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첫 몇 장은 읽기가 대단히 힘들다.” 그러면서도 격려한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절정에 도달할 수 있다.”
서양의 근대 음악,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음악으로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 오래 강의를 해왔다. 하다 보면 여러 질문을 받게 되는데,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질문이 있으니 “선생님은 서양 음악 말고 우리 음악은 안 들으세요?”이다.
위 질문에서 ‘우리 음악’이라는 뜻은 무엇일까? 흔한 말로, 그 내포와 외연은 무엇일까? 대중음악? 트로트나 발라드나 요즘 젊은 친구들의 힙합? 그런데 아무래도 전통 국악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판소리나 정악이나 민요 말이다.
이제 답을 하자면, 당연히 다 듣는다. 공부 삼아 듣기도 하고 진심으로 몰입하여 듣기도 한다. 연구적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감상의 차원에서 음악에 우열이 어디 있으며 그 위계서열의 경계가 어디 있는가? 오로지 공기를 일렁거려 몸으로 스며드는 광휘로운 음의 순간으로 말하자면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국악이든 아무런 경계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듣는다. 애청하고 필청한다.
문제는 ‘우리 음악’이라는 표현이다. 일상적인 뜻에서 서양 고전 음악에 대비하여 우리의 고전 음악, 즉 국악을 의미한 것이겠지만, 그러나 연구의 차원에서나 감상의 차원에서나 ‘우리 음악’에는 바흐도 있고 베토벤도 있고 밥 딜런도 있고 비틀즈도 있다.
아니, 그것은 서양의 클래식이요, 바다 건너의 팝 음악 아니오? 이렇게 묻는다면, 근세 이래 수많은 서양의 학문들, 서적들, 문화들이 바다 건너왔는데 그 중 어떤 것은 건너오자마자 폐기되고 어떤 것은 도서관이며 연구실의 전문가들에게 수용되고 또 수많은 것들은 거의 한 세기 이상 일상인의 삶의 뿌리에까지 흡착되었는데, 그것의 본적과 원적만 따져서 ‘우리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오히려 시대착오적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런 뜻에서 저 1970년대의 문학비평가인 김현이 ‘불문학은 프랑스 문학이 아니라 한국 문학’이라고 하였고, 같은 맥락에서 역시 비평가 김우창이 ‘영문학은 영어로 쓰여진 한국 문학’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비평가 백낙청이 ‘이이제이’ 즉 서양의 학문을 통하여 압도적으로 세계를 틀어쥐고 있는 서양의 근대를 해부하며 ‘타산지석’ 즉 서양의 학문을 통하여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불가피한 근대의 모순을 헤아려 극복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지렛대 삼아 결론을 말한다면 영문학이 영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 문학이듯 바흐나 베토벤도 비록 그 본적지가 북유럽 어디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에게 수용되어 우리의 문화로 흡착되어 우리의 어떤 문화적 일상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니 ‘서양 음악’이 아니라 ‘우리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학제적·분류적 관점에서는 달리 구분되지만 말이다.
지난주에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자본론』에 대해 쓰려다가, 그 번역자인 김수행 교수의 필적을 따라 가다보니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쓰고 말았다. 다시 유턴하여 『자본론』이다.
마르크스는 일제강점기 이후 분단체제 과정에서 숱한 오해와 저주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 물론 그 반대의 열광도 있지만 말이다. 그 대표적인 주장이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무신론자였고 이른바 과학적 유물론자였기 때문에 종교에 대하여 비판적이었지만, 한국의 종교인들이 읽지도 않고 사탄마귀 취급해도 좋을 정도로 종교를 덮어놓고 무시하면서 ‘아편’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종교적 고난은 현실적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난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무슨 뜻일까. 『마르크스 평전』에서 프랜시스 윈은 종교가 사악한 통치자들이 대중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 투약하는 마약이라고 표현한 게 아니라고 주석한다.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스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종교가 드리워주는 거룩한 위안의 의미를 깊이 새겼던 사람이다. 프랜시스 윈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국가가 그들의 눈물과 탄원을 들어주지 않는 상항에서 국가보다 더 큰 권위자인 신에게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것이 현실의 구체적인 변화와 개혁을 주지는 못한다. 아편처럼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준다. 게다가 아편은 오늘날에는 일상생활에서는 완전 금지된 위험한 약물이지만 마르크스 시절에는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통제였다. 이런 맥락의 이해 없이 달랑 하나의 문장만 가지고 마르크스의 종교관을 판단해버리면, 마르크스는 너무 수준 낮은 무신론자가 된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에 태어났고 1883년 3월 14일에 사망했다. 1841년에 자연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그가 발표한 저서와 논문과 선언문은 그 순간 이후부터 오늘에까지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화, 교육 등 전 분야의 접두사가 되었다.
그는 1860년에 『자본론』을 썼고 그해에 1권이 출간되었으며 나머지는 엥겔스가 마르크스 사후에 정리하여 출간했다. 그러는 중에 엥겔스, 리프크네히트, 프라일리그라트 등이 경제적인 후원을 하였으나 자식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고통도 겪었다. 그는 1883년 3월 14일, 자신의 서재에 있는 팔걸이 의자에 앉아서 잠에 들었다가 그대로 숨졌다. 이 마지막 몇 해에 관하여 그의 사위이자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쓴 폴 라파르그의 기록을 보면, 마르크스는 잠 자는 시간을 빼고는 오로지 희미한 불빛을 따라 미몽의 동굴을 빠져나가려는 필사적인 사상의 모험가였다.
마르크스는 딸들과 함께 즉흥적인 질문에 즉각적으로 답하는 고백놀이, 그러니까 요즘 젊은 친구들의 ‘진실 게임’ 같은 놀이를 즐겼다. 프랜시스 윈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딸이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 또 당신의 좌우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모든 것은 의심해보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가 다른 저서에 단호하게 표현한대로, 그의 수많은 저서와 논문과 선언문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사상적 행로의 대업이 『자본론』이다. 물론 어렵다. 특히 제1장 ‘상품’이 어렵다. 읽다 포기하기를 몇 번이던가. 김수행 교수의 동영상 강의까지 들어도 매한가지다. 마르크스도 1872년에 쓴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직접 그렇게 썼다. “첫 몇 장은 읽기가 대단히 힘들다.” 그러면서도 격려한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절정에 도달할 수 있다.” 하아, 이렇게 옮겨적고 보니, 더 어렵다.
그런데 왜 맨앞에 ‘우리 음악’ 같은 소릴 한 거지? 이렇게 묻는 독자가 있겠다 싶어 마무리한다. 이 뜨거운 책의 번역자 김수행은 2001년에 쓴 번역자 ‘서문’에서 “『자본론』을 번역한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불만인 것은 마르크스는 천지를 진동시킬 이론을 발견하는 데 일생을 보냈는데, 나는 왜 마르크스의 책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데 일생을 보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깊은 한숨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박래품舶來品·주로 서양에서 배에 실려 들어온 신식 물품의 전달 기능은 아니었다. 그 번역 자체가 ‘우리 학문’의 새로운 길이었고, 그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문이든 사회적 실천이든 “오직 피로를 두려워 하지 않고”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올라갈 수 있었다.
★ 이 글은 2018년 6월 11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