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책’이 있다. 적당히 따스한 온기를 지닌 책들 말고 진짜 뜨거운 책들 말이다. 뜨거운 책! 그것은 반드시 엊그제 출간된 책을 뜻하지 않는다. 엊그제 출간된, 방금 서점에 등장한, 따끈한 책이라고 하지만, 표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그 온기가 싱겁게 사라져버리는 책들이 어디 한둘인가? 새롭고 날카로운 뜨거운 시선은 찾아볼 길 없고, 그저 새로 나왔다는 이유로 잠시 따스할 뿐인 책들, 내가 지금 말하는 ‘뜨거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정녕 뜨거운 책은 최소한 한 세대를 견뎌낸 책들이다. ‘동시대성’을 확보한 책들, 그것들이 일차적으로 뜨거운 책들이다. 이를테면 황지우의 시집이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금 더 소급하면 김수영의 시 전집과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이런 책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한 세대를 견뎌냈다. 물론 더 뜨거운 책들은 한 세기를 이겨내고, 한 역사적 주기를 초월해버린 책들이다. 이 목록을 열거하자면, 이 귀한 지면을 다 써도 부족하다. 셰익스피어, 신영복,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최인훈, 도스토옙스키, 리영희, 콘래드,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이들의 책은 출판 국가나 그 형태를 막론하고 제목부터 뜨겁다. 실물을 보지 않고도 그 온기, 아니 열기를 느낀다. 법칙! 그렇다. 그 뜨거운 책들에는 최소한 근대 이후 인류의 어떤 법칙이 담겨 있다. 근원적인 법칙, 어떠한 시공간에도 일단 적용할 수 있는 규칙, 어떤 문자로도 번역과 적용이 가능한 사유의 문법들!
그런 책들은 저자 이름도 시퍼렇게 달궈진 쇳물처럼 뜨겁고, 그 제목은 방금 화인처럼 찍은 듯 뜨겁고, 그 내용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열렬한 문자들의 행렬로 뜨겁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서문들이 뜨겁다. 뜨거운 서문!
인문학의 전성시대, 아니 그 이상의 용어가 필요할 정도로 가히 인문학의 홍수가 되는 시대다. 곳곳에서 인문학 강의가 열리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서점에 가면 웬만한 책들은 대부분 ‘인문학’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인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학문들뿐만 아니라 적어도 십진분류표 상으로는 인문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분야들, 실용서들, 처세술도 인문학이라는 수식을 달고 있다.
좋은 일이다. 부분적으로 일시적인 트렌드이고 상업적인 노림수도 있지만 냉소적으로 보고 싶지는 않다. 까짓 「알쓸신잡」이라고 해서 해악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본질적으로는 ‘인문학의 위기’ 시대라고 해도, 현상적으로는 인문학 강의와 관련 저서와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다른 지점에서, 다른 힘으로 이 ‘위기’를 돌파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형국에서 그나마 이렇게라도 인문학의 분위기나 트렌드가 식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와 동시에 ‘책을 읽자’는 분위기도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질문은 잠시 유예하자. 책은 공기와도 같아서 기본적으로 어떤 책이든 생활세계 곳곳에 펼쳐져 있어야 하고, 사람들은 그 중 아무 것이라도 펼쳐 읽는 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런데 어떤 책을? 어떻게? 다시 이 질문을 한다면, 아무래도 ‘뜨거운 책’이 아니겠는가. 뜨거운 책을 읽자! 동시에 질문이 이어진다. 대개의 뜨거운 책들은 두껍거나 어렵다. 일단 심오한 마음의 명령에 의하여 책을 펼쳤으되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수가 있다.
이럴 때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서문이라도 읽어보자. 서문을 읽는 즐거움! 그것이야말로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이다. 서문은 책의 윤곽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풍경화이며, 저자의 단호한 의지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첩경이다. 대체로 서문은 저자들이 본문을 다 쓴 후 최종적으로 쓰게 마련이다. 서문을 통하여 더러는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하고, 또 자신의 저작이 지닌 한계도 표현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왜 불면의 밤을 보내며 이 책을 쓰고야 말았는가, 하는 의지를 직접적이고도 분명하게 저자는 밝힌다.
게다가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서문은 대체로 짧다. 저자가 어금니를 꽉 물고 최소한의 문자로 자기 책의 세계를 압축하여 묘사하고, 동시에 본문에는 쓸 수 없는 저자 자신의 내면 풍경까지 거침없이 내보이게 마련이니, 서문을 읽는 것이야말로 본문만큼이나, 때로는 본문 이상으로 독서의 의미를 확인하고 사유의 단초를 밝히는 지름길이 된다.
아마도 서문의 중요함에 대하여 가장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인상을 준 것은 알베르 카뮈일 것이다. 독서가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문장이겠으나, 이 연재의 시작을 위하여 다시 기억하건대, 알제리 출신의 명민하였으나 가난하였고 병약한 스무 살 청년 카뮈는 어느 날 서점에서 장 그르니에의 『섬』을 펼쳐본 기억을 다음과 같은 문학적 선언으로 묘사한다.
“알제리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뮈의 헌사!
“나는 지금도 그 독자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펼쳐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나는 그날의 저녁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독자들이여! 누구라도 이런 기억 한 줌 없다고 하겠는가. 우린 모두 어렸을 때 눈 맑은 문학 소년들이었고, 식욕보다 더 왕성하게 보이는 책들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지 않았는가. 그때 우리의 식욕을 가득 채운 글들은 대체로 ‘서문’ 아니었는가. 서문에 감전되어 전율하고, 서문에 충격을 받아 단번에 본문으로 직행하고, 서문에 위로를 받아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던 순정한 시간들! 누구라도 있을 것이다.
이제 새로 시작하는 이 연재의 의미는 바로 순정한 상태의 경이로운 회복을 위한 것이다. 뜻대로 된다면 우리는 서점이나 서가의 책들을 다시 꺼내 읽을 것이며, 최소한 서문이라도 제대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면서 우리 마음 깊숙한 곳의 감각과 정서를 되살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꽤나 뜨거운 온도로 달궈진 책들을 이윽고 다 읽게 된다면, 그러니까 인류사의 규칙과 문법을 획정한 뜨거운 책들이나 지금 이 시대의 온갖 문제를 제대로 판단해내는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책들을 다 읽게 된다면, 그것은 필경 ‘서문’을 제대로 관통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나는 니체의 뜨거운 책 『이 사람을 보라』를 첫 번째로 선택하였다. 서문을 읽는 즐거움과 그 가치에 대하여 쓰느라 벌써 이 지면이 꽉 채워지고 있어서, 뜨거운 책들 중의 진실로 뜨거운 책이 되는 이 책의 서문에 대해서는 다음 회로 계속 이어질 것인 바, 내가 그동안 읽은 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의 서문만큼 뜨거운 예는 달리 없다고 할 것이다. 지적 자서전이 되는 이 책의 서문을 니체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조만간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어려운 요구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기에 내가 누구인지 밝혀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니체 스스로 밝혔듯이 그의 사상과 저작들은 ‘높은 곳의 공기이며 강렬한 공기’가 서려 있는데, 그 중에서 니체는 이 서문에서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언급하면서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고 쓴다.
어떠한가. 이처럼 도도하면서도 장중한 서문이 또 어디 있는가. 당장 본문을 읽고 싶지 아니한가. 그러나 서문을 읽자. 서문이라도 읽어보자! 우리는 곧장 뜨거운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2017년 7월 25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