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전쟁 뉴스와 영화들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전쟁 무기와 호전적인 돌격 의지와 가슴 뭉클한 전우애를 강조하면서, 전쟁을 상당히 볼 만한 구경거리로 묘사한다. 전쟁을 멀리서 보면, 스펙터클 화면으로 보면, 대단한 광경이다. 저마다의 가슴속에 도사린 음험한 파괴의 욕망이 스펙터클의 대장관으로 펼쳐진다. 당장이라도 전쟁을 해도 좋을 것만 같다. 그러한 스펙터클은 위험하다.
2000년대 들어서서 제작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를 휘날리며』,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 장훈 감독의 『고지전』 등은 전쟁의 본질이나 그 속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당대적인 갈등이나 고통이 아니라 하나의 ‘장르 영화’로서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형제애나 전우애는 한국전쟁의 참담함보다는 그것의 오랜 이미지를 재현한 것에 그쳤다.
이러한 영화들이 전쟁을 하나의 스펙터클로 다룬 장르 영화에 그친 까닭은 감독들 개인의 인식의 한계나 부재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하나의 생존율이 된, 여전히 끝나지 않은 냉전의 압력 때문일 것이다. 전쟁에 대하여, 혹은 전쟁 이후의 강요된 침묵에 대하여, 그 후유증의 냉전적 유산에 대하여 제대로 말하고자 한다면 아예 영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아닌가. 그래서 막대한 제작비가 투여된 한국의 전쟁영화들은 전쟁의 본질 그 자체에 육박하기보다는 ‘형제애, 전우애, 모성애’에 몰두하게 마련이고, 그 감정을 과도하게 재현하기 위해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한 걸음만 더 들어가보면, 전쟁은 그 어떤 명분에도 불구하고 피가 흐르고 사지가 절단되고 비명소리가 넘쳐나는 지옥도일 뿐이다. 그 지옥도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다. 결코 멈추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다. 잊어본다고 애를 쓰지만 사회심리의 밑바닥을 지속적으로 할퀴면서 사람들을 극단의 감정으로 내몬다. 공포와 불안의 연대기! 이 한국 사회가 저 1950년 이래로 단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잔인한 트라우마전쟁 체험 세대이며, 뒤숭숭한 일상전후 세대이다.
그래서 소설가 한강은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 ‘미국이 전쟁을 언급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에서 “수십 년간 쌓인 긴장과 전율이 한국인들의 깊숙한 내면에 숨어 단조로운 대화 속에서도 갑자기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고 썼다. 1950년의 전쟁이 지금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우리는 평화가 아닌 어떤 해결책도 의미가 없고, 승리는 공허하고 터무니없으며 불가능한 구호일 뿐이라는 걸 안다”고 한강은 강조했다.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전쟁을 스펙터클도 아니고 남성들의 영웅담도 아니고 그들만의 전우애도 아닌 관점에서 접근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그것이다. 이른바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 즉 오랫동안 수백 명을 인터뷰한 기록을 최소한의 편집과 배열을 통해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제시하는 것이 그의 창작 방식이다. 이 소설(또는 이야기 형식의 논픽션)을 펼치자마자 수많은 목소리들, 그 오랜 한숨과 신음과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온다.
2차 세계대전, 러시아에서는 ‘조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그 증오와 파괴와 영웅 미담의 현장에 참전했던 무려 100만여명이 넘는 여성들, 그들에게 전쟁이란 무엇인가. 알렉시예비치는 그 중 200여명의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남성들의 격전장이다. 그들이 선전포고하고 그들이 돌격하고 그들이 총을 쏜다. 그러나 현실로 보면 전투를 하기 위한 어떤 경기장이 따로 있어서 그 안에 모여서 남성끼리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들이 전투 개시한 전쟁에 여성들이 가장 처절하게 희생을 당한다. 모든 전쟁의 최후의 패배자는 여성이다. 그것은 승전과 패전의 여부와도 상관이 없다. 이 소설의 200여명은 이른바 ‘조국전쟁’에 참전한 여성들이다. 총을 들고 달리기도 했고, 탱크를 몰기도 했고, 야전병원에서 온갖 비명소리를 참아내며 긴급 구호를 했던 여성들. 그러나 전쟁 이후 그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국가는 ‘영웅 미담’ 외의 모든 사안에 대하여 침묵을 강요했으며, 더 중요하게는 사선을 넘어 간신히 귀향했을 때 그 마을이, 부모가, 자매가 전쟁의 기억을 억눌렀다. 그래야만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소설 속의 이야기, 잔인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러시아 여성들이 수십 년 동안 마음속 깊숙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전투가 끝나면 사람들 얼굴을 쳐다보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았어. 다들 평소에 보는 보통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완전히 딴 얼굴이 되어 있었으니까. 서로 눈을 피하는 거야. 나무도 똑바로 못 쳐다보고. 서로 가까이 가려고 하면 그러지.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아……’ 그게 무엇이었는지 표현할 방법이 없어. 조금씩 정신이 나갔다고들 해야 할까. 짐승 같은 뭔가가 번뜩였다고 할까.”(280쪽)
일상의 자잘한 일에서조차 전쟁의 잔혹한 기억이 소스라치게 떠오른다.
“난 들꽃을 보면 전쟁이 떠올라. 전쟁 때 우리는 꽃을 꺾지 않았어. 꽃을 꺾는다면 그건 누군가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였지. 작별을 고하려고.”(252쪽)
그래서 전쟁의 상흔을 마음에 묻고 살아온 여자들은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줄 때조차 흠칫 놀라게 된다.
“나는 장난감 무기가 싫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무기 있잖아. 탱크니 총이니. 대체 누가 그런 걸 만들지?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데. 나는 그런 장난감은 사본 적도 없고 아이들에게 선물해본 적도 없어. 우리 애들이건 남의 집 애들이건. 어느 날 누가 우리집에 장난감 전투기와 플라스틱 총을 가져왔더라고.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지.”(589쪽)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는 부제가 달린 이 소설의 서문은 본문의 쓰라린 상처들만큼이나 읽기가 힘들다. 수많은 참전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받았다. 소설가는 그들을 방문하고 설득하고 오랜 시간 기다려서 간신히 몇 마디를 듣게 된다. 몇 시간을 얘기해도 약간의 상처, 무훈담, 한숨과 냉소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전쟁 때의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다”고 결심한 참전 여성들이 마침내 수십 년 동안 가슴 깊이 숨겨놓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 순간을 소설가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엇을 통해서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온다. 석고나 콘크리트 기념상처럼 단단한 껍데기 속에 있던 사람이 그 껍데기를 깨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순간이. 자신의 내면으로 걸어들어가는 순간이. 그리고 그 사람은 이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젊은 날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의 굽이굽이들을…. 바로 이 순간을 잡아야 한다. 놓쳐선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읽어야만 한다. 전쟁은 결코 뉴스 화면 속의 압도적인 군사무기들이나 전쟁영화의 제법 그럴 듯한 전투장면들이 아니다. 인간의 인간성이 최후의 한줌까지 파괴되는 것이 전쟁이다. 이 소설이 그 증거다.
★ 이 글은 2017년 10월 24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