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시간의 압력을 견뎌낸 위엄 있는 책들의 ‘서문’을 소개하는 게 목적이다. 두툼할 뿐더러 어렵기까지 한 책을 여간해서는 다 읽어내기가 어려우니 우선 그 ‘서문’이라도 탐독하여 서권기를 느껴보자는 의도인데,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저자들은 ‘서문’을 공들여 쓰지만 그 앞에 ‘헌사’獻詞나 ‘제사’題詞를 더하기도 한다.
헌사는 힘겨운 집필과정 동안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사람을 기억하거나 그 책을 누군가에게 존중의 마음으로 바치는 행위다. 근대 이전의 저자들은 주로 왕이나 귀족에게 헌사를 바쳤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책을 메디치 가문의 학정과 수도승 사보나롤라의 도덕정치의 파탄 그 이후 전개된 피비린내 나는 르네상스 피렌체 권력투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시기에 썼는데, 그 앞머리에 당대의 권력자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치는 헌사를 달았다.
근대정치학의 비조가 되는 이 책의 헌사에서 그는 왜 권력자가 이 책을 탐독해야 하는가를 여러 측면에서 밝힌다. ‘운명’fortuna, ‘능력’virtu 같은 그의 정치사상의 키워드가 헌사에서부터 등장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의하여 ‘부당한 학대’까지 받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심각한 불운까지 소상히 적는다.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 그 뜻을 새기시면 저의 깊은 소망, 즉 전하께서 운명과 전하의 탁월한 능력이 약속하고 있는 깊은 위대함을 성취하셔야 한다는 뜻을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전하께서 그 높은 곳에서 어쩌다 여기 이 낮은 곳에 눈을 돌리시면, 제가 엄청나고 잔혹한 불운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부당한 학대를 겪고 있는가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이 정도가 아니더라도, 저자들은 종종 헌사를 붙인다. “어머님께 바칩니다”,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에게”, “제프리를 기억하며” 등등. 독자로서는 누군인지 알 길이 없으나 그래도 그런 헌사를 보게 되면 반큰술 정도의 애틋한 마음이 든다.
제사는 저자가 자기 책의 가치와 의미를 담은 유명한 경구, 시, 속담, 성경 구절 등을 제시하는 것이다. 위의 마키아벨리 『군주론』은 서강대 강정인 교수의 번역본에서 인용한 것인데,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 정치상황과 피렌체의 풍속은 물론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정치철학의 흐름을 꿰뚫어야만 번역이 가능한 이 고전을 공들여 번역한 후, 역자 강정인은 맨 앞에 “이 책을 연로하신 부모님께 바친다”고 헌사를 쓴 후 『논어』 ‘里仁’ 편의 한 구절을 제사로 덧붙였다.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가 그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모의 연세는 평소에 알고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오래 사신 것이 기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오래 사셨으니 부모를 섬길 수 있는 시간이 적어지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꼼꼼히 공부해온 학자의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읽은 제사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오래 전에 읽은 추리소설의 맨 앞에 붙은 문구였다. 80년대에 몇몇 출판사에서 문고판 추리소설을 많이 출간했는데 그 중 어느 책에서 보았으나 아쉽게도 서재 정리를 몇 차례 하면서 문고판 추리소설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바람에 어느 작품인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혹시 기억하시는 독자가 있다면 알려주시기를. 그 작품의 제사는 다음과 같다.
“인간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개를 존경하게 된다.”
이번에는 도스토옙스키 차례다. 이 연재 과정에서 이 거대한 소설가의 위엄 있는 작품들이 몇 번 더 등장할 것이다. 『백치』며 『악령』이며 『죄와 벌』의 인간들. 특히 『카라마조프카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온갖 선과 악의 인간들 말이다. 그의 소설에는 ‘모든 인간’이 다 들어 있다. 무오류의 고결한 완성된 인간이 있는가 하면, 파렴치범에 악한도 있다. 인간의 추악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삼소노프 같은 사람과 그 반대의 위엄 있는 고뇌를 보여주는 조시마 장로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공존한다. 그 사이, 선과 악의 경계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방황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며 ‘상처받은 사람들’인 그들은 무시무시한 ‘악령’에 사로잡혀 끝내 ‘죄와 벌’의 형극으로 치닫는다.
며칠 전에 수전 손택의 인터뷰집 『수전 손택의 말』을 읽었다. 명민할 뿐더러 모든 기존의 가치에 여지없이 상처를 낸 날카로운 비평가 손택은 모든 독서가가 그렇듯이 수차례 도스토옙스키의 고전을 읽었다. 손택은 이 인터뷰가 있던 시기에 또 읽었는데, 그때가 45살 무렵이다.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2년 전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었는데 10대 때와 다름 없는, 아니 심지어 더 큰 감동을 받았거든요. (중략) 그 책을 읽은 뒤로 몇 주일 동안 날아다니는 기분이었어요.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이제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알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읽은 뒤로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열일곱 살 때와 정확히 똑같은 감흥이 느껴지더란 말이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읽을 때 나이를 불문하고 항상 무엇인가를 전달해주는 그런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독서의 희열에 흠뻑 젖었지만 실은 손택은 치명적인 병에 사로잡혀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의 와중에 있었다. 백혈병과 싸우면서 자신의 병이 지닌 사회적 맥락을 분석한 『은유로서의 질병』을 쓰면서 동시에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제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알 것 같아!” 하는 깊고 깊은 독후의 충일감에 사무쳤던 손택의 고백이다. 이런 작품이니, 이 연재에서 앞으로 몇 번 더 도스토옙스키가 나오더라도 양해해주기 바란다.
이번에는, 그의 제사 얘기만 하겠다. 도스토옙스키는 매번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소설 앞에 제사를 곧잘 붙였다. 대개는 성경 구절인데, 어떤 경우는 해당 소설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대번에 느끼게 하는 시를 써넣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 맨 앞에 그는 아마도 당대의 러시아 인물이었을, 오도예프스키 공작의 문구를 인용하였다.
“오오, 나는 이 글쟁이들에게 정말 질려 버렸다. 유익하고 즐겁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은 도무지 쓰려 들지 않고 땅속에 숨겨진 온갖 더러운 비밀만 캐고 있다. (중략) 그런 글을 읽고, 자기도 모르게 망상에 잠기고, 말도 안 되는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정말이지, 그런 자들에겐 글을 못 쓰게 해야 한다. 정말 한 줄도 못 쓰게 막아야 한다.”
이 연재의 독자라면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그런 글, 즉 인간의 ‘온갖 더러운 비밀’을 지금 막 써서 추악한 세상에 투척하고 있는 중임을! 하나 더 있다. 그가 여러 대작에서 성경 구절을 자주 제사로 쓰거니와 『악령』이 그러하고 또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러하다.
이 위대한 소설의 맨 앞에 도스토옙스키는 성경의 ‘요한복음’ 12장 24절, 즉 아래의 문구를 제사로 썼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인간사 모든 고뇌와 갈등과 욕망과 파멸이 담긴 태산장강 같은 중후장대한 소설의 주제가 이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
★ 이 글은 2017년 10월 17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