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귄터 그라스의 자전적 기록 『나의 세기』는 그가 다중 화자 기법으로 20세기의 역사를 재구성한 일종의 집단 초상화다. 엄밀하게 자서전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따로 있다. 2006년에 출간되어 독일은 물론 유럽을 뜨겁게 달군 작품으로 국내에는 2015년에 번역 소개된 『양파껍질을 벗기며』가 그것이다.
양파껍질을 벗긴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탐문하기 위해 자기 삶의 껍질을 하나씩 다 벗기는 것이다. 자기만 침묵하면 아무도 모를 일을 고심 끝에 벗기다 보면 그 자신이 가장 먼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양파껍질을 벗기다 보면 눈물이 나게 마련이다. 깊은 참회와 고통을 감내하며 양파껍질을 벗기고 나면 세상의 반응은 찬반의 격렬한 극단으로 나뉘고 만다. 우선 그 서문을 잠시 읽어보자.
“모든 게 뒤집혀 버릴 수 있다는 불안이 나를 침묵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언제나 손에 잡힐 듯한 저 흔하고 흔한 양파, 기억이 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양파의 여섯 번째 혹은 일곱 번째 껍질에서 발견되는 자그마한 불명예다. 그러므로 나는 불명예에 대하여 그리고 그 뒤를 절룩거리며 따라오는 부끄러움에 대하여 기록하기로 한다.”
이 서문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게 뒤집혀 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이다. 침묵한다면 별일 없겠으나 양파껍질을 벗기고 나면 작가로서 평생 쌓아올린 명예가 뒤집혀 버릴 수도 있는 불안, 그것을 그라스는 이겨내고자 했다. 그 ‘자그마한 불명예’란 무엇인가.
2006년 8월 12일, 귄터 그라스는 독일의 저명한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와의 인터뷰 및 그로부터 한 달쯤 후에 출간된 자서전에서, 자신이 17살 때 나치 무장 친위대에서 복무했음을 고백하였다. 15살 때 잠수함 부대에 자원했다가 나이가 어려서 거절당한 후 1944년에 무장 친위대 소집명령을 받고 드레스덴에 배치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몇 개월 동안 근무했다는 것이다. ‘자그마한 불명예’가 벌어진 지 62년이나 지난 후의 고백이다.
우연한 일치지만, 그가 기자회견과 자서전을 통하여 나치 전력을 고백하던 때는 독일 전역에서 월드컵이 개최되고 있었다. 이 대회는 적어도 독일인들로서는 집집마다 독일 국기를 내걸고 자신들의 국호를 맘껏 외치고 공공연히 국가를 불러도 되는 집단 세리머니였다. 전후 독일 때는 물론이고 통일 독일 이후에도 누군가가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부르면 나치 추종자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통일 독일 전후로 태어난 젊은이들은 ‘오래 전’ 할아버지 세대가 저지른 전쟁범죄 때문에 21세기에 와서도 자기들의 국기마저 제대로 흔들어보지 못하는 상황에 짓눌려 있다가 거의 생애 처음으로 경기장과 거리와 광장으로 나가서 국기를 흔들고 국가를 불렀다. 나는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대회의 우승은 이탈리아였다. 박치기 사건으로 유명한 지단의 프랑스가 2위. 독일은 포르투갈을 누르고 3위를 차지했다. 황색 언론이라고 비판도 받는 일간지 『디 벨트』는 “피파컵은 이탈리아가, 진정한 챔피언은 독일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전쟁과 분단 그리고 통일 이후의 극심한 혼란을 치른 독일이 월드컵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귄터 그라스는 나치 전력을 고백했다. 역시 같은 시기에 독일 튀빙겐대학에 머물고 있었던 연세대 독문과의 김용민 교수는 「고백을 통한 과거 극복」에서 현지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한 바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그라스는 각종 전쟁범죄와 무엇보다 유태인 수용소에서의 대학살을 주도한 나치 친위대에 복무한 것은 사실이다. 이 부대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범죄단체로 규정되었다.
『양철북』을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그리고 독일과 유럽의 각종 사안들, 특히 이라크 전쟁이나 팔레스타인 사태 같은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대문호 그라스가 친위대원으로 복무했었다는 사실, 그것도 팔순이 되어서야 고백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노벨상을 반납해야 한다는 비판과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한 용기라는 찬반양론 사이의 거리는 멀었고, 두 극단 사이에 여러 의견이 격하게 표출되었다. 체코와 폴란드 그리고 각종 사회단체들 특히 유태인단체들이 비난성명을 냈다. 문제적 다큐멘터리 『히틀러』1977년로 유명한 전기작가 요아힘 페스트를 비롯하여 샐먼 루시디, 페터 한트케 같은 작가들은 그라스를 옹호했다. 폴란드의 전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레흐 바웬사는 그라스에게 1993년 수여한 그단스크그라스의 고향으로 옛 이름은 단치히 명예시민증을 반납하라고 요구했다.
정작 그라스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는 자서전에서 “어떻든 나는 수십 년 동안 그 단어와 두 글자SS, 즉 친위대를 고백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내 젊은 날에 어리석은 우쭐함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나는 전후에 점점 커져가는 부끄러움 때문에 침묵하고자 했다. 하지만 부담감은 남아있었고, 그 누구도 그것을 덜어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단스크 시장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무장 친위대가 저지른 전쟁범죄가 끔찍한 정도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후의 몇 년 몇십 년간을 저는 부끄러움 때문에 제 젊은 시절의 이 짧았던, 그러나 부담스러운 에피소드를 혼자 간직하였습니다. 하지만 잊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그에 대해 좀 더 커다란 맥락에서 말할 수 있는 형식을 찾아냈습니다. 제 행동 때문에 그단스크의 많은 시민들이 저의 명예시민권을 문제삼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질식한 듯 황폐한 도시의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 도시의 그런 환경의 아이들은 적어도 성장기의 몇 해 동안은 낯설고 거대한 세계를 동경하고 보다 강력한 힘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평화기에는 매력적인 연예인이나 뛰어난 운동선수가 롤모델이지만 광기의 전쟁기에는 제복을 입는 게 선망이 될 수 있다.
그라스는 예술적 감수성과 명민한 두뇌를 가진 소년으로 “열 살 소년 시절에 이미 한스 발둥과 그뤼네발트, 프란스 할스와 렘브란트를, 그리고 필리포리피와 치마부에를 한눈에 구분”할 수 있었으나, 강력한 힘이 압도하는 전쟁의 시대였다. 소년은 잠수함과 제복에 매료되었고 친위대원이 되었다. 그는 총 한 번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전쟁을 마쳤으며, 더 커서는 자신의 참전 사실과 전범국가 독일의 혼란 사이를 헤매며 소설을 썼고, 마침내 『양철북』의 작가가 되었다. 이 시기에 태어난 수많은 독일인들이 그라스와 같은 광기의 성장기와 혼돈의 청년기를 보냈고, 전쟁 후에는 나누어진 하늘분단 아래에서 저마다의 ‘불명예’를 양파껍질 속에 숨기고 살았다. 노작가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양파껍질을 벗겼다.
그가 참회의 자서전을 발표한 그해 여름, 독일의 여러 도시는 월드컵을 자축하는 시들이 곳곳에 나붙어 있었다. 귄터 그라스의 ‘공은 둥글다’도 도시에 붙어 있었다. 그의 생애와 독일의 현대사를 압축한 그 시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나의 공은 찌그러져 있다 / 어렸을 때부터 누르고 또 눌렀지만 / 공은 한쪽으로만 동그래지려고 한다.”
★ 이 글은 2017년 8월 22일자 주간경향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