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빈』글항아리, 2014은 내가 오랫동안 ‘필청’해 온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나침반이었다. 쇼르스케는 책 『세기말 빈』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정치적 해체의 진동이 날카롭게 느껴지던 세기말의 빈은 무역사적인 우리 세기의 문화를 싹 틔운 가장 비옥한 온상 가운데 하나였다. 그 위대한 지적 혁신자들은 모두 자신이 양육된 19세기 자유주의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역사관에 연결되어 있던 자신들의 연대를 어느 정도는 고의적으로 끊었다.”
그렇게 ‘고의적으로 끊’어버린 문화사의 새로운 장에 문학의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후고 폰 호프만슈탈, 건축의 카밀로 지테와 오토 바그너, 학계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미술의 구스타프 클림트와 오스카 코코슈카, 음악의 구스타프 말러와 그 제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이 일순간 빈에 등장했다. 다시, 쇼르스케의 말을 정리하여, 들어보자.
“런던이나 파리, 베를린과 같은 도시에서는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서로를 아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빈에서는 1900년께까지도 엘리트 그룹 전체의 응집력이 강했다. 살롱과 카페는 여러 부류의 지식인들이 각각의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장소였으며 교양교육과 예술적 문화에 자부심을 지닌 사업가나 전문직 엘리트들과 교류하는 기관으로도 활력을 유지했다.”
세기말 빈은 음악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 철학, 문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럽을 선도한 중심이었다. ‘벨 에포크’의 중심 무대가 빈이었다. 아르누보 건축의 대표자 오토 바그너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해 온 고풍스런 도시 빈을 현대도시로 탈바꿈시켰다. 링슈트라세Ringstrasse가 그 증거다. 아돌프 로스가 이를 한 번 더 변주했다.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와 그 도시의 마천루 빌딩에 충격을 받은 로스는 황제 도시 빈의 과시적인 장식성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호프부르크 왕궁의 거대한 바로크식 문미하엘러 토르 맞은편에 ‘로스하우스’를 지었다. 빌리 하스는 『벨 에포크』에서 “로스는 건축물과 실용적인 대상에 붙어 있는 장식이나 치장용 곡선 등 일체를 부정했다”고 썼다. 이렇게 하여 빈은 불과 몇십 년 동안에 중세에서 급속히 현대로 이동하였다.
그 중심에 작곡가 말러도 있었다. 물론 자주 튕겨나갔다가 되돌아오는 방식으로 말이다. 1897년 빈 오페라극장의 지휘자 겸 감독으로 들어간 말러는 혁신의 오페라 연출을 시도한 사람이자 그 자신이 최초의 현대적 작품을 쏟아낸 작곡가였다.
1902년, 기존의 모든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어 20세기 모더니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 알프레드 롤러나 구스타프 클림트 등의 ‘빈 분리파’를 위한 건물이 들어서고 그 건물 한복판에 클림트의 ‘베토벤 벽화’가 그려지는가 하면 조각가 막스 클링거가 신의 경지에 오른 베토벤 상을 전시하게 되었을 때, 그 전시회의 하이라이트인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지휘를 위하여 분리파 건물에 들어선 자는 다름 아닌 말러였다. 끝내 빈 상류사회의 배타적인 인종 편견에 견디다 못하여 미국으로 몇 해 동안 나갔다가 병에 걸려 돌아와서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말러였지만 1902년 전후는 말러의 전성기였다.
아도르노는 『말러, 음악적 인상학』에서 “고뇌로 울부짖으면서 자신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내리는” 말러의 음악, 특히 교향곡 6번은 “마치 최후의 불길 속에서 인류가 다시 한 번 붉게 타오르고 망자들이 다시 한 번 살아날 것 같은 소리가 난다. 행복은 암담함으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벼랑 끝에서 높이 타오른다”고 썼다. 순간 니체가 떠오르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쓴 그 유명한 사랑의 변주곡 말이다. 그리고 함께 들어보라. 6번 교향곡 4악장, 그 최후의 타격 소리를!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초인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여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 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5·18은 우리에게는 피로 쓰여진 역사의 하루이며 동시에 말러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이는 우연일 뿐이다. 그럼에도 점선으로라도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한 날이다. 지난 2010년 5월 17일,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연주가 있었다. 구자범이 지휘했고, 많은 시민들이 5악장의 합창 무대에 섰다.
그날의 공연 프로그램 북에서 철학자 김상봉은 “시민들이 5·18을 기념하는 연주회에 같이 참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예술적 행위지만, 동시에 작지만 의미심장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썼다. 또 장철환은 말러와 5·18의 우연성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오늘, 말러 서거 99주년이면서 동시에 광주 30주년이 되는 오늘의 ‘부활’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말러 교향곡 2번의 ‘참빛’으로의 참여를 통해 ‘빛고을’의 부활을 노래”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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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저자들도 그 점을 유의하여 썼다. 옌스 말테 피셔의 『구스타프 말러』는 이 복잡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샅샅이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고 노먼 레브레히트의 『왜 말러인가?』는 그 음향들의 문화적 충격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된다. 잔인한 유머와 깊이 있는 독설로 유명한 레브레히트는 『왜 말러인가?』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바흐나 모차르트, 베토벤의 삶에서는 내가 공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손에 쉽게 와닿지 않았고, 일상생활은 단조로웠으며, 그들의 운세는 부유층의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되었고, 심지어는 그들의 병명마저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이에 반해 말러는 (중략) 내가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이슈들, 이를테면 인종차별, 직장에서의 갈등, 사회적인 갈등, 인간관계의 단절과 소외감, 우울증과 의학지식의 한계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다(중략). 그는 설교도 선전도 하지 않고, 자랑도 불평도 하지 않으며, 긴 인생 여정 동안 우리와 같은 바를 느끼면서 함께 웃고 울며 말을 건네며 그 모든 것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말러는 바로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 이 글은 2018년 5월 7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