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IMF 때 회사에서 해고돼 지금까지 노숙자 생활을 하는 K씨다. K가 아니라 ‘K씨’인데 ‘씨’란 아버지를 따르는 성姓의 계통을 표시하는 말이거나, 동료나 아랫사람을 존중해서 부를 때 이름 뒤에 붙이는 단어다. 그러면 K는 성일까 이름일까. 소설을 읽은 뒤 그 점이 궁금해지게 하는 K씨다.
소설을 읽으니 카프카의 「성」이 생각난다. 성에 도착한 측량사 K가 성을 헤매듯 ‘K씨’도 미로를 헤맨다. 차이라면 이 미로는 카프카의 성처럼 견고한 게 아니다. 이 미로는 벽돌이 아니라 식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식물은 K씨가 자기 몸에 심어놓은 것이다. 그러니 K씨는 자기 몸속의 미로를 헤매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식물을 어떻게 몸에 심느냐고? 노숙자 K씨는 식물을 심을 부위를 고심한 뒤 결정되자 생각만으로 간단히 그것을 자기 몸에 심었다. 감각과 운동을 관장하는 척수에, 잘 자랄 것 같아서. 노숙자의 분열된 의식에서 비롯된 걸까. K씨가 그랬다 하니 독자인 나는 몸에 식물을 심었어? 그래, 하면서 받아들이고 K씨의 정신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 독자이니까.
그런데 소설은 현실로 방향을 틀면서 첫 번째 뒤통수를 친다. 이 식물은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들의 소유였다. 분홍색 화분, 즉 버젓한 ‘집’이 있던, 기원이 있던 식물이었다. K씨는 버려진 화분 속 식물이 불쌍해 키우려고 가방 속에 넣었다가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죽은 식물을 살리려고 자기 몸에 심게 되었다. 그 식물은 이미 죽은 식물이었는데 K씨는 그것이 몸에서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K씨는 그 뒤로 죽은 자들의 꿈을 꾸게 되고, 아버지의 꿈을 꾸게 된다. 식물을 몸에 심은 실마리가 아버지에게 있는 듯하다. 아버지는 K씨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다. “누가 버린 물건은 주워가는 게 아니다.” 어릴 때 주변 어른들이 버려진 물건 주우면 거지 된다, 도둑 된다고 하지 않나. 자기 자식이 커서 거지나 도둑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K씨의 아버지 역시 그 말을 K씨에게 해왔다. 그런데 K씨는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새’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생물학적 진짜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랬던 K씨가 죽은 새아버지의 명령 ― 누가 버린 물건 주워가지 않기 ― 을 이렇게 뒤늦게 떠올리게 되는 건 왜일까.
K씨는 ‘회반죽’처럼 냉담한 엄마와 K씨를 살뜰히 보살피는 새아버지 아래에서 컸다. 새아버지의 당부에도 어린 K씨는 물건을 주워와 미로를 직접 만들고 그 안에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버려진 물건의 집인 미로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서로 결코 만날 수 없는 물건들의 막막함을 느끼는 대신에 버려진 것들을 신처럼 내려다보며 불안을 잠재웠다.
K씨가 누군가. 버려진 물건들의 미로를 측량하고 설계한 꼬마였다. 몸속에 식물로 된 미로를 심는 것쯤은 K씨가 응당 할만하다. 성인이 된 K씨는 엄마가 죽자 병든 새아버지를 방치했다. 새아버지는 오래전 전쟁에서 총상으로 배에 구멍이 뚫린 국가유공자였다. 새아버지는 강에 빠져 죽었다. 식물을 몸에 심자 죽은 새아버지가 K씨의 꿈에 연일 등장해서 생전에 했던 말을 반복한다. “누가 뭐래도 너는 내가 낳은 자식이다.” 생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K씨의 꿈에서 완성한다. “넌 내가 내 몸에 심어놓은 자식이야.”
빛이 있으라, 하니 세상에 빛이 생긴 것처럼, 아버지의 말은 세상을 있게 하지만 실은 아버지를 ‘있게’ 만들려고 존재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의 말이 실체가 되어야지 아버지가 있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 아버지로서.
그런데 가짜 아버지는 버려진 건 줍지 말라고 누차 명령했으면서 진짜 아버지에게 내버려진 K씨를 주웠다. 어린 K씨는 그러니 그 말속에서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새아버지를 받아들이려면 어린 K씨는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버려진 자기 자신을 거둬들인 새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새아버지의 모순과 함께 자신의 버려짐을 자각하게 되는 건 아닌가. 그럴 때마다 ‘진짜’ 아버지와 ‘새’ 아버지를 구분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새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받아들이려면 K씨는 그 정언명령을 어찌 처리할 건가. 명령을 어기지 않고 가짜 아버지를 찐 아비로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나. 버려진 식물을 몸에 심는 것이다. 죽은 식물이 몸에서 자라난 거라면, 그러면, 남이 버린 걸 가져온 게 아니게 되니까. 그 식물은 자기 몸의 일부이니 자기 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명령은 지켜졌다. 이제 아들의 명령 수행으로 새아버지는 찐 애비로 됐을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은 차가운 길바닥의 잠뿐이다.
K씨 자신은 커서 노숙자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아버지의 자리에 올라가지 못했다. 새아버지 또한 노숙자가 되어버린 아들의 죽어버린 유령 아버지다. 식물성에 가까운 이 아버지와, 복숭아 같은 물렁한 마음의 아들은 어떻게 만나야 할까. 버려진 두 존재가 이 뭣 같은 세상의 미로 속에서 부자로서 만날 방법이 있을까.
이 단편 소설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지점은 놀라운 마지막 문장에 있다.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되지도 못할 바에야 어머니가 되는 건 어떤가. 아들이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이 놀라운 소설은 알고 있는 듯하다.
어떤 작가가 명절이 끝난 뒤 사석에서 한 말이 생각나는데, 외가에 가면 자연스럽게 화기애애한데 친가에 가면 이상한 거리감 같은 것이 맴돈다는 거였다. 그 작가가 말하길 외가는 엄마를 중심으로 뭉치기 때문에 자신들이 혈연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아서 친근한 반면, 친가에선 아버지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지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새아버지나 찐 아버지나 ‘아버지’란 말은 타인이란 말을 내포한 게 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라고 불러주는 것이 ‘엄마’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지도. 타인일지도 모르는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라고 불러야 타인이 아니게 되는. 그러니 새 아비나 찐 아비나 아비라면 타자 감각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 같다. 찐 아비와 새 아비 사이의 거리보다 엄마와 아버지의 거리가 더 먼 게 아닐까. 하여,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진정한 반전이라고 할 만한 충격을 준다.
아버지의 뜻을 받는 진정한 아들이 되거나 아버지를 거역하면서 아버지가 되는 진부한 고정관념을 깨고, 아버지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지난 (반)가족 서사에서 감히 상상치 못했던 형태, 자궁을 장착한 아빠 ― 아마아빠+엄마 ― 와의 충격적 만남을 주선한다.
★ 김민정 작가 단편소설 「뿌리」 원문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백마문화상 당선작으로, 아직 출간되지 않아서 인터넷 링크를 통해 텍스트를 찾아 원문을 읽고 서평을 썼습니다. https://news.mju.ac.kr/news/articleView.html?idxno=4496
★ 사진은 필자가 직접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