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Death, thou comest when I had thee least in mind.- 『에브리맨』, 15세기 도덕극, 작자 미상“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에브리맨』, 필립 로스“Philip Roth, Towering Novelist who Explored lust, Jewish life and America, Dies at 85. 필립 로스, 욕정과 유대인의 삶, 그리고 미국을 탐구한 위대한 소설가, 85세로 영면하다)”- 『뉴욕 타임스』, 2018년 5월 22일
죽어서 동굴 무덤에 묻힌 지 나흘 후에 의도치 않게 다시 삶으로 불려 나와야 했던 나사로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과연 나사로 본인은 기뻤을까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두 번째 죽음이 ─ 이번엔 영원한 죽음일 것이 분명한 ─ 찾아오기 전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삶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여전히 입속에 생생히 남아있을 죽음의 맛을 떨쳐버리고?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그저 단호하게 진행되는 죽음의 과정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에는 늙은 친구의 장례식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항변하는 말이 나온다.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왔지요. 내심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아마 죽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단 죽음을 맛보고 나면 삶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으리라. 삶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끝나고 말 삶이 애당초 왜 시작된단 말인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에 대한 재치 있는 서평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첫 문장이 “‘보통 사람’만은 되지 말자고 생각했다”였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러시아워를 뚫고 출근을 하고 점심시간만을 기다렸다 한숨 돌리고,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며 금요일을 학수고대하고, 다시 러시아워를 뚫고 퇴근하는 삶만은 살지 말자고”라고. 아마 서평을 쓴 이는 필립 로스의 소설 제목이자 끝내 구체적인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 소설의 주인공을 지칭하는 말인 ─ 그리고 주인공 아버지의 보석상점 이름이기도 한 ─ ‘에브리맨’을 ‘보통 사람’으로, 그러니까 특별하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에브리맨』은 주인공 스스로 말하듯이 ‘자신의 소망보다는 부모의 소망에 부응하여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고 안정된 생계를 위해 광고계에 진출’했다가 65세에 퇴직을 하고 해변의 은퇴자 마을에서 뒤늦게 평생의 꿈이었던 그림을 그리며 노년을 보내는 한 평범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에게 특별한 점이라면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다는 사실 정도? 평범하지만 열심히 살았고,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말년에 제대로 남은 건 없는 보통 사람.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얼굴을 즐겨 그린다는 화가 척 클로스의 말은 이런 보통 사람들의 성실한 삶에 대한 찬사로 바쳐진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하지만 실상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정반대 인물이다. 그것은 그가 특별한 사람이거나 예술가라서가 아니라, 바로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소설 『에브리맨』의 첫 장면은 주인공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으로 시작된다. 대개는 삶의 결말, 혹은 이야기의 끝이라고 여겨지는 죽음이 이 소설에서는 출발점인 것이다. 41년 동안 보석상을 운영하던 유대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정년까지 직장을 다녔고 세 번의 결혼을 하고 수많은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으며, 한 번의 복막염 수술과 세 번의 심장수술을 이겨냈다고 하는 이 남자는 사실은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간 사자死者이다. 그러니까 ‘에브리맨’이란 일탈을 꿈꾸면서도 성실히 일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평생 동안 용케 피해 다닐 수 있을 줄 알지만 결국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즉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각자의 삶이 어떠했든 간에 종국에는 똑같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긴 행렬에 꼼짝없이 줄 서 있는 우리는 예외 없이 예정된 ‘에브리맨’이며, 이 줄은 그저 ‘보통 사람’만은 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출퇴근을 그만둔다 해서, 혹은 그림이나 글을 창작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척 클로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범하지 않은 삶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죽으러 간다’고나 할까.
사실 『에브리맨』은 단순히 ‘보통 사람’이라든가 ‘모든 사람’이란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영문학의 전통 안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 15세기 영국의 도덕극moral play 『에브리맨』을 의도적이고 노골적으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완전히 세련된 문체의 현대적인 작품이고 도덕극 『에브리맨』은 종교적 교훈을 전달하는 알레고리 형식의 중세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제목만이 아니고 내용까지 동일한 이야기의 중세 버전과 현대 버전이라고 할 만큼 유사하다.
도덕극 『에브리맨』역시 주인공 ‘에브리맨’이 죽음을 맞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만 도덕극에서는 땅에 묻히는 대신 말 그대로 의인화된 죽음을 맞이하고, 아무런 준비도 안 돼 있던 에브리맨은 황급히 자신과 함께 갈 동반자를 찾아보지만, 제일 먼저 친구와 가족이 떠나고 세속적인 부와 육체적인 힘, 아름다움, 그리고 지식까지 차례차례 그를 외면하고 떠나버린다.
이런 떠남의 과정은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데, 어찌나 찌질하고 솔직하게 그렸는지 심지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8년 전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노쇠와 죽음을 다룬 이 암울한 이야기가 진짜 신랄하고 자기 희화적인, 그래서 재밌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작가가 죽기 전 일이다). 주인공의 장례식 장면이 끝나고, 죽은 자의 고백이 시작되는 첫 대목에서 늙은 남자는 마지막 심장 수술을 앞두고 홀로 병상에 누워 과거에 자기 곁을 지켜주었던 여자들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9살 탈장 수술 때 그의 옆을 지켜준 어머니를 시작으로 맹장 수술 때 옆을 지켜준 내연녀이자 두 번째 부인, 첫 번째 심장 수술 때 아무 도움도 안 되긴 했지만 곁을 지켜준 역시 내연녀였던 세 번째 부인, 그리고 그의 또 다른 내연녀가 된 개인 간호사까지. 하지만 막상 죽음의 고비를 맞은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언제나 다정하고 든든했던 큰 형 하위도 그의 괜한 심술로 멀어졌다. 41년간 흔들림 없이 부모의 자리를 지켜주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죽음이 데려갔고,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은 바람을 피우고 떠난 그를 여전히 미워했으며, 그가 거의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인 딸 역시 두 번째 이혼으로 상처를 안겨주었고, 직장 시절을 함께 보냈던 동료들은 심근경색이나 우울증으로 쓰러졌다. 어디 그뿐이랴. 바다를 거뜬히 헤엄쳐 건너던 그의 완벽한 육체는 병들고, 그가 그토록 사족을 못 쓰던 젊은 여자들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었으며 광고인으로서의 능력과 화가로서의 열정도 시들어버렸다. 이제 그는 죽음의 소환장을 받아 들고 공포에 질려 사라지는 것들에게 이렇게 소리칠 뿐이다.
“엄마, 아빠, 하위, 피비, 낸시, 랜디, 로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만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내 말 안 들려? 나 떠나고 있다고! 다 끝났다고, 나는 이제 당신들을 모두 다 떠나고 있어!” 그가 그들에게서 사라지는 것과 똑같은 빠른 속도로 자신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그 사람들이 고개만 돌려 너무나 의미심장하게 소리쳤다. “너무 늦었어!”
이윽고 ‘에브리맨’이 거쳐 가는 다음 단계는 바로 고백과 참회이다. 필립 로스의 주인공은 철저하게 신을 부정하고 종교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정체성이자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에 대해서도 ‘미신적인 허튼수작’이라며 강한 반발을 드러내지만, 중세의 에브리맨이 걸었던 길을 피하지는 못한다. 노년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이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깨닫자, 그는 ‘메아 쿨파’mea culpa, 내 탓이오를 외치는 중세의 참회자처럼 가슴을 치며 자책한다.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 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자책에 박자를 맞추어 쳤다. 심장제세동기를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로 빗나갔다. 그 순간 자신이 어디가 부족한지 랜디나 로니보다 훨씬 잘 알 수 있었다. 보통 냉정하던 이 사람은 마치 기도하는 광신자처럼 사납게 가슴을 쳤다.”
그렇지만 과연 죽음 저편까지 함께 데려갈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할까? 내가 어떻게 살았든, 죽음이란 절대적으로 혼자 맞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 아닌가? 도덕극 『에브리맨』에 따르면, 유일하게 죽음 저편까지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선행Good Deed이다. 필립 로스는 현대인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지극히 종교적이고 중세적인 이 교훈을 현대 버전의 『에브리맨』에 교묘히 끼워놓는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은 심장 수술을 앞두고 딸을 만나러 뉴욕을 향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부모님이 묻혀 있는 ─ 나중에 그가 묻힌 곳이기도 한 ─ 유대인 공동묘지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덤 파는 남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마치 『햄릿』을 연상케 하는 이 장면에서 그는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데,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무덤 파는 남자에게 50달러짜리 두 장을 건넨 것이다.
“하지만 댁과 아드님한테 뭘 좀 드리고 싶어요. 우리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손이 아직 따뜻할 때 주는 게 최선이다.’”
물론 세 명의 아내와 사랑하는 딸을 포함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평생 자신의 욕망과 필요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살아온 이기적인 이 남자는 마지막 ─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 선의를 베푸는 순간까지도 ‘가까운 날에 그를 위해 바닥이 펑펑한 구멍을 파줄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지만, 어쨌든 이 선행은 죽음을 앞둔 그의 곁을 지켜주는 유일한 위안이 된다. 아버지가 해준 말을 떠올렸고 그 말에 따라 보잘것없는 선행을 베푼 후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뼈들이 해준 말이 죽음으로 내려가는 그동안에도 커다란 빛으로 그의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의 이름 머리글자가 새겨진 보석상 루페로 귀중하고 완벽한 행성 전체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고향을, 십억, 조, 천조 캐럿짜리 행성 지구를!”
지난 5월 22일 필립 로스는 영원히 ‘에브리맨’이 되었다. 소설 『에브리맨』을 발표하고 12년 후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 소설의 주인공과 똑같이 71세가 되던 해에 이미 무덤에 들어갔고, 이번은 단지 그 죽음의 완결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에브리맨』은 나사로처럼 잠시 죽음이 유예된 죽은 자의 고백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건 나의 상상이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해인 2007년에 발표한 그의 소설은 『유령 퇴장』이었고 필립 로스는 한때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라고 절필 선언을 하기도 했었다.) 필립 로스의 부고를 듣고 나서 다시 읽은 이 소설이 12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 아니라, 마치 그가 지금 무덤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소름 끼치도록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도덕극 『에브리맨』에서 죽은 자가 애타게 자기 고백을 하는 이유는 오직 신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삶을 탄원하고 자비와 용서를 얻기 위함이다. 하지만 ‘내세를 믿지 않고 신은 허구이며 지금 이것이 자신의 유일한 삶’이라고 믿는 필립 로스의 자기 고백은 누구를 향한 탄원이었을까? 혹시 신이 아닌 독자들 앞에 서서 인간적인 약점으로 가득한 자신의 문학에 연민과 이해를 구한 것이었다면, 그는 아마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독한 마초 근성이 몹시 거슬렸고 그가 그리는 여성 인물들이 하나 같이 불편했으며 끝을 모르는 그의 자아도취가 늘 어이없었던 한 독자가 이 고백을 읽고 나서 그의 글을 추모하고 싶어졌으니. 결국 그는 머잖아 똑같이 죽음을 맞을 우리 모두에게 가장 커다란 위로를 남겨주고 떠났다. 모든 에브리맨을 위한 탄원서, 『에브리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