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에도 회피할 수 없는 책임과 윤리가 있다. 읽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한 번 눈길을 주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결코 도망칠 수 없는, 도피하는 것 자체가 나를 나의 부끄러움 앞으로 소환해 질타하는 그런 읽기가 있다. 당연히 그런 책은 일상의 불만과 불안을 망각하기 위해 책을 찾는 사람들, 일상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지식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등의 쓸모도 없거니와 관심의 대상도 되기 어렵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독자를 옴짝달싹 못 하게 몰아세우기 위해서는 저자 자신 또한 가혹하리만큼 엄격해야 하기에 극히 소수의 책들만이 이러한 책읽기의 요건을 충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돌베개, 2014는 이런 극소수의 책들을 대표하는 책이다. 이 책의 독특함은 독자를 향해서 고발하고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비수를 자신을 향해서 겨눈다는 점이다. 아우슈비츠라는 형언할 수 없는 인간적 상황의 밑바닥에서 ‘운’ 좋게 생환한 사람들은 나치의 잔혹함을 고발하기 위해,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처참함을 알리기 위해 증언록이라 불리는 책들을 출간했다. 프리모 레비 역시 생환자들 중 한 사람으로 『이것이 인간인가』1947를 출판하면서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것은 수용소의 추위와 전쟁 속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메모를 하게 만든 강박,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체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글을 쓰게 만들었던 강박이었다. 1976년에 『이것이 인간인가』의 청소년용 개정판을 내면서 레비는 부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암흑과도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
─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307쪽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끔찍함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레비뿐 아니라 대다수 생환자들이 증언하는 공통된 의지였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겪고 있는 사태들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분석하도록, 이해하도록, 그리고 은밀하게 기록하도록 이끈 욕구이기도 했다. 빵이나 청결이 아닌, 따듯함이나 친절함에 대한 것이 아닌, 직접적인 생존과 관련된 욕구가 결코 아닌, 좌절할 필요가 없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욕구이지만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빼앗길 위험이 없는 그런 욕구가 있었기에 그들은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키는 국가폭력의 기계장치 안에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었으며, 인간다움의 최소한의 헐벗은 뼈대만이라도 잃지 않으려고 저항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증언에 대한 이 욕망과 의지는 레비에게 자신이 응답해야 할 하나의 절대적인 의무로 바뀌게 된다. 전쟁의 폐허가 복구되고 일상의 리듬을 회복하면서 생환자들은 잊고 싶어 하는 부류와 잊어버리려 하지 않는 부류로 나뉘었는데, 레비는 이 중 후자에 속했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성의 극단적 한계이자 역사가 기억하고 경계해야 할 비극적 기념비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세상이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낯에는 화학공장 감독관으로, 밤에는 글을 쓰는 증언자이자 작가로 이중의 삶을 살면서 1963년에 『휴전』을, 1975년에 『주기율표』를 출간하고, 독자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내고, 증언과 관련된 초대 강연을 위해 지구 곳곳을 분주히 방문한 것들은 모두 이러한 기억에 대한 의무 때문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기억의 의무는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면밀하게 살펴보면 모순투성이의 말하기의 욕망이었고, 생환자들이 한밤의 꿈에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간들로 소환되어 겪어야 하는 포로들의 절망이었다.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 해인 1986년에 출간된 마지막 저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그래서 한편으로는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증언이 그저 하나의 이야기, 한 권의 책으로 소급되고 소비되는 표류에 대한 위기를 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증언자가 될 수 없는 증언자의 고통스러운 진실에 대한 고백이 있다. 이 책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아우슈비츠의 진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의 기억을 불신하고, 증언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의 허위를 고발하기 때문이다.
변명이 꼭 필요하겠다. 이 책 자체도 기억에, 그것도 먼 기억에 흠뻑 젖어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의심스런 출처에서 퍼 올린 것이며, 따라서 그런 의혹들로부터 이 책은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 (38쪽)
아우슈비츠의 경험은 이유 없는 쫓김과 구속, 수용소와 노동, 구타의 연속, 배고픔과 추위의 반복, 절망이라는 말로 담아낼 수 없는 추락이었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생환자들은 우리의 경험을 잘 이해했으며, 또 남들에게 잘 이해시킬 수 있었을까?”(39쪽) 증언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했다고 기만하는 것이며, 진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진실을 재단하고, 분류하고, 축소시키고, 왜곡하고, 타협하는 것이 아닐까? 레비의 이러한 의심은 동료 증언자들의 기억을 “동정심과 분노를 넘어 비판적인 눈으로 읽혀야 한다”(16쪽)는 질타에서, 회피하고 망각하려는 가해자와 기억하려는 피해자가 동일한 기억의 덫에 걸려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으로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진정한 증언자가 될 자격이 없음을 토로하는 자아비판으로 나아간다.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다. (99쪽)
그렇다면 아우슈비츠 이후의 삶을 증언에 몰두했던 레비의 강박, 진짜 증인이 될 수 없는 자들의 증언에 대한 갈망은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레비는 그것을 죽은 자와 나누지 못했던 한 모금의 물, 사과하거나 보상할 수 없는 미안함, 되돌릴 수 없는 부끄러움의 시간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환자들은 사소하지만 인간이기 위해 내밀어야 할 최소한의 마음, 관심, 혹은 나눔을 외면했기에, 그 부끄러움과 죄책감 때문에 진짜 증언자들을 대신해서 증언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바로 그것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 살아남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변명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증언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과 철학자 장 아메리Jean Améry, 화학자이자 소설가 프리모 레비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레비는 전쟁 이후 독일어 흔적이 선명한 자신의 본명을 견딜 수 없어서 장 아메리로 개명한 한스 마이어에 대해서 ‘두 개의 이름 사이에서, 평화도 없고 평화를 구하지도 않는’ 그런 삶이었다고 전한다. 이것이 알려주는 한 가지 진실이 있다면, 이들 생환자들이 죽은 자들을 향한 되갚지 못한 부채로 인해 삶을 지속하는 동안 완수되거나 완료될 수 없는 책임감으로 증언하기의 의무를 짊어져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의 것도 아니고 우리 세대의 아픔도 아닌 이런 고통스러운 증언의 기록들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독서라는 것이 고상한 정신이나 고단한 영혼을 위한 지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저자가 생산한 언어의 흔적들을 취향에 맞게 소비하는 행위일 뿐이다. 소비로서의 독서는 선택과 선별, 수용과 거부라는 자유를 향유하며, 책과의 관계에서 일방향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소비로 소급될 수 없는 다른 읽기, 권력을 누리기보다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을 요구받는 다른 독서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첼란은 이렇게 쓴다.
아무도
증인을 위하여
증언하지 않는다. (「너의 흔들리는」)
너의 파기할 수 없는
증언이 기다린다. (「부식되어」)
책읽기가 소비로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두 번의 연주가 필요하다고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글쓰기의 영도』Le Degré zéro de l'écriture에서 암시한다. 한 번은 종이 위에 필사된 언어 안으로 들어가는 연주이고, 또 한 번은 언어 밖으로 나와서 그것을 재생산과 실천으로 완성하는 연주이다. 첼란이 기다리는 ‘너’의 증언, 증인을 위한 ‘증언’이 말해지기 위해서는 이처럼 세 번째 사람인 독자가 필요하며, 그의 독서는 읽는 눈과 듣는 귀를 넘어서는 세 번째의 감각과 몸짓을 갖추어야 한다. 프리모 레비가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그 옛 지옥의 원으로 내려가”(253쪽)고자 했을 때, 가장 날카롭고 엄격한 글쓰기의 윤리들로 자신을 몰아세울 때, 궁극적으로 부합하고자 했던 시선 역시 자신의 증언을 사후적으로 완성해 줄 이후 세대의 독자였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증언자의 윤리와는 별도로 독서의 책임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책임을 이어받을 때, 비로소 증언은 살아있는 말의 무거움, 단어 하나하나를 채우고 있는 의미의 강렬함을 보호받을 수 있으며, 기억의 세대인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방황했던 증언자의 삶에 대해서 안부인사를 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