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는 개연성이라도 있지만, 현실에는 우연성만 넘쳐난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서 극장 매표원인 한 여자가 살해당한다. 살해범은 전날 해고당한당했다고 생각한 건설 현장 인부였다. 과거엔 골키퍼로 잘 나갔지만 지금 현재 그는 추락한 백수다. ‘월요일인데 출근하지 않아요?’라는 여자의 말이 트리거가 되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살해사건에 이르기까지, 모든 서사는 그 남자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바쳐진다. 반면 현실에서는 공원에서, 둘레길에서, 화장실에서 여자들이 어이없이 죽어 나가도 살해의 이유나마 밝혀주지 않는다. 그냥 ‘묻지 마’ 살인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여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 어느 귀신에게 잡혀갈지 모른다는 불안이 스멀거린다.
타락한 세상에 소설적 진실을 보여주려고 개연성혹은 허구적 총체성을 설계하는 것이 작가의 사회적 책무라고 여겨졌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팔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에 소설이라고 하여 허구적 개연성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독한 재미와 뻔한 소란을 제공하면서 독자의 혼과 얼을 빼놓는 작품만이 독서 시장에서 살아남는다고 착각할 지경이다. 자극에 중독된 지독한 시대에 맵고 짠맛이 빠져버린 심심한 이야기는 팔리기를 포기한 것과 진배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맡겨진 소녀Foster』는 그런 기우를 조롱하듯 국내에서도 엄청난 호응을 이끌어냈다.
클레어 키건의 중편 『맡겨진 소녀』는 수어로 대화하는 사람들을 묘사한 풍경처럼 고요하다. 소음이 제거된 마법의 세계처럼 보인다. 이처럼 소란한 시대에, 정제된 고요와 만나는 것은 드물게 맛보는 즐거움이다.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의 제목이 「조용한 소녀The Quiet Girl」라는 것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다.
이 소설에 대한 사전정보가 전무하다면, 여기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쯤인지 아리송하다. 어린 화자인 ‘나’의 아빠는 가래침을 함부로 뱉고 무례하며 거칠다. ‘나’의 엄마는 줄줄이 딸린 아이들 외에도 현재 또 임신 중이다. 엄마는 지쳐 있고 무심하고 무디다. 이야기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면, 엄마는 손님들 앞에서 아무렇잖게 아기에게 젖을 물린다. ‘나’는 이런 상황이 민망하다. 한국적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아마도 1970, 80년대쯤이겠구나, 라고 막연히 짐작한다. 한국에서도 그 시절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길거리에서 가래침을 뱉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쯤은 예사였으므로. 조금 더 읽다가 보면, 단식하는 뉴스가 텔레비전에서 나온다. 북아일랜드 독립을 주장하면서 단식투쟁을 했던 정치범 보비 샌드가 죽음에 이른 해가 1981년이었다. 이쯤에서 독자는 이 소설의 무대가 1980년대 아일랜드 시골 마을임을 알게 된다.
임신 말기의 엄마가 네 자녀를 돌보기에는 힘에 부친다. 아빠는 ‘나’를 먼 친척 집에 잠시 맡긴다. 여름 한철 친척 집에 맡겨졌다가 여름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할 무렵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끝까지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는다. ‘나’는 애호박 달리듯 주렁주렁 매달린 형제자매들 탓에 부모로부터 거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이 아이를 친척 아저씨 부부라 하여 과연 잘 보살펴 줄 수 있을까?
무례한 아빠와는 달리 킨셀라 부부는 교양 있고, 여유 있고, 다정하다. 낯선 환경에 홀로 떨어진 ‘나’는 첫날 밤 침대에서 오줌을 지린다. 당장 집으로 쫓겨날까 봐 ‘나’는 두렵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습한 방에 아이를 재운 자기 탓을 한다. 아주머니와 ‘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불을 햇살에 널어서 말린다. 집에서와는 달리 ‘나’에게 매질도 욕설도 없다.
‘나’는 방학생활 계획표처럼 잘 짜여진 농촌의 일과를 거들면서 킨셀라 부부와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낸다. 아주머니의 일손을 거들고, 우편물을 가지러 우체통까지 달려갔다 달려오기도 한다. 때로 아저씨에게서 맞춤법을 배우기도 한다. 시골 생활의 하루 일과는 단순하면서도 투명하다. 여름 햇살에 늘어놓은 염색 천처럼 얼룩이 묻었거나 은밀한 구석이라고는 없다. 말없이,
“우리는 루바브를 뽑고, 타르트를 만들고, 굽도리에 페인트를 칠하고, 온수 탱크 벽장에서 침구를 전부 꺼내고, 거미줄을 걷어내고, 깨끗하게 빨아 말린 옷을 전부 걷고, 스콘을 만들고, 욕조를 문질러 닦고, 계단을 쓸고, 가구에 광을 내고, 양파를 끓여 소스를 만들고, 그 소스를 용기에 담아 냉동고에 넣고, 꽃밭에서 잡초를 뽑고, 해가 지면 여기저기 물을 준다. 그리고 나면 저녁 식사와 밭을 가로질러 우물까지 걸어가는 일만 남는다. 매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 맞춰서 텔레비전이 켜지고, 일기예보가 끝나면 나는 이제 잘 시간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날따라 아주머니가 우물에 가보자는 말투가 조금 걸려서 ‘나’는 “이건 비밀인가요?”라고 묻는다. 이 말에 아주머니는 정색을 하면서 “우리 집에 비밀은 없어, 알겠니?” “비밀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있다”는 말인데 우리에게 그런 일은 없다고 강조한다. 독한 자극에 오염된 독자는 이 지점에서부터 그토록 투명해 보였던 이들의 삶에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한다. 이 집의 비밀은 뭘까? 뭔가 비밀스러운 게 있지 않을까? 아무런 반전도 없이 이렇게 밋밋하게 이야기가 끝날까? “비밀은 없어”라는 말은 비밀은 있어, 라는 이중적 의미가 아닐까? 텍스트의 어딘가에 비밀이 감춰져 있기를 독자는 고대한다.
이웃집 밀드러드 부인은 아이 앞에서도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해서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는 수다쟁이다. 킨셀라 부부는 초상집에 조문을 가면서 ‘나’를 데려간다. 아이가 그런 곳에 오래 있으면 지루할 테니까, 아저씨는 밀드러드 부인 편에 ‘나’를 딸려서 먼저 집으로 보낸다. 밀드러드 부인이 마구 쏟아내는 뒷담화는 이 소설에서 가장 시끄럽고 수다스러운 장면이다. ‘나’는 밀드러드 부인의 입을 통해 킨셀라 아저씨 댁의 고통스런 비밀을 알게 된다. 그날 밤 아저씨는 바닷가로 산책을 가지면서 ‘나’의 손을 붙잡고 나간다. 나의 보폭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밀드러드 부인과는 달리 아저씨는 나의 보폭에 맞춰서 걸어준다. 한밤중에 어두운 바닷가로 ‘나’를 데려간 아저씨는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저씨는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75쪽)
이 장면을 읽으면서 오염된 어른으로서 나는 행여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하다. 아이의 보폭에 맞춰서 걸어주는 어른다운 어른이 과연 있을까 의심하면서. 다정한 아저씨가 아이에게 상처 주는 비밀스런 일을 만들까 봐 두려워하면서.
이제 ‘나’에게는 엄마한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생긴다. 나는 심한 감기에 걸린 채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엄마가 다그치지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한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막장 드라마에 중독된 독자로서 나는 이렇게 담백한 소설을 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텐데, 날 텐데 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문자 그대로 사람들이 이렇게 선량하고 투명할 리가 없어, 어디서든 반전이 일어날 거야, 라고 고대하는 고약한 심보의 나와 마주치면서 민망해졌다. 언어의 이중성에 매달리면서 오독하고 싶어 하는 누추한 어른의 상상력이 부끄러운 저녁이었다. 이렇게 누추한 어른이 된 것은 막장 현실에 물든 탓이라고 변명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