같은 것이 영혼과 같은 것과 부침을 같이한다고(그리고 그것이 영혼이라고) 믿는다.
나는 너와 같은 것이 나의 시와 부침을 같이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나의 시라고 믿는다.
너스바움의 이 책은, 두껍고 어렵다. 그래서 김원영의 책보다 더 중요하다는 식의 얘기는 아니다. 두 책 모두 중요하다. 김원영의 책이 더 격렬하고 우리의 현실에서 요긴한 무기다. 다만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은 학술서이기 때문에 일정한 지식을 전제로 할 때보다 잘 읽힌다는 것이다.
너스바움은 인간의 ‘감정’이 개인의 마음의 문제 정도로 축소될 게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 그것도 신념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질서이자 규범의 성격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논리적 분석과 공적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단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 또는 그와 같은 시선만은 충분히 논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감정은 타자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취약한 존재라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혐오’가 배제의 화살이 되고 ‘수치심’이 차별의 낙인이 되어 증오범죄까지 서슴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뜨겁게 부상하고 있는 최근의 사태들에 대해 너스바움의 책은 그 행위의 근거, 마음의 상태, 감정의 교착, 불안과 공포의 근원을 파헤친다.
김원영이 소망한 바와 같이 너스바움도 ‘서문’에서 분명하게 다른 사회를 갈망한다. “자신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인간성을 감추거나 회피하지 않는 사회다. 또한 자신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전능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공적·사적 측면에서 인간의 많은 불행을 초래해 왔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과도하게 추구하지 않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사회다.”
그러니까 인류는 어쩌면 모형으로 세운 완벽한 인간성,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이상사회를 전제하고서 이에 결핍된 자, 어떤 ‘정상성’에 부합하지 않거나 그 무슨 ‘표준’에 어울리지 않는 자를 선별하고 낙인찍고 추방하고자 했으니 김원영의 표현대로 이러한 ‘실격’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너스바움도 ‘서문’에서 제기하는 것이다.
‘전능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많은 불행을 초래’했다고 보는 너스바움이 왜 책의 맨 앞에 휘트먼의 시를 제시했는지, 이제 알겠다. 앞서 인용했듯이, 휘트먼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너와 같은 것이 영혼과 같은 것과 부침을 같이’ 하며 ‘너와 같은 것이 나의 시와 부침을 같이’ 하는 세계 말이다.
★ 이 글은 2018년 8월 13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