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국과 중국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삼국지』나 『수호지』는 ‘이야기’의 어떤 원형이었다. 신영복은 『강의』에서 중학교 시절의 추억을 들려준다. 『삼국지』의 결정적인 장면을 친구들과 읽고 있었는데 마침 어머님 심부름이 있었다. 까까머리 신영복은 뛰고 또 뛰었다. 그런데 심부름을 마치고 와보니 친구들이 책을 읽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관운장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인용컨대 “관운장이 죽자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에 관운장이 죽다니! 어린 우리는 참으로 슬펐습니다.”
나도 엇비슷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방학 때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강원도 함백의 고모네 집에 놀러갈 때, 우리 형제는 『삼국지』를 들고 갔는데, 아주 어렸을 때이므로 이문열이나 황석영·장정일의 번역본은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누구의 번역본인지는 알 길이 없다. 박태원·정비석·김구용·박종화 같은 기라성 중의 하나인지, 아니면 육교 밑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팔던 해적본인지 알 길 없으나, 그 당시 조판대로 세로 배열에 한 쪽을 두 칸씩 나눠서 촘촘하게 편집한 『삼국지』였다. 형이 더 빨리 읽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려 하면 나는 “잠깐, 잠깐만, 아직, 아직” 했다. 중앙선 기차는 덜컹거렸다.
그렇게들 중국 이야기를 다들 읽었을 테고, 고교시절의 한문시간에 더러 이름이나 익은 이백이나 두보를 거쳐서 일종의 혁명 시뮬레이션 시기에 저 레닌이나 루카치 대신 천두슈나 마오쩌둥 같은 사람에게 더 호감을 가진 세대들에게 중국과 중국인 이야기는 늘 넘쳐나는 이야기의 폭포수들이다. 일본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도 꽤 있겠지만 『대망』의 피비린내나 『료마가 간다』의 풍운이 『삼국지』를 시작으로 하여 수·당·명·청과 옌안 대장정, 문혁을 거쳐 형성되는 장강만리의 중국 이야기에 비할 바는 못될 듯싶다.
어느 일간지에 연재된 「사진으로 보는 중국 근현대」를 보았다. 그 신문을 구독하지는 않았기에 매주 읽지는 못하였어도, 틈틈이 검색을 통하여 읽었다. 나중에 『중국인 이야기』 시리즈로 출간되어, 에라 모르겠다 한 번에 몰아서 읽어야겠다, 해서 흔한 말로 ‘도장깨기’ 식으로 지금 한 권씩 독파 중이다.
이제는 일반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이지만, 오래전에 그는 책 읽는 사람들 말고 책 쓰는 사람들, 책 만드는 사람들에게 장안의 최고수로 저명했다. 1970년대부터 홍콩과 타이베이를 거점으로 하여 ‘중공’을 들여다보았고 양국 수교 이후인 1991년 3월부터는 중국의 싼롄三聯서점 서울점 대표를 맡으면서, 멀리는 대륙 전체를 조망하고 가까이는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골목 구석구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일단 재미있다. 며칠 둘러보고 여행기까지 써내는 요즘 시대에 40년 공부와 교류와 추억을 종횡으로 비벼내는 문장은 얼핏 보기에 슬렁슬렁 쓴 듯 보이지만 그 속은 꽉 차 있다. 역사와 사건과 인물에 관한 저자의 대가다운 촌평과 일갈 또한 흥미롭다.
무엇보다 독자들을 바로 그 현장 가까이로 데리고 간다. 술냄새, 땀냄새, 화약냄새, 그리고 더러는 피냄새가 배어 있다. 가공과 상상의 묘사가 아니라 40년 이상의 문헌자료에 더하여 저자가 직접 만나서 듣고 기록한 구술이 곳곳에서 각 장면의 사실성을 보증한다. 책의 곳곳에 ‘구술하였다’ ‘말을 남겼다’ ‘엿들었다’ ‘이야기를 나눴다’ 등이 나오는데 그 겸손한 청자는 바로 김명호다.
이를테면 중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인 1958년의 루산 회의. 김명호는 적는다. “마오가 펑더화이의 한쪽 팔을 잡고 말을 걸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시뻘게진 얼굴에 눈까지 부릅뜬 펑더화이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몸을 돌려 펑더화이를 다시 잡았다. ‘우선 앉기라도 하자. 좋은 말이건 나쁜 말이건 얘기 좀 하자.’ 펑더화이는 막무가내였다. 할 말이 없다며 마오의 팔을 뿌리치고 갈 길을 갔다. 수행원들 앞에서 마오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봐서는 안될 정경을 목격한 수행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뤄루이칭은 숲을 향해 바지춤을 내리고, 커칭스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콜록콜록 기침만 해댔다. 저우언라이는 어디로 없어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펑더화이는 실각했다. 세상이 완전히 그를 내치기 전에 그가 먼저 베이징을 표표히 떠나갔다. 김명호는 이렇게 덧붙인다. “펑더화이는 중난하이를 떠났다. 배웅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마오쩌둥은 ‘스산한 가을바람이 대장군을 배웅했다’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정도는 이 장강대하의 극히 일부다. 대륙을 제각각의 다리미로 누볐던 위안스카이, 천두슈, 루신, 후스, 장쭤린, 장제스, 마오쩌둥, 류사오치, 등샤오핑 등은 어떤 지점에서는 이 책들의 조연급으로 물러서기도 한다.
장강만리의 이야기 책에 비하여 서문은 짧다. 김명호답다. 평소 허례와 절차를 번거로이 여기고 위아래 서열 나누기를 질색하는 김명호의 단면이 엿보인다. 몇 자 써놓았으니 궁금하면 읽어보라는 풍모다.
“40년 가까이, 중국은 나의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 그냥 놀이터였다. 책, 잡지, 영화, 노래, 경극, 새벽시장, 크고 작은 음식점 돌아다니며 즐기기만 했지 뭘 쓰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말장난 못지않게 글장난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일기건 편지건, 남들이 쓴 걸 보기만 했지 직접 써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써놓고, 맘에 들 때까지 고치면 된다’는 마오쩌둥의 문장론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말이 쉽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하면서 깨달았다. 늦게 깨닫길 천만다행이다. 20여 년간, 내게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중국의 ‘문화노인’들이 연재 도중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베이징이나 홍콩, 타이베이를 가도 만날 사람이 거의 없다. 어떻게 해야 그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을지, 몰라서 답답하다.”
실은, 김명호의 글을 읽는 것보다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게 훨씬 흥미진진하다. 마주 앉은 곳이 금세 베이징이 되고 상하이가 된다. 연재작의 그 첫째 권 표지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동네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농민화가 주융칭의 그림 ‘설서납량’이 제1권의 표지화가 된 연유가 그럴 것이다. 김명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분단으로 인하여 기껏해야 전철을 타도 문산 정도밖에 가는 신세가 되어 올망졸망 살아가는 이 남한의 지리적 한계, 상상력의 결핍, 넓이와 깊이의 부재를 금세 실감하게 된다. 여름이 오기 전에 평소 즐기던 냉면이라도 앞에 두고 중국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을 따름이다.
★ 이 글은 2018년 4월 23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