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악덕 속에서 미덕을 찾고 시궁창에서 진주를 발견하고 산산히 부서진 삶에서 한 조각 반짝거리는 상처 입은 희망을 발견하는 ‘대중적인’ 작가를 소개한다. 대중적이라는 말에 일부러 ‘ ’를 달았다. 아마 당사자는 그런 표현을 싫어할지 모른다. 자신의 작품이 굳이 ‘대중적’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이유는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진지한 독자로서 나 또한 그의 넓고도 깊은 세계를 이런 따옴표에 가두기는 싫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공포 장르의 대가이고 이렇게 특정 장르 그 자체의 문법적 특징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을 일컬어 일종의 ‘대중소설’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므로 일단 이렇게 따옴표로 그를 특정해 본다. 상대적으로 이러한 소설에 대해 매우 너그럽고 그 시장이 그들의 대륙만큼이나 큰 미국에서조차 그는 종종 ‘대중소설가’라는 딱지에 대해 불편함을 표시해 왔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까지 했다.
“아무도 나를 우리 시대의 토머스 울프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결코 사기꾼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문학과는 대척에 있다고 생각한, 다시 말해 자신과 같은 대중소설가가 아니라 미국의 이른바 본격문학의 상징이라고 여겨 인용한 이름 ‘토머스 울프’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로 유명하다. 도대체 ‘미국’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울프의 주제였고 매우 낭만적이면서도 진지한 문체로 그는 그 주제를 심도 있게 다뤘다.
그러니까 이런 ‘정통적인 주제와 글쓰기’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기꾼도 아니라고, 이번 호에 소개할 작가는 단호히 말했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공항소설’ 정도로 여겼다. 공항의 구내서점에서 사서 비좁은 이코노미 석에서 빠르게 읽은 후 목적지 공항에 내릴 때 쓰레기통에 버리는 소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진짜 그렇게 비행기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읽으라고 쓴 소설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음모, 배신, 치정 등이 얽히고설킨 삼류소설의 별칭으로 그런 말을 쓴다. 19세기 중엽 철도교통이 일찍 발달한 프랑스에서는 이런 류를 ‘철도소설’이라고 불렀다.
그는 당신들이 내 소설을 비행기나 탈 때 읽든 말든 상관없으나 사기꾼 취급은 하지 말라고 응대했는데, 이 정도로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의미심장한 행동에 돌입한다.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소설가가 있다. 뉴욕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으나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뉴햄프셔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목장을 운영했고 밤이 되면 불면증을 이겨가며 글을 썼다. 리처드 바크먼은 1977년에 『분노』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994년의 『통제자들』까지 모두 6권의 작품을 남겼다. 문단에서는 새로운 작가의 출현이니 미국문학의 소생이니 하는 찬사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바크먼의 아들은 6살 때 우물에 빠져 죽었고 그 역시 1982년에 뇌종양이 발견되어 대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리처드 바크먼이 1985년에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된다. 병명이 고약하다. ‘필명 암’과 투병 끝에 죽었다는 것이다. 필명 암? 그런 병명이 있는가? 없다. 필명이라면 작가가 원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할 때 쓰는 이름 아닌가.
이제 사실을 말한다. 이제까지 ‘그’라고 말한 작가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은 물론 곧바로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공포소설 작가 스티븐 킹이다. 그가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가상의 작가를 만들어 이른바 ‘순수문학’ 애호가들에게 심각한 장난을 한 판 벌인 것이다. 자기가 마음먹고 쓴다면 얼마든지 ‘순수문학’을 쓸 수 있는데, 그럴 필요도 없고 시간도 없다, 다만 내가 사기꾼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겠다, 하는 마음으로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필명으로 일종의 ‘순수문학’을 몇 편 발표하였고, ‘필명 암’이라는 고약한 병명을 얹어 죽여버린 것이다.
1947년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스티븐 킹은 자신이 가짜로 만든 작가 리처드 바크먼처럼 힘겨운 성장기를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얘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임신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였으며, 외판원이었던 아버지는 담배 사러 간다고 집을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미 성장기에 단편소설을 써서 친구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메인대학을 마친 후에는 세탁공장 직원, 경비원, 영어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973년에 첫 작품 『캐리』를 발표하면서 일약 대중소설계의 스타가 된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이 작품은 단순한 공포소설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가 극도의 편협한 종교관에 빠져 사춘기 소녀 캐리를 돼지 피가 철철 흐르는 광기 어린 파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작품이다. 미국의 중산층 신화, 그 뼈대가 되는 기독교주의의 이면을 강타한 작품이다. 또한 롭 라이너 감독이 『스탠 바이 미』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든 중편 「시신the body」은 미국 정신의 상징이라고 하는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 같은 캐릭터가 알코올 중독에 매질이나 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하는 오늘날 미국 소도시의 파괴적인 가정에 환생하는 듯하다.
이것이 스티븐 킹의 세계다. 줄거리는 공포, 엽기, 추리, 살인 등등의 ‘비행기 소설’이지만 읽다 보면 미국 사회의 모든 윤리를 뒤흔들어 버린다. 나는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에서 양쪽의 모든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면서 스티븐 킹만의 독특한 세계를 드러낸 걸작으로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꼽는다. 역시 영화로 만들어져 크게 성공한 작품인데, 이 작품에서 킹은 미국의 절대적 가치인 ‘기독교 남성 가부장 가족주의’ 신화를 공격적으로 해부한다.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공포의 본질에 도전하는 킹에게 있어 시골마을의 삶이란 타락한 세상의 온갖 죄업을 뒤집어 쓴 불행한 운명들의 수난기가 된다.
이 소설의 ‘서문’은 1963년 여름 미국 북서부 메인주의 작은 해변 마을 샤보트와 리틀톨에서 발생한 놀라운 천체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샤보트에서 개기일식이 시작된 것은 오후 4시29분이었고, 리틀톨에서는 4시34분이었다. 개기일식이 메인주를 가로지르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3분이었다. 샤보트에서는 햇빛이 전혀 비치지 않는 암흑의 시간이 5시39분부터 5시41분까지 지속되었고, 리틀톨에서는 5시42분부터 거의 5시43분이 다 되어 갈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완전한 암흑이 지속된 시간은 정확히 말해 59초였다.”
59초 동안의 완전한 암흑!
“이 기묘한 어둠이 파도처럼 메인주를 가로지르는 동안 별들이 나타나 한낮의 하늘을 가득 채웠고, 새들은 보금자리로 돌아갔으며, 박쥐들은 굴뚝 위를 정처 없이 빙빙 돌았다.”
그리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소설의 마지막 지점에 가서야 모든 이야기의 대반전이 펼쳐지는 ‘장르소설’이므로 여기서 이 작품의 줄거리를 말할 수는 없다. 혹시 영화를 본 독자라면 어떤 이야기인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스티븐 킹이 정성껏 쓴 ‘서문’이 없다. 그러니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 이 글은 2017년 12월 12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