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는 지난 2015년 5월에 영화 『국제시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국제시장』은 단순히 보수적 입장에서 만들어진 한국 현대사 서사라기보다는 ‘국익’과 ‘가족’의 신성한 이름으로 합리화되는 경제적 ‘성취’를 무조건 우선시하는 만큼 개인의 독립적 개성이나 인권을 소거시켜버리는 극우적 사고방식을 현대적으로 포장하여 다시 유포시키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또 박근혜 시대의 퇴행적 지배층이 선호하는 국가관이나 개인관, 인간관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닌 게 아니라 박노자의 ‘예지적’인 언급대로 이 영화는 ‘박근혜 시대의 퇴행적 지배층이 선호하는 국가관’의 직접적인 표출일 뿐만 아니라, 여러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1월 말 손경식 CJ그룹 회장을 독대해 “씨제이의 영화·방송사업이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 방향을 바꾸라”고 직접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고, 이에 CJ그룹은 『국제시장』이나 『인천상륙작전』 같은 영화로 제작방향을 급선회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 내 고모부, 어느덧 팔순에 이른 이북 평양 출신의 노인, 기력이 예전만 못하신 내 고모부의 얘기 말이다. 『국제시장』이 개봉되어 한창 흥행가도를 달릴 때 사위·며느리 할 것 없이 온가족 다함께, 물론 고모부와 고모를 모시고 영화를 보러 갔더라는 얘기다. 나는 직접 함께 가서 보지는 못했다. 궁금하여 나중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영화 어땠니? 안 울고 잘들 봤어?
고모와 고모부의 생애사는, 정말 역사의 우연처럼, 『국제시장』의 줄거리와 거의 90% 싱크로다. 어렸을 때 전쟁을 피하여 내려왔고, 힘겹게 고학하며 컸고, 성인이 되어 베트남 전장터로 갔고, 그 후에 독일까지는 아니어도 강원도 정선·함백의 탄광지대에서 일했고, 탄광사고를 당하여 그곳을 떠나야 했고, 자동차 공장과 건물 경비 등등으로 평생 자식들을 위해 일만 하신 고모부. 이런 생애사를 가진 분과 그 가족들이 다함께 『국제시장』을 보러 갔으니 그 소감이 어땠는지 궁금하여 물어본 것이다.
세상물정 다 알고, 좌와 우가 뭔지 다 알고, 박근혜의 퇴행성이 뭔지 다 아는 사촌 형제들인데, 『국제시장』 그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고모와 고모부는 울기 시작하였고, 이 형제들도 중간쯤부터는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 바람에’ 영화를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눈물 많은 고모야 그렇다 쳐도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하시는 저 북방 출신인 고모부도 영화 초반부터 울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로는 줄거리와 상관없이 그냥 울기만 했다.
나는 이 ‘감정의 생애사’를 생각하고 싶다. 물론 탁견의 박노자가 이 지점을 모를 리 없을 것이며,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정치 또는 역사 소재의 영화들에서 감독의 작의와 달리 관객은 의외의 반응 또는 감정을 쏟아내는 경우를 많이 봤을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보합’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국제시장』의 역사적·미학적 퇴행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면서, 내내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감정’마저 퇴행적이거나 ‘보수반동’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한마디로 압축컨대 그 눈물은 영화의 제작 배경이나 감독의 진부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단 한 번도 자기 생애를 집합적으로 기억해본 일이 없는 세대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 한, 답답함, 억하심정의 격렬한 표출일 것이다.
그 눈물은 그 영화의 퇴행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저 평생에 한 번은 울고 싶었던 세대가 자기 생애사와 겹쳐지는 이야기 앞에서 그냥 울었던 것이다. 퇴행이고 뭐고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디서, 누구 앞에서, 어느 순간에, 그냥 한 번 원없이 울어본단 말인가. 울지 않아야 하고 울어서는 안 되고, 그래서 평생 울 수 없었던 세대가 컴컴한 극장에 들어가 그 옛날 거리 풍경이며 옷차림만 펄럭거려도 그냥 눈물부터 흘렸다. 고모부는 울고 싶었던 것이다.
때마침 눈물의 책이 한 권 나왔다. 노명우의 『인생극장』.
저자 노명우는 사회학자다. 독일에서 공부했고, 그곳의 비판문화이론, 그러니까 발터 벤야민을 앞뒤로 하여 전개된 현대 문화도시, 시각, 미디어 등 연구의 급진적 시선을 배워 왔고, 그것을 단순히 전달하는 게 아니라, 독일 혹은 유럽의 근대 시민사회와는 결이 다른 한국 사회에 적용하여 중요한 논문을 썼으며, 『세상물정의 사회학』과 이 책 『인생극장』으로 본업과는 다소 거리가 먼 듯 느껴지지만 원래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가야 할 곳, 즉 ‘화려하면서도 텅빈 듯한’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세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학자다.
『인생극장』은 세 겹으로 둘러싸인 책이다. 우선 당대의 영상 시각자료를 연구의 재료로 활용한 시각의 사회학이다. 20세기의 현대는 시각의 시대이고, 이 시각영화, 텔레비전, 포스터 등 재료들은 그 어떤 사회적 지표들인구, 고용, 출산, 학력 등만큼이나 현대를 분석할 수 있는 소중한 증거다. 한 시대의 집합적 정서가 그 시각의 재료들 안에 응축되어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은 도시 사회학의 어떤 요소를 갖고 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무엇보다 산업화를 겪으면서 한반도의 거의 모든 인구가 격렬한 이동을 감행하고 그 최종의 목표지는 결국 대도시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지리적 이동의 지정학적·사회적 의미를 이 책은 애써 살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부모세대의 생애사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아니, 이 마지막 대목만큼은 달리 묘사해야겠다. 노명우는 시각과 도시의 사회학이라는 기본적인 관점을 취하되, 수많은 영상과 문헌 자료를 총동원하여 자신의 부모님이 살아냈던 시공간의 흔적으로 찾아 헤맨다. 실제로 부모님이 살아내야 했던 여러 도시의 공간들을 책을 쓰기 전에, 책을 쓰면서, 또 책을 다 쓰고 나서도 찾고 또 찾는다.
그리하여 이 책은 단순한 ‘자기기술 지적 사회생애사 고찰’이 아니라 여러 사회학적 방법론과 저자의 개인적 체험이 함께 쓴, 부모세대의 기억과 그것의 회복이라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퇴행적이고 낭만적인 ‘그땐 그랬지’가 아니라 당대 삶의 조건과 그 행위의 의미를 찾는 ‘그땐 왜 그랬지?’ 하는 질문과 답으로 채워져 있다. 제국과 식민, 전쟁과 분단, 그리고 박정희/전두환이라는 강력한 시대를 겨우겨우 살아냈으나, 그럼에도 최소한의 인간적 의무와 그 자신의 자존만큼은 지켜내고자 했던, ‘그저 그런’ 사람들의,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연대기!
이게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눈물이 배어 있다. 조금이라도 책을 읽어온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는 중에, 아니 서문을 읽는 중에 아 이 책의 저자가 이 대목은 울면서 썼구나, 울다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쓰다가, 또 울다가, 그렇게 쓴 책이구나 하고 금세 알아볼 수 있다. 1년 상간에 부모님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낸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쓰라렸다. 연인과의 이별로 인한 고통과는 다른 쓰라림이 있다. 연인과는 이별하더라도 어느 정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또 다른 사랑이 예전의 사랑이 남긴 상처를 치유해준다. 하지만 부모는 완벽하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 빈 자리를 대신해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리 기다려도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 부모를 잃은 상실감은 시간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다’와 ‘아리다’를 구별하기 시작했나 보다. 이제는 ‘아리다’라는 단어의 뜻을 확실히 안다.”
★ 이 글은 2018년 3월 20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