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때마다 비운의 선수로 콜롬비아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선수가 자주 거론된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콜롬비아는 약체로 꼽히던 개최국 미국에 1:2로 졌는데 그만 에스코바르가 자책골을 넣은 것이다. A조 최하위로 귀국길에 오른 콜롬비아 국가대표팀은 숱한 비난에 시달렸고, 특히 남미 최대 마약조직의 하나인 메데인 카르텔이 선수단에 협박까지 했다.
결국 비극이 발생했다. 에스코바르는 여자친구와 술집에 갔다가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 사건 이후에 국내에서는 남미 사람들과 콜롬비아 국민들, 축구를 너무 좋아해서 사람까지 죽였다는 식으로 운운한 적이 있다. 설마 자책골 하나 넣었다고 해서 콜롬비아 사람들이 에스코바르를 실제로 죽이고 싶었겠는가. 홧김에 ‘나가 죽어라’고 한마디 한 사람은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뿐, 뜻이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괴한은 ‘자책골에 감사한다’고 비아냥거리며 12발을 쏠 때마다 ‘골!’이라고 외쳤다고 여자친구는 증언했다. 그 경기에 거액을 베팅하였다가 엄청난 손해를 본 범죄조직의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리는 범행이다. 물론 전직 경호원 출신 무뇨스 카스트로의 단독범으로 결론났고 그는 43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하다가 2005년에는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혹시 우리가 남미에 대해, 그 광대한 지역의 여러 나라들에 대해 약간의 편견과 엄청난 무지에 의하여 선입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자. 1969년의 ‘축구 전쟁’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간의 축구 전쟁 말이다.
남미 사람들,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면 서로 죽고 죽이는 일까지 있을까, 이렇게 즉각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월드컵 때마다 몇몇 방송 프로그램에서 월드컵의 역사와 비사와 이면사를 다룬다고 하면서 이 축구 전쟁을 ‘광팬들의 광란’ 식으로 묘사하는 수가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2차 대전 종전을 기회로 삼아 오랜 식민통치를 종식한 엘살바도르는 1948년부터 공업발전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렇게 하려면 대도시로 몰려든 왕성한 노동자 계층이 필요했으나 여건은 오히려 봉건적 대토지 소유제 상태였다. 엘살바도르 사람들은 인접한 온두라스로 농업이민을 떠났다. 여기서 ‘국경’ 문제가 발생했다. 1962년, 온두라스는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접경지의 엘살바도르 이주민을 쫓아냈다.
이 영토분쟁이 금세 전쟁으로 확전됐다. 이후 양국은 실제적인 전쟁은 물론 경제보복이나 자국 내 이웃 나라 이주민에 대한 극단의 보복을 벌였다. 엘살바도르는 1972년부터 극우파에 의한 테러와 쿠데타와 내전으로 혼란상태가 되었다. 그럴 때마다 온수라스에 가혹한 영향력이 미쳤다. 두 나라의 국경문제는 지난 2006년 4월에 와서야 매듭지어졌다. 1972년의 축구 전쟁은 이 두 나라의 오랜 역사, 정치, 사회적 갈등이 축구장을 통해 분출된 사건이다. 그러니 광팬들의 광란 같은 얘기는 더 이상 곤란하다. 남미의 소설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의 대표작 『수탈된 대지』와 『불의 기억』은 물론이고, 특히 월드컵 때마다 펼쳐 읽는 『축구, 그 빛과 그림자』를 보면, 남미에 대한 그동안의 무지와 그에 따른 편견을 조금은 씻어낼 수 있다.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서 갈레아노는 두 나라의 축구 전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실제로 그 전쟁은 오래전부터 숙성되고 준비된 것이었다. 그 전쟁의 위선적인 이름은 길고도 긴 양국의 역사를 숨기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그 전쟁은 ‘아메리카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양성된 군부독재자들에 의해 100년이 넘도록 서로 증오하도록 훈련받은 양국 빈민들 간의 증오가 비극적으로 분출된 사건이었다.”
갈레아노의 글을 읽다 보면 시쳇말로 ‘뻥’이라고 할까, ‘구라’라고 할까, 이왕 엄청난 수사로 극찬할 것이라면 가히 중국 무협영화처럼 100만배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레오니다스의 골은 너무 아름다워서, 골을 허용한 골키퍼조차도 일어나서 그를 축하해줄 정도였다”거나 옛 소련의 골키퍼 야신에 대해서 “몸은 꼼짝도 하지 않고, 단지 시선만으로 공의 방향을 돌려버릴 수도 있었다”고 쓴다.
설마 사실일까, 그러나 그러려니 하면서 킬킬거리며 읽는 게 이 책의 특미다. 그러면서도 통찰력이 살아있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왜 남미를 대표하는 소설가이겠는가.
마라도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코카인 덕분에 잘 싸운 것이 아니라, 코카인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더 잘 싸웠던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중압감에 늘 괴로워했었다. 대중이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외치던 때부터 그의 척추뼈에는 이상이 있었다. 마라도나는 자신의 등을 짓누르는 ‘마라도나’라는 부담스러운 짐을 항상 지고 다녔던 것이다.”
축구, 그 자체에 대해서는 또 이렇게 씁쓸히 표현한다.
“축구의 역사는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이다. 스포츠가 산업화되어 감에 따라, 경기를 하며서 맛볼 수 있는 아주 단순한 기쁨의 미학을 앗아가 버렸다. (중략) 고양이가 실꾸러미를 가지고 놀 듯이, 즉 심판도, 시계도, 특별한 동기도 없이, 무슨 게임을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하늘 멀리 떠가는 풍선이나 떼구르르 굴러가는 실꾸러미처럼, 가벼운 공을 가지고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이른바 잠시 동안이나마 어린아이가 되어보려는, 그런 광기를 어느 누구에게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곧 월드컵이다. 계기 삼아 몇 권의 책을 읽어볼 만하다. 동물행동학자인 데즈먼드 모리스의 『축구 종족』은 축구라는 집합행동의 미시적인 요소 분석을 가능케 한다. 이 지면에서 한 번 다룬 적 있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에릭 더닝의 『스포츠와 문명화』도 중세의 “공격적으로 표출되던 쾌락이 수동적이고 순화된 관전의 쾌락”으로 이행하는 현상, 즉 문명화, 곧 모더니티의 본질을 축구에서 재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언제 이걸 다 읽고 축구를 볼 것인가. 오직 딱 한 권 읽고 생중계에 몰입한다면 역시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다. 이 책에는 갈레아노의 ‘서문’은 따로 없다.
그렇지만 2012년 8월 타계한 중남미 역사문화의 특출한 학자 이성형의 추천사가 격조와 품위를 보여주고 있어, 저자의 서문을 충분히 갈음할 만하다. 남미 역사의 눈물을 이해한 사람, 남미 예술의 광기를 사랑한 사람, 남미 축구의 열정에 푹 빠졌던 사람, 이성형은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에세이 솜씨는 움베르트 에코보다 앞선다. 단문에 패러디, 풍자, 반어법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재주라니! 그런 그가 축구에 대해 152개의 에세이를 썼다. 나는 이 책을 축구의 ‘에로이카’라 평가하고 싶다. 자유, 평등, 박애, 아름다움, 다양성이 넘쳐흐르는 축구 공화제로 이르는 베토벤의 영웅교향곡 말이다. 제1악장 알레그로 콘브리오는 영웅 열전. 영웅은 당연히 펠레, 마라도나, 에우세비오, 크루이프 등이고, 100년 동안 명멸했던 영웅들에게 저자는 송가를 바친다. 제2악장, 장송행진곡은 아다지오 아사이에 해당한다. 골고다 언덕으로 이르는 (현대 축구의 비참한) 현실들이 전개된다.”
★ 이 글은 2018년 5월 28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