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처음 읽었을 때, 짧고 정갈한 글쓰기가 인상적이었다. 적확한 단어를 공들여 선택함으로써 명료하고 간결한 문장임에도, 정성껏 독해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말들을 존중하고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 경제적인 글쓰기의 고전적인 사례 같았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평범한 일상에서 보여주는 사소한 온기가 조용히 쌓여갔다. 산문시 같은 서사가 끝날 무렵이면 사소한 선의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말하는 시적 언어의 무게에 공감하게 된다. 이번에 읽게 된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사소한 온기는 사회적 책무로까지 확장된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이 작품의 첫 문장이다.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을 따름인데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갔다고? 아일랜드에 서머타임제가 있는지와 같은 사소한 질문을 재미삼아 챗GPT에게 물어보았다. 챗GPT가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아일랜드에서 서머타임Day Saving Time은 해가 길어지는 3월에 시작하여 10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끝난다. 그래서 11월이 되면 원래대로 한 시간을 뒤로 당기게 된다.’ 심지어 ‘이 문장은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온다’고 친절하게 덧붙여준다. 챗GPT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할 일만 남은 듯하여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쨌거나 서머타임이 끝난 11월부터 해는 짧아지고 밤은 깊어진다. 게다가 헐벗은 나무에 차가운 겨울비까지 내리는 11월이다. 겨울비로 검푸른 강물은 부풀어 오른다. 혹독한 겨울, 혹독한 시절이 될 것처럼 보인다.
빌 펄롱은 일꾼 몇 사람을 거느리고 장사하는 석탄 배달 상인이다. 때는 1985년이고 곳은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 뉴로즈다. 마흔을 목전에 둔 지금 그는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을 둔 가장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미혼모의 아이였고 사회적으로 버려진 존재였던 그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일머리가 있고 근면 성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술을 즐기지 않은 습관 덕분이었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행운도 따라주었다.
펄롱은 엄마가 하녀로 일하는 윌슨 부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때 엄마의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그 시절 미혼모는 타락한 여자로 여겨져 온 동네가 손가락질하는 수치의 대상이었다. 윌슨 부인은 가족마저 저버린 미혼모를 해고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거두어주었다. 펄롱이 열두 살 되던 해 엄마마저 뇌출혈로 졸지에 세상을 떠났다. 고아가 된 펄롱에게 윌슨 부인은 기댈 언덕이 되어 주었다. 펄롱은 ‘누구나 어휘를 갖춰야 한다’고 믿는 부인에게서 글도 배우고 잔심부름도 하면서 잔뼈가 굵어졌다. 펄롱은 사생아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멸시와 괴롭힘을 당하지만 윌슨 부인 덕분에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다. 부인의 선의는 고아가 된 펄롱에게 주어진 행운이었다.
1985년 아일랜드의 경기는 얼어붙었다. 어디서나 해고의 칼바람이 불었다. 자본의 횡포가 몰고 온 재난 앞에서 탄광도, 조선소도, 식당도, 꽃가게도 문을 닫았다. 젊은이들은 뉴욕, 시카고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긴 줄이 늘어섰다. 사회적 돌봄은 부재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펄롱은 이처럼 가혹한 시절 자신이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그는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조용히 엎드려 살면서 다섯 딸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기독교인이라면 생각이 많아질 무렵이었다. 광장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합창에 참여한 여학생들을 관리 감독하는 수녀들은 ‘잘사는’ 학부모들과 인사를 나눴다. 펄롱은 아내 아일린과 함께 딸들의 관심사에 맞춘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고자 했다. 그는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나 직소 퍼즐을 소망했지만, 윌슨 부인으로부터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해졌다.
생각은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법이다. 아내와 딸들과 단란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펄롱은 자신을 돌아보거나 이웃을 쳐다볼 겨를이 없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배달과 주문, 돈 문제에 골몰하다가 캄캄한 밤중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일린 또한 집안일에 파묻혀 지냈다. 아일린이 딸들과 함께 크리스마스용 민스파이를 준비하는 과정은 레시피처럼 자세하게 묘사된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장만하고 나면, 재빨리 식탁을 치워야 다림질을 할 수 있다. 이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하루하루의 일들로 인해 아일린은 잠시나마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녀에게 남들의 사정을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사치이자 낭비였다.
강 건너편 언덕에 있는 수녀원은 이 도시를 압도하면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수녀원으로부터 땔감 주문이 빈번해졌다. 펄롱에게 수녀원은 현금으로 꼬박꼬박 결제해 주는 좋은 거래처였다. 올해도 그는 석탄을 싣고 수녀원으로 향했다. 수녀원 주변의 오래된 나뭇가지 위에는 까마귀 떼들이 자리를 잡고 극성스럽게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뻔뻔한 까마귀 떼들 또한 나중에는 고양이의 사냥감이 된다.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는 누구일지 궁금해지는 풍경이었다. 수녀원의 담장 꼭대기 위로 솟아 있는 뽀족뽀족한 유리 조각들은 내려 쌓인 눈으로도 전부 감춰지지 않았다. 유리 조각들은 수녀원 담장 안과 바깥을 삼엄하게 갈라놓았다. 수녀원이 날카롭게 감추고 싶은 비밀은 무엇일까?
배달을 나갔던 펄롱은 수녀원에서 마주친 여자아이들의 충격적인 모습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하지만 아일린은 세상 물정 모르는 펄롱의 감상적 태도에 일격을 가한다. 함부로 몸을 굴리면서 ‘사고 치고 되바라진 여자애들은 있기 마련이잖아.’ ‘그건 당신도 잘 알 텐데.’라는 말이 펄롱의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펄롱은 윌슨 부인이 없었더라면 자기 엄마도 그런 여자아이들 처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곱씹는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시즌 아닌가. 펄롱은 오로지 자기 아내와 딸아이들을 보호하는 닫힌 세계 이외에 달리 무엇이 더 있을까, 라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식당 주인 케호 부인이 펄롱에게 주의를 주었듯, 이 도시에서 수녀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장사든, 교육이든 수녀원과 척지고서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딸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다면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여학교에 보내야 한다. 수녀원에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직업학교와 세인트마거릿 여학교가 붙어 있었다. 말이 직업학교지 모자보호소이며 미혼모와 아기들을 수용하는 수감시설이라고들 수군거렸다. 동네 사람들은 더럽혀진 여자아이들이 세탁물에 묻은 얼룩을 지우듯, 영혼의 얼룩을 깨끗이 씻어내면서 속죄를 하는 곳이 직업학교라고 믿고 싶어들 했다. 수녀원은 사생아로 태어난 아기들을 부유한 나라로 입양 보내고 그로부터 상당한 돈을 챙긴다고 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하층 계급의 여자아이들과 잘사는 부모를 둔 여자아이들을 갈라놓는 경계선이 직업학교와 여학교였다. 얼룩 묻은 여자아이들은 희생양으로 삼고, 중산층 여자아이들은 안정된 기존 질서 속에 머물도록 감시 감독하는 것이 수녀원의 역할처럼 보였다.
광장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였다. 동정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놓여 있었고 그 앞에서 동방박사들이 경배하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는 미혼모들의 대모는 아니었을까? 펄롱은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119쪽)라는 자기성찰에 빠져들었다. 수녀원의 석탄광에서 마주친 여자아이 세라에게서 자기 엄마를 보고 펄롱은 처음으로 자신이 뭔가 행동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가슴 속에서 설명하기 힘든 기쁨이 솟았다. 대단찮은 자기 삶에서 지금처럼 행복감을 맛본 적은 없었다. 자기 안에 또 다른 밤들을 밝혀줄 빛나는 모습이 바깥으로 발산되는 것 같은 환희에 사로잡혔다.
펄롱에게서 윌슨 부인이 보여준 선의의 DNA가 깨어난다. 사소한 것들이 쌓여서 형성된 선의의 도약대로 인해 그는 한순간 존재의 비상이 가능해진다. 이 일로 인해 자신에게 최악의 상황이 지금부터 시작될 것임을 알지만, 버림받은 타자들이 곧 자신이므로, 타자의 구원이 곧 자신의 구원임을 섬광처럼 깨닫는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타자를 외면했던 죽음 같은 삶에서 자기실현으로 비상하는 실천에 이른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실린 「덧붙이는 글」에 따르면 수녀원이 운영한 세탁소 막달레나의 집이 폐쇄된 것은 1996년이었다. 그곳에 감금되어 강제 노역을 한 여자와 아이가 일만 명인지 삼만 명인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세탁소 기록은 대부분 파기되거나 분실되어 더 이상 접근이 불가능했다. 막달레나의 집은 가톨릭교회가 아일랜드 국가와 함께 운영한 것이었다. 아일랜드 정부가 공식적으로 국가의 인권유린에 관해 사과한 것은 늦은 2013년이었다. 그나마도 막달레나의 집을 경험한 실존 인물인 시니어드 오코너Sinéad O’Connor의 고통스러운 증언이 없었더라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수도원 담장 너머로 퍼져 나와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펄롱의 사소한 선의가 부패한 기득권과 공모하는 것을 정당화해 온 생존 철학에 균열을 가한다. 개인이 지배질서에 저항함으로써 사회변혁을 모색하는 것은 19세기적 사실주의 소설이 즐겨 다뤘던 영웅 서사였다. 크리스마스에 인류애를 설파하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이야기로 넘쳐나는 무성한 여름 나무라고 한다면, 『크리스마스 캐럴』의 여성적 판본인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잎사귀를 전부 떨군 겨울나무다. 뼈대와 모세혈관이 전부 드러난 겨울나무의 해부학을 통해, 누구의 등골 위에서 우리의 안락한 삶들이 유지되고 있는지 이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공적 정의라는 것이 영웅적 투쟁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개인적 용기에서부터 실현 가능하다는 점을 나직하고 간결한 목소리로 작가는 설득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짧은 장편은 고전적인 사실주의의 계보를 계승한 것처럼 진귀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