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돌아와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현대 작가가 썼다 해도 놀라울 것 없어 보이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의 날 선 현대성에 놀라곤 한다. 특히, 일기나 수기 형식 작품 속 1인칭 화자의 사변을 따라 엉킨 실타래 같은 인간 내면의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 가다 보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 속의 거울반영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에 당혹스런 기분마저 든다.
지독한 악의와 사악한 열정, 병적인 열등감과 우월감, 구원을 향한 갈망과 자기 파괴적 절망을 토로하는 위악적인 화자의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우리 시대의 맥락 속에서 읽히는 것도 이 작품이 시대를 초월한 인간 내면의 풍경을 집요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짤막한 작품은 선과 악, 자유의지와 행복, 이성과 정념, 구원과 파멸, 그리고 이 모든 양가적 문제들을 담아내는 대화적 의식 등, 후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요체가 되는 핵심주제들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추레한 ‘지하생활자’1)의 끝없는 주절거림 속에 당대의 이상적 유토피아론에 대한 대항담론이 매우 정교하게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일정 부분 공상적 사회주의 유토피아소설로 분류될 수 있을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장편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 쓰여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때 그 자신도 매료되었던 사회주의 유토피아론의 허상을 집요하게 공격하며, 작품 곳곳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반론과 패러디들을 심어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전형적인 안티유토피아소설들의 경우처럼 안티유토피아론 자체를 작품의 중심주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하나의 질문을 끝없이 던진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질문에 대한 집요한 천착은 자연스레 도대체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 존재인가,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가, 무엇이 그를 움직이는가, 그가 진정으로 꿈꾸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다 보면, 결국, 유토피아, 안티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헤테로토피아 등 다양한 담론의 기저에도 실은 시대를 초월한 동일한 질문,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가 흐르고 있다는,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 글에서 우리는 궁전 대신 닭장을, 모든 것을 약속하는 수정궁 대신 초라하고 남루한 지하실을 선택하겠노라고 외치는 미친 사내의 궤변을 따라 일말의 화해나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독한 질문,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좇아 사내의 지하실 안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듯이,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작품을 가득 채운 대화적 자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세 개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라는 인간은 통 매력이 없다.(9쪽) 2)
“나는 병든 인간이다”라는 첫 고백을 마치자마자 ‘나’는 ‘나’를 병든 인간으로 여겨 경멸하고 불쌍히 여기는 상대의 응답에 맞서기라고 하듯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라며 위협적인 몸짓을 취해 보인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경계하며 물러서는 상대의 옷자락이라도 붙잡듯 자신을 매력 없는 인간이라 낮추고 비하한다. ‘형식상’ 독백적으로 쓴 수기는 실상은 병적으로 커진 화자의 자의식이 만들어 내는 끝없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탁구를 치듯 팽팽하게 이어지는 이 자의식의 대화를 듣다 보면, 『지하생활자의 수기』가 어디서도 듣기 힘든 강렬한 대화, 끝없는 시비와 변명, 협박과 회유, 괴로움을 호소하는 비명과 울음으로 이루어진 대화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심술궂은 관리였다. 거칠게 굴었고 거기서 만족을 찾곤 했다. 사실 난 뇌물도 받지 않았으니까, 이런 걸로라도 마땅히 보수를 받아야 했다.(형편없는 말장난이지만, 그래도 이 부분을 지우지는 않겠다. 이 부분을 쓸 때는 아주 예리한 말장난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제 와서 보니 그냥 추악하게 젠체하고 싶었을 따름임을 내가 더 잘 알겠다 ─ 그래도 일부러라도 지우지 않겠다!) (10쪽)
그는 끊임없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타자를 의식하며 공격하고, 변명하고 조소하며 자신의 병적인 내면을 드러낸다. 그런 그의 사변의 중심에는 ‘나도 왜 내가 나를 파괴하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나의 선택이다!’라는 조소와 절규가 배어있다. ‘나’는 간이 아픈 것 같지만, 절대 병원에는 가지 않을 거다. 의사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악의로 손해를 입는 것은 고결하신 의사선생들이 아니라 형편없이 한심한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결코 이 심술을 멈추지 않을 테다! 나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지만, 사실 가장 고상한 것 앞에서 저속한 진창으로 내달리며 가장 추잡한 죄들을 저지른다. 왜? 그건 나도 알 수 없다. 저속한 것을 즐겨하는 나의 내면이 너무나 괴롭고 절망스럽지만,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래 봤자 고통스러운 것은 나뿐이지만, 나는 계속해서 고통스러울 테다!!! 치통에조차 쾌감이 있는 것을 너희가 아느냐!!!!
이렇듯 위악적인 자기폭로 사이에 던져진 산발적인 단서들로 파악할 수 있는 ‘나’의 전기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고아였던 ‘나’는 외톨이에 왕따로 지독히도 불행한 학창시절을 보내며 더욱 비뚤고 기이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었다. 학창시절, 친구들의 경멸과 조소를 이겨내려고 우수한 성과를 내며 학교를 다녔지만, 친구들과 함께 근무하는 것이 싫어 근무지를 옮겨가며 하급관리 생활을 했고, 직장에서도 사회 부적응자로 겨우겨우 끔찍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우연히 먼 친척의 유산을 물려받고 페테르부르크 지하방에 칩거하게 된다. 수기를 쓰고 있는 현재 ‘나’는 다 떨어진 실내복을 입고 가난하고 비루한 삶을 연명해 가고 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1부 ‘지하실’과 2부 ‘진눈깨비에 관하여’의 총 2부로 구성된 중편 소설이다. 시간순으로 보자면, 마흔 살의 내가 내리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다 스물넷 시절에 있었던 몇 가지 해프닝을 회상하는 2부가 1부보다 16년 전에 벌어진 일을 그리고 있다. 1부에서 쏟아지는 화자의 기이한 폭풍 사변을 듣고 나서, 사후적으로야 그가 어떻게 이런 인간이 되었는지, 그의 내면에 도대체 어떤 것이 잉태되었는지를 조금 더 잘 이해하도록 되어있는 소설의 구성은 언제 읽어도 매력적이다(2부를 읽고 나서 다시 1부를 읽고 싶어질 법도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어지러운 혼란 속에 둘 수밖에 없게 하는 묘한 구성이다).
사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나에게 ‘지하생활자’는(원래도 관념과 정념을 중심에 두고 탄생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관념 그 자체인 인물, 피와 살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강렬한 관념, 사변과 등가를 이루는 형상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 페테르부르크 유학 시절, 피와 살을 가진 ‘지하생활자’를 만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한 일이 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연극으로 올린 독특한 일인극이 있다기에 지인들과 함께 공연을 보려 했는데, 관람을 하려면 극장이 아니라 무슨 무슨 지하철역 출구 앞에 정해진 시간에 모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에 모여 있는 일행을 향해 안내인이 다가왔고, 우리는 그를 좇아 좁고 지저분한 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드디어 안내인이 멈추어 선 곳에는 낡고 쇠락한 19세기 건물이 흉물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기로 이동하듯 조심스레 낯선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삐걱거리는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갈 때(안타깝게도 공연은 지하가 아닌 건물 2층에서 진행되었다.) 문득 일종의 ‘관념’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가 실은 구체적인 시대에 구체적인 공간을 차지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던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낡은 집의 문을 열었을 때,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추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실내복을 입고, 혐오스러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가 정수리에 눌어붙은 성긴 아마 빛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나도 모르게 혐오감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그 순간, 관념이었던 ‘지하생활자’가 가장 실제적인 육체성을 입었다.
분명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잉여인간 계보의 곁가지의 곁가지 그 아래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있을 법한 이 기이한 인물은, 작품 도입부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밝히고 있듯이 그저 어떤 이념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념’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회와 시대가 낳은 어떤 유형의 인간을 대변하고 있다.
이 수기의 저자도 ‘수기’ 자체도 물론 지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여러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수기의 작가와 같은 인물은 우리 사회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을뿐더러 심지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 속하는 성격 중 하나를 좀 더 또렷하게 뭇 사람들 앞에 내보이고 싶었다. (7쪽)
그는 분명 암울한 반동 정치와 빈부 격차, 관료사회의 모순과 억압의 기운으로 가득했던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상황 속에서 잉태된 인물이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발작적인 사변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개인사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낸다. 고아로 자라며 가난과 질병과 외로움을 벗 삼은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예민하고 섬세한 지성을 타고났으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보호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불행한 인간이다. ‘나’의 비뚤어진 자의식과 공격성, 열등감과 병적인 우월감은 분명 ‘내’가 살았던 시대와 ‘나’의 개인사적 불행에 기인한 것이다. 더욱이 2부에 등장하는 창녀 리자의 지적처럼 ‘마치 책을 읽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의 삶은 수기의 마지막 부분에 적힌 고백처럼, 실제 삶과 유리된 19세기의 무력한 인텔리겐치아의 형상과도 닮아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불행한 아웃사이더의 사변이 이 작품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론의 토대가 된다는 점이다(이는 병적이고 극단적인 인물들 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인간 내면의 본성을 추출해내는, 매우 도스토예프스키적인 해법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이 한심하고 보잘것없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루저’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2x2=4의 세상, 모든 것이 설명되고, 규정되고, 계산되고, 약속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으로 결코 들어가지 않겠다는 병적인 다짐에 인생을 건다. 그는 인간을 도표와 숫자와 논리로 규정지어, 무엇이 인간에게 가장 이롭고 훌륭한 답인지를 결정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와 싸운다. 그는 자신의 지하실에 가장 초라하고 추한 모습으로 쭈그리고 앉아 세상이 건설하기 원하는 완벽한 유토피아, 수정궁의 이상을 노려보고, 비웃고, 혀를 내민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그렇게 설명되거나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황금빛 몽상이다. 오, 말해 달라, 누가 처음으로 이런 의견을 내놓았는가, 인간이 추잡한 짓을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진짜 이득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맨 처음 선언한 자 과연 누구인가. 즉, 인간을 계몽해 주고 진짜, 또 정상적인 자신의 이득을 보도록 눈뜨게 해 준다면 그는 즉시 추잡한 짓을 멈추고 즉시 선량하고 고결한 인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계몽되어 자신의 진짜 이익을 이해함으로써 선善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꼭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오, 정녕 젖먹이나 다름없도다! (…) 그래, 대체 언제, 첫째, 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인간이 오직 자신의 이익 하나만을 위해서 행동했던 적이 있었던가? 사람들이 뻔히 알면서도, 즉 자신의 진짜 이익이 뭔지 완전히 이해했으면서도 그걸 옆으로 제쳐놓고 (…) 다른 길로 돌진했음을 (…) 증명해 주는 수백만 개의 사실들은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 이익이라니! 이익이란 무엇인가? 그래, 여러분은 인간의 이익이 대관절 어디에 있는지 완전히 정확하게 정의할 자신이 있는가? (…) 다들 비웃는군. 비웃어도 좋지만, 단, 여러분 다음 질문에는 대답을 해 주시길. 즉, 인간의 이익이라는 것이 완전히 정확하게 계산된 것일까? (36~37쪽)
스스로 지하실로 기어든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갇혀버린 불쌍한 존재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형편없이 가련한 사내의 입술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출구를 갈망하던 당대의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이상을 그 근간에서부터 흔들고자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