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부터 소확행이란 신조어를 만들었다. ‘상실의 시대’를 넘어 ‘포기의 시대’에 이르러 한국의 젊은이들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나마 챙기려고 노력한다. 행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행운이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들었으므로.
한국의 N포 세대가 주장한 소확행에는 일종의 정치적 의미가 실려 있었다. 만약 취업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집 하나 장만하고 휴일에는 햇살 좋은 거실에 앉아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 ‘평범한’ 행복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그런 평범하지만 ‘엄청난’ 행복은 포기했지만, ‘소소한’ 행복만큼은 챙기겠다고 항변한다. 한국적 맥락에서 소확행에는 그런 항변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공짜로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물, 공기, 햇살마저 마음대로 누릴 수 없을 만큼 양극화된 시대다. 그런 상황이라면 공짜로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소소한 행복마저 결코 소소한 것이 아니게 된다. 지옥고반지하, 옥탑, 고시원에서 살게 되면, 햇살 한 조각도 평등하게 즐길 수 없다. 권여선의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 2020에 실린 단편 「손톱」에서 물류회사 임시직인 소희는 엄마, 언니마저 떠나고 난 뒤 옥탑방에서 혼자 산다. 새벽같이 출근한 일터에서 소희는 뾰쪽한 모서리에 엄지손톱이 뚫리는 사고를 당한다. 불운한 그날 운 좋게도 조장이 조퇴를 허락한다. 병원에 가려고 한강을 지나가면서 소희는 스물한 해만에 처음으로 한낮의 눈부신 햇살과 마주하게 된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왔을 때 내가 만났던 반지하 셋방은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시골에서는 햇살과 하늘을 n분의 1로 나누지는 않았다. 쪼개진 틈새로 간간이 보이는 하늘을 간신히 쳐다보지는 않았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구름 그림자가 드리운 보리밭에 드러누워 한없이 펼쳐진 하늘을 우러러볼 수는 있었다. 그런 소소한 행복만큼은 누렸다, 지금 돌이켜본다면.
핼러윈 축제는 한국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소확행의 하나일 수 있었다. 축제를 즐기려고 이태원으로 향했던 젊은이들의 참사를 떠올리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애도할 수 있을까? 충분한 애도는 뒤에 남은 자들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작가들이라면 어떤 애도가 가능할까? 오래전에 읽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문학동네, 2007이 떠올랐다. 『대성당』에 실린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앤은 여덟 살 생일을 맞이한 아들 스코티의 생일케이크를 주문하러 빵가게에 들른다. 아들의 생일파티를 할 생각에 앤은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앤의 설레는 마음도 모른 채 빵가게 주인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빵가게 주인은 손님에게 무뚝뚝하다. 앤은 마음이 불편하고 기분이 나빠진다. 서른세 살인 앤에 비하면, 중년인 빵가게 주인에게 좋았던 그 시절은 지나가고 고달픈 삶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앤은 상냥하게 대하려던 마음을 접는다. 월요일 아침에 특별주문한 케이크를 찾으러 오겠다면서 앤은 빵집을 나온다.
월요일이고 생일날 아침 스코티는 학교로 간다. 생일파티에 친구들이 무슨 선물을 가져올지 즐겁게 상상하다가 연석에서 그만 발을 헛디뎌 차도로 넘어진다. 자동차가 아이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는 멀쩡하게 일어났고 운전자도 별일 아니겠지, 하고 가버린다. 집에 돌아와 아이는 완전히 늘어진다. 생일파티는 취소되고 아이는 병원에 실려 간다.
우리가 삶을 계획하고 설계하고 통제하여 미래의 행복을 쟁취한다고 믿지만, 사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사일 수 있다. 지금 순간까지 하워드의 삶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대학, 결혼, 경영학 학위, 투자회사인 직장, 아빠가 된 것하며. 모든 것들이 너무 순조롭게 잘 풀렸다. 적어도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는 행복했고 운이 좋았다. 부모님도 건재하고 형제자매들도 다들 자리를 잡고 자기 몫은 하고 있다. 하워드는 어떤 쓰라린 경험도 해본 적이 없었다. 병원에 있는 아이는 곧 깨어날 테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서 하워드는 마음을 다독인다.
닥터 프랜시스는 막 연주회에 다녀온 사람처럼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고 있다. 앤은 의사에게 간절히 매달린다. “아이는 괜찮은 거죠?” 의사는 아이에게 뇌진탕이 있었지만 위험한 상태는 지났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아이는 하루가 지나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앤은 커피를 한잔 마시려고 카페테리아에 가는 것조차 죄스럽다. 간호사가 와서 아이의 팔에서 피를 뽑아간다. 공포가 앤의 몸을 휩쓸고 지나간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는데 아이는 왜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일까. 의사는 이상하다고 말한다. 앤은 병원에 있는 다른 보호자들에게 스코티에 관해 뭐라도 이야기하고 싶다. 앤은 잠시 집에 들러 개에게 밥을 준다. 굶주린 개는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스코티 일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하고 전화는 끊어진다. 앤은 공포에 질려 병원에 있는 하워드에게 스코티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본다. 하워드는 별일 없다고 말한다. 의사도, 간호사도 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제 앤은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칼에 찔린 흑인 아이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이 앤에게 위로가 된다. 함께 아픔을 공유하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그 아이가 궁금해서 앤은 간호사에게 물어본다. 흑인 아이 프랭클린은 수술대 위에서 숨을 거뒀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앤은 무서워서 온몸이 저려온다.
프랭클린처럼 스코티는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한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사흘 뒤에 아이는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행복한 생일파티가 가장 비극적인 날이 되었다. 빵가게 주인은 왜 생일케이크를 찾아가지 않냐며 독촉 전화를 한다. 앤은 슬픔, 짜증, 분노가 뒤범벅이 된 채 이 나쁜 놈에게 쳐들어간다. 앤은 내 아이가 죽었는데, 네 케이크가 그렇게 중요하냐면서 빵가게 주인에게 악을 쓴다. 사정을 알게 된 빵가게 주인은 아이를 잃고 며칠이나 굶었을 부부에게 빵을 대접한다.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끼고 롤빵을 세 개나 먹는다. 그들은 함께 갓 구운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다.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애도하는 방식은 과연 무엇일까? 어디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지 두렵다. 한국 사회가 어디서 빵가게 주인이 내민 별것 아니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구할 수 있을까? 고통은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빈센트 밀레이의 『죽음의 엘레지』읻다, 2017에서 시 한 편을 적어본다. 가슴 아픈 시인 최승자가 번역했다.
어느 입술이 내 입술에 키스했는지
어디서, 어째서 그랬는지 나는 잊어버렸다.
그리고 어느 팔이 아침이 될 때까지
내 머리를 받쳐주었는지도.
그러나 오늘밤 내리는 비는,
문을 두드리고 한숨지으며 내 대답을
기다리는 망령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고요한 고통이 솟아오른다.
이제 다시는, 한밤중에 소리치며 내게로
돌아올 일 없을,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젊은이들로 인하여.
그리하여 겨울 되어 외로운 나무 하나 서 있다.
나무는 어떤 새들이 하나씩 사라져갔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가지들이 훨씬 잠잠해졌음을 안다.
어떤 연인들이 왔다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 속에서 얼마 동안 노래했던 여름이
이제 더 이상 내 속에서 노래하지 않음을 나는 안다.
─ 「어느 입술이 내 입술에 키스했는지」
빈센트 밀레이의 시처럼 뒤에 남은 자들은 왜 삶은 계속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잊었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해, 그리고 죽은 자는 잊혀야 해, 어쨌거나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라고 중얼거리면서, 살아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