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수당 없고 식비와 차비는 별도로 지급되지 않으며 근무 중 다쳐도 회사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달 이 내용으로 계약서를 갱신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회사를 언제든 그만둘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건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 황정은, 「디디의 우산」『파씨의 입문』, 창비, 2012, 171쪽
황정은 소설 「웃는 남자」1)는 이 가혹한 ‘자유’의 세계를 온몸으로 살아내는 프레카리아트2)들과 그들의 윗세대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d와 dd, 비비, 씨씨, 케이, 제제, 피비…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이니셜로만 호명되는 이 인물들은 택배 수거·상차 노동자, 창고형 매장 계산원, 길거리 좌판 행상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정규직의 안정된 직장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닥치는 대로 여러 일을 전전하며, 조금이라도 조건이 낫다면 언제든 다른 직종에 뛰어들 수 있는 불안정 노동청년들이다. 이들의 부모세대 역시 손끝의 기술 하나로 근근이 식솔을 챙기며 생계를 유지해 온 기술자·목수, 좌판 하나로 생계를 떠안은 생선 장수 등이다. 가난은 유전자에 이미 각인되어 있다는 듯, 소설은 제도로부터의 배움이 짧고 매사 주눅 든 채 살아가는 사람들 ─ 윗세대와 아랫세대 ─ 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대체로 우울하며 의기소침하다. 무뚝뚝하고 때로는 불친절하거나 거칠다. 이들에게는 유독 가난, 불가사의한 사고, 불행이 자주 선물처럼 주어진다. 이들에게 희망, 꿈, 행복, 사랑 따위의 단어는 낯간지러울 뿐이고, 아름다운 운율이나 환상적인 그림들은 범접하기 어려운 사치에 불과하다. 멀고 낡고 오래된 다세대 연립주택의 부모세대와 옥탑방, 반지하, 혹은 고시원을 주거지로 전전하는 청년세대 들의 삶은 오염된 공기, 거리의 소란과 잡음을 배음으로 하는 황폐하고 비루한 삶이다.
여기 d가 있다. 그에게 세상은 환멸 그 자체. 최초로 함께 ‘행복’이라는 것을 꿈꾸었던 연인 dd가 급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 그것도 d의 바로 곁에서, 빗길에 미끄러져 충돌한 승합차에 의해 마치 핀셋으로 콕 집어낸 것처럼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이 사고와 함께 d 역시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행복이라는 상상으로부터 패대기쳐진다. 자책과 절망, 회한과 우울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경멸하며 거식증자가 된 히키코모리 d(「웃는 남자」 전편)를 작가는 다시금 일으켜 세워 새 직업을 부여하고 낯선 공간에 부려놓는다. 암굴과도 같던 지하 셋방에서 꺼내어 고시원에 거주하게 하고, 공항 화물센터에서 식기세척하는 일 대신 세운상가에서 택배 상차와 화물 수거하는 직업을 부여함으로써 상가 주민들과 교류할 통로를 열어놓는다. 이로써 작가는 d에게 은둔에서 떠돎으로, 혐오에서 관심으로, 침묵에서 대화로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을 부여(「웃는 남자」후편)한다.
1) 「웃는 남자」 는 「디디의 우산」(『파씨의 입문』, 창비, 2012) 과 「웃는 남자」(『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웃는 남자」( 『웃는 남자 ─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은행나무, 2017) 의 연작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2016년 작품을 ‘「웃는 남자」 전편’으로, 2017년 작품을 ‘「웃는 남자」 후편’으로 표시하였다.
2) '불안정한'이라는 의미의 프레카리오(이탈리아어: precario)와 노동 계급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트(독일어: proletariat)의 합성어. ─ 편집자 주
작가는 왜 세운상가를 배경으로 선택했을까? 세운상가는 한때 세계의 기운이 운집한 곳世運이라는 찬사와 함께 최초·최고·최신의 주상복합건물로 명성을 날리던 곳. 그러나 질주하듯 빠르게 전개된 산업화로 인해 퇴물로 영락한 문제적 공간이다. 이곳엔 값싼 임대료 때문에, 수리를 의뢰하는 옛 고객들을 위해, 오래되어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는 제품을 찾는 구매자 때문에… 같은 이유로 40년 이상을 버텨 온 영세 상인들이 있다. 이들은 속도를 놓치거나 뒤처져서 여기에 남게 되었다. 세운상가와 상인들이라는 조합의 상징성을 물려받은 청년층이 프레카리아트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미래와 빤하게 연결된 현재, 이상에 이르지 못하는 실재, 비대하고 멋대가리 없는 외형, 시대의 돌봄을 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 알아서 먹고살며 시대를 이루었고 이제 뒤꽁무니에 남은 사람들, 아 사기꾼들, 여소녀 자신을 비롯한 거짓말쟁이들, 그것도 조그맣고 하찮은 스케일의 사기밖에 칠 줄 몰라 여전히 보통사람으로 여기 남은, 내 이웃들…… 여소녀가 이해하기로는 그것이 세계의 기운이었다. (「웃는 남자」 69쪽)
소설은 ‘다시 세운’이라는 이름의 도시재생프로젝트를 앉아서 ‘구경당하는’ 음향기기 수리업자 여소녀의 입을 통해 정부 주도 프로젝트의 허점을 파헤친다. 그는 세운상가가 생길 때부터 여태까지 이곳에서 영락榮落을 함께한 60대 후반의 노인이다. 이 노인이 보기에 재생사업은 ‘음모이자 꿍꿍이일 뿐’. 공적 기관의 프로젝트는 언제나 ‘나’를 소외시킨다. 맥락 없는 재생사업이다. 청계천을 사이에 둔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잇고, 그 위를 사람들이 오가게 만들어 도심에 활력을 부여하고, 기술자를 발굴하여 세운상가 일대를 새로운 명소로 재정비하겠다는 계획에 여소녀 같은 영세상인은 배제되어 있다. 물론 사람이 늘고 상권은 형성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임대인들은 즉시 세를 올려 받으려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은 축출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될 것이다. 실제로 2017년 완공된 ‘다시 세운’에 관한 신문기사는 여소녀의 염려가 덜떨어진 푸념이 아님을 증명해 보인다.
다시 세운 세운상가… 상인들은 임대료 인상 우려에 '시름'
월 임대료 최대 50% 상승… “와보지도 않고 세 올려달라 한다”
방문객 많아졌지만… 도매·전문업체 위주라 매출 상승 기대 낮아
─ 박초롱 기자, 다시 세운 세운상가…상인들은 임대료 인상 우려에 '시름', 연합뉴스 2017년 9월 25일
여소녀 입장에서 ‘다시 세운’은 ‘다시, 세稅 (때문에) 운’ 마지막 일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여소녀를 한 번이라도 웃게 해 준 것은 d라는 젊은이다. d 또한 여소녀를 통해 음악과 만나고, 옛날 dd와의 소박하지만 단란하고 휴식 같았던 생활을 떠올린다. dd의 옛 물건들을 되찾고, dd가 읽던 책의 주인을 찾아가고, 책 주인과 함께 세종대로 사거리를 걷던 d는 우연히 자신과 처지가 같은 군중들의 간절한 외침을 목도하게 된다. d는 거기에서 느꼈던 진공을, 문득 흐름이 사라진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내고 동질감을 느끼며, 그들의 오랜 싸움이 ‘하찮음’에 저항하는 몸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d는, 사람은 사라지고 물건들만 쌓인 거대한 창고 세운상가가 소리를 모으고 걸러내는 거대한 진공관이 되는 듯한 기이한 경험을 한다. 잡음을 집적하고 걸러 소음을 소리로 전환할 수 있는 곳, 금방 부서질 듯 낙후되었지만 견고한 건물 속에, 거칠지만 놀랍도록 다정한 이웃들이 존재하는 곳이 d가 느끼는 세운상가다. 하므로 d에게 그곳은, 지난날 dd와 공유했던 것과 같은 아련한 기억, 환멸 아닌 희망이 가능한 세상을 얼핏 느낀 것 같기도 한 ‘오래된 미래’이다. 이런 상상은 세종로 사거리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일련의 화음들로 연결된다.
이것이 혁명이로구나. d는 생각했다. 우리는 우회한 것이 아니고 저 차벽이 만들어낸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 찌꺼기처럼 여기 도착했구나. 혁명은 이미 도래했고 이것이 그것 아니냐고 d는 생각했다.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 격벽을 발명해낸 사람들이 만들어낸 혁명…… (「웃는 남자」 93쪽)
21세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성숙을 자부하고 4차 산업혁명의 가능성을 예견하며 지식과 교양을 한껏 과시하는 문화 충만의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유독 황정은은 산업의 속도에서 뒤처진 사람들, 세상의 저층에서 겨우겨우 살아내는 사람들, 언제 대체되어도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제7의 인간’ 같은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눈여겨보는 것일까? 이해 가능하지 않고 앞날이 투명하지 않은 난감한 오늘의 우리 현실에 처한 곤란한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결코 ‘아무도 아닌’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인생이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결코 아무도 아니지 않은, 바로 ‘나’들이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유일무이한 것으로서의 존엄하고 신성한, 돈에 짓눌려 있지만 돈에 먹히지는 않은 인간들. 그들은 양 어금니를 꽉 다물고 입술을 자물쇠처럼 굳게 닫고 세상의 겨울을 건너는 자들이다. 슬픔이, 턱밑에 걸린 마음이 벌린 입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얼굴의 근육을 귀 뒤로 바짝 잡아당겨 보라. 귀를 젖히고 눈을 홉떠 보라. 그리고 외쳐 보라. ‘우습게 보지 말라.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
좀처럼 웃을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웃어본 적도 없었던 ‘웃는 남자’는 이렇게, 내동댕이쳐진 인생들의 바짝 당겨진, ‘웃는 표정처럼 보이는’ 얼굴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