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6월, 임종국은 장차 한국 문학계는 물론 사회역사계에도 커다란 충격파가 될 『친일문학론』을 출간하면서,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달린 서문에 “이 책을 쓴 임종국이는 친일을 안 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며 유년시절의 짤막한 체험을 적는다. 임종국은 1929년생.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 교육의 막바지를 체험한 세대다. ‘조선 놈의 종자’라느니 ‘조선 놈과 명태는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맛이 좋아진다’느니 하는 모멸의 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한 세대다.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책임져야 할 구체적인 친일행위를 할 나이는 아니었다 해도 그런 식민지 교육과 언어에 의하여 자신의 관념이 철저히 왜곡되었음을 임종국은 부정하지 않는다. 어느덧 해방이 되고, 임종국은 친구와 함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나는 해방이 뭔가? 하면서 그래도 덩달아 좋아하였다. 이때 내 나이 17세. 하루는 친구 놈한테서 김구 선생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얘! 너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 사람이래!”
“그래? 중국 사람이 뭘 하러 조선엘 오지?”
“이런 짜아식!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지금 나는 요즘의 17세에 비해서 그 무렵의 내 정신연령이 몇 살쯤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식민지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 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어디 임종국뿐이랴. 그 시절의 많은 사람들이 눈이 멀고 귀가 멀었다. 독립은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고 당장의 과제는 일제 식민지 정책에 부응하거나 마지못해서 흉내라도 내야 했다. 천하의 엘리트들이 친일에 앞장서고 한 시대의 문화예술인들이 친일의 선동대로 활동했다. 1966년, 드디어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그 서문에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썼다. 거의 모두가 천치가 되었던 시대였다.
이 책의 위대함은 열렬한 민족주의적 수사학이 아니라 엄격한 사실에 있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을 무덤 삼아서 완벽에 완벽을 기하여 1차 자료를 찾아내고 스스로 확신이 설 때까지 두 번 세 번 철저히 확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숱한 친일행적을 밝혀냈다. 뿐만 아니라 이러저리 얼키고설킨 인간관계를 완전히 떠나서 오로지 자료에 의거하여 분명하게 기록했다. 그의 결혼식에 주례를 선 고려대 은사 조용만의 친일행적도 『친일문학론』에 기록되었으며, 특히 천도교 당수와 『조선농민사』 사장을 지낸 부친 임문호의 행적도 기록되었다.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없었을 까닭이 없다. 그래도 아들은 기록했다. 부친 임문호가 “내가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사실 그대로 써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이 책의 역사적 가치를 더해준다.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도 그런 경우다. 호손은 1804년 7월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의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 자체가 소설가 호손을 만들었다. 세일럼과 청교도 집안 말이다.
세일럼이란 어떤 곳인가. 영국이 오늘날의 미 동부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던 시절, 1692년, 항구도시 세일럼에서 마녀 사냥이 벌어진다. 이른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고 하는 ‘미국 예외주의의 신화’가 잔인하게 파괴된 사건이 바로 세일럼의 마녀 사냥이다. 미 동부지역을 장악한 초기 청교도들이 바로 자신의 이념과도 같은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벌여 마을사람 19명을 처형한 사건이다. 그로부터 265년이 흐른 후인 1957년, 매사추세츠 주정부는 1692년의 세일럼 마녀 재판을 공식적으로 사과까지 했다.
다시 호손 얘기를 해보자. 세일럼의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난 호손은 1821년 보든대학교에 입학한 후 학업보다는 소설 창작에 몰두했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피어스와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 롱펠로가 그의 동창이었다. 대학을 마친 후 호손은 무려 12년 동안이나 세일럼의 어머니 집에서 극단적인 칩거생활을 하며 독서와 사색에 몰두했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세관원으로도 일하여 그 경험을 소설에 쓰기도 하였으나 세상으로 열린 문을 닫고 지냈으며, 나중에 대학 동창 피어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영국 리버풀 영사로 임명되어 유럽 생활을 한 정도가 예외적인 나들이였다.
그는 세일럼에 칩거하였다. 자신의 실제 경험을 화자 ‘나’를 통하여 여러 역사적 기록들을 겹쳐서 들려주는 방식을 취한 소설 『주홍글자』의 서문에서 호손은 고향 세일럼에 대해 이렇게 쓴다.
“나는 어디에서든 늘 행복했지만, 마음 속에는 이 오래된 세일럼에 대해 더 좋은 용어가 없어 그냥 애정이라고 부를 만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내 가계가 이 땅에 오랫동안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칩거하는 중에, 또는 소설의 화자 ‘나’에 따르면, 세일럼의 세관 공무를 하는 중에 호손은 집안의 기록들과 세일럼 지방의 중요한 기록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는 중에 성장기 이후 자신을 괴롭혀 온 심각한 우울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확인하게 된다. 바로 그 세일럼의 마녀 재판의 판사가 고조부였던 것이다. 다시 『주홍글자』의 서문을 보자.
“어느 한가롭고 비 오던 날, 운 좋게도 재미있는 발견을 하게 되었다. 나는 구석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을 파헤치고 문서들을 하나하나 펼쳐, 오래 전 바다에 침몰했거나 부둣가에서 썩어가고 있는 선박의 이름이나 이제는 거래소에서 들어볼 수도 없고 그들의 이끼 낀 묘비에서도 잘 알아볼 수 없는 상인들의 이름을 읽으며, 이제 죽은 시체에게 울적하고 귀찮으면 반쯤 내키지 않는 관심을 보이는 그런 태도로 이런 것들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호손은 이렇게 세관원의 회고 형식을 빌리면서 ─ 실제로 호손은 그런 일을 몇 해 했다 ─, 자연스럽게 호손 가문의 실제 연대기와 세일럼 일대의 여러 이야기 파편들을 섞어가면서 세일럼 지방의 흑역사, 곧 ‘주홍글자’에 관한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그 잡동사니에서 “세월이 지나 닳고, 또 좀나방에 의해 거의 누더기가 된 주홍색 천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그 천조각에는 대문자 ‘A’가 찍혀 있었다. 이렇게 하여 간음 혐의를 받은 여성 헤스터의 충격적인 재판 이야기가 시작한다.
간음한 여인이라는 대문자 ‘A’라는 낙인에도 불구하고 누구와 통정했는지를 밝히지 않는 피고 헤스터 사건을 통하여 호손은 미국의 건국이념, 곧 ‘청교도 예외주의’가 무엇인가를 파고든다. 그것은 크게는 미국의 창세 신화를 거꾸로 흔드는 것이자 동시에 매사추세츠주의 명문 가문으로 통하는 호손 자신의 삶 자체를 문제 삼는 소설이 되었다.
★ 이 글은 2017년 12월 19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