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사륜마차가 가로지르고, 장난감과 봉봉과자가 번쩍거리고, 탐욕과 절망이 들끓는 진흙과 눈의 혼돈, 가장 완강한 고독자의 뇌수마저 어지럽히려고 마련된 대도시의 공인된 착란.”
이게 무슨 일인가. 보들레르가 1862년에 쓴 산문시 「장난꾸러기」의 한 구절이다. 나귀 한 마리가 채찍으로 무장한 무뢰한에게 시달리고 갑자기 그 누추한 짐승 앞에 멋쟁이 신사 하나가 나타나서 정중하게 절을 하면서 ‘아름답고 복된 새해를 기원합니다!’ 하고 말한다. 이 광경을 보면서 ‘나’, 즉 보들레르는 ‘측량할 수 없는 분노에 돌연 사로잡혔다’고 산문시 ‘장난꾸러기’는 기록한다.
새해 정초부터 조금은 불길한 책을 소개하고 있는 셈인데, 이 그로테스크한 ‘장난꾸러기’를 비롯하여, 서문과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50편으로 구성된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을 읽다가, 그만 ‘새해의 폭발’이라는 대목을 본 것이다. 산문시라고 했지만 보들레르가 파리의 새해 풍경을 자연주의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님을 상기할 때, 우리의 새해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곳이 파리든 뉴욕이든 서울이든 ‘탐욕과 절망이 들끓는’ 현대 도시인의 운명이란 채찍질당하는 나귀의 신세가 아니고 무엇이랴. 다른 시 ‘새벽 한시에’에서 보들레르는 현대 도시인의 극단적인 고독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드디어 혼자다! 들리는 소리라곤 이따금 뒤늦게 지쳐빠져 돌아가는 승합마차의 바퀴소리뿐이다. 몇 시간 동안 우리는 휴식은 아닐지언정 고요를 소유하게 되리라. 드디어! 인간의 얼굴이 가하는 포학은 사라졌으니, 이제 나는 내 자신에 의해서만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상의 보들레르 시의 인용은 황현산 번역의 문학동네 판이다.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된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는 시인이 저도 모르게 지은 한숨이나 작은 손짓조차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비평해 왔으며, 산문집 『밤이 스승이다』로 묶은 단단한 글들로 인문적 사유의 한 경지를 펼친 바 있다. 이 시집에는 50편 각각에 대한 꼼꼼한 주해가 달려 있는데, 이것이 없었더라면 보들레르의 시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산문시’라는 말 자체도 황현산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는 “보들레르의 산문시는 산문으로 시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산문적인 현실에서 시적인 것을 찾아내 그것을 산문으로 기술한 것”이라고 말한다.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은 1869년에 출간되었다. 이 무렵 파리는 발터 벤야민이 ‘모더니티의 수도’라고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스펙터클이 개막하였다. 현대 도시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의 수용에 따른 기술적 대응, 이를테면 주택·위생·교통·여가 등의 수요에 대한 하드웨어적 대응뿐만 아니라 새롭게 밀려드는 거대한 규모의 도시인들이 곧 구체적인 물물 상품시장의 소비자로 재배치되는 과정을 동반하게 됨으로써 이에 대한 자본주의적 대응의 형태로 스펙터클의 창출이 이뤄지게 된다. 그 스펙터클은 기본적으로 시각에 조응하고 그것의 감각적 반응을 기대함은 물론 특정한 시각 요소에 의해 특정한 사회적 감정의 생산까지 유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발전이라는 거대한 구조 변화의 공간적 증거는 확산되고 재편되는 근대 도시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공간, 즉 단지 물리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선언』에서 과감하게 묘사한대로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 상태들의 부단한 동요, 항구적 불안과 격동’이 이뤄지는 공간으로써 그야말로 기존의 가치관, 제도, 인간관계, 습속, 사회적 태도 등 ‘모든 견고한 것’이 낡은 것이 되어 사라진 상태로 근대 도시의 출발점에 선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생활상의 지위와 상호 연관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런 시대, 그런 도시, 그런 파리였다.
바로 그 ‘냉정한 눈’은 그러나 근대 도시의 시각적 요소들에 의해 손쉽게 제압당한다. 말하자면 치솟는 건물, 몰려드는 군중, 번잡하게 변화하는 생활세계의 일상 요소들은 근대 도시인의 시각을 현실적으로 압도하였고 감각적으로는 환상의 그물을 던졌다. 그것은 단지 상품들의 풍성한 전시와 그것으로부터 노동과 소비 양 측면에서 소외되는 노동자계급이라는 고전적 소묘 정도가 아니라 거대하게 변모하는 공간에 의하여 시간의 감각마저도 동반하여 급변하고 이로써 확실히 근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의 감각 지평에 놓인 근대 도시인들의 감각 요소를 누가 어떻게 제압하느냐 하는 문화·정치적 의미가 이미 자본주의의 가공할 만한 변모 속에 내장되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스펙터클은 그러므로 ‘눈부신 구경거리’라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당대의 집합적 욕망과 권력의 시각적 통제’가 교직하여 만들어내는 문화·정치의 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짐멜은 대도시의 등장과 발전이 인간의 지각작용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여 19세기 말 대도시 개인들이 외적 자극과 내적 자극들이 급속히 변화하는 이미지의 홍수로 인해 일종의 ‘신경과민 증상을 겪게 된다고 보았다.
짐멜은 ‘대도시의 정신적 삶’에서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오는 인상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썼다. 근대의 도시인들은 나날이 공세적으로 펼쳐지는 대도시 공간의 스펙터클의 자극, 즉 ‘신경에 무리할 정도의 반응을 요구’하는 자극에 지쳐 결국 “신경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더 이상 새로운 힘을 축적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혹사”당하게 된다.
벤야민도 이 점에 주목하여, 다양한 도시 이미지들의 충돌이 주는 시각적 충격을 ‘시각적 촉각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전기에너지 속으로 뛰어드는 듯한 도시적 체험에 의해 개인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충돌을 겪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50편으로 구성된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은 ‘부단한 동요와 항구적 불안과 격동’에 시달리는 현대인들,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충돌’을 겪는 현대인들의 우울한 집단 초상화인 것이다. 48번째 산문시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라도」에서 보들레르는 “마침내 내 혼은 폭발하여, 슬기롭게도 나에게 외친다. 어디라도 괜찮다! 어디라도 괜찮다! 이 세상 밖이기만 한다면!”
새해 정초부터 무서운 시집을 소개하고야 말았는데, 하아 어쩌랴, 연말연시의 떠들썩한 분위기 사이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보들, 눈물의 소식들, 재난과 사고들이 가볍고 즐거운 책을 마다하게끔 만들었다. 그나마 ‘서문’ 한 구절은 위안이 될까. 보들레르는 50편의 산문시들을 게재한 ‘라 프레스’의 문학담당 주간 아르센 우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을 시작하자마자, 저는 제가 그 신비롭고 빛나는 모범과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기묘하게도 전혀 다른 어떤 것을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오 만들어내고 있음을 깨달았소. 저 아닌 다른 누구라면 필경 자랑스럽게 여길지도 모를 이 예기치 못한 결과는 자기가 만들어내려 기도했던 것을 정확하게 완성하는 것이 시인의 가장 큰 명예라고 여기는 정신을 오직 심각하게 모욕할 따름이오.”
★ 이 글은 2018년 1월 2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