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와 비교하면 동생 미셸은 쾌락 자체에 무감無感한 사람이다. 중학교 때부터 미셸만을 바라보고 사랑한 아름다운 아나벨의 성적性的 구애는 그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저녁, 마중 나온 아나벨과 나눈 포옹은 그때나 아나벨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나 미셸에게 가슴 아리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두 사람의 관계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눈치를 챈 브뤼노는 관계개선에 도움을 줄 요량으로 그들을 디 메올라의 ‘성적 해방 공동체’로 데려간다. 그러나 미셸은 그곳에서도 아나벨을 외면한다. 결국 아나벨은 디 메올라의 아들인 다비드의 텐트로 가버리고 미셸은 그 길로 대학 기숙사로 떠나면서 25년간의 이별이 시작된다.
그러다 미셸은 할머니의 이장移葬으로 고향을 찾게 되는데, 그곳에서 아나벨과 재회한 후 둘의 관계는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 역시 사랑이 아니라고 미셸은 말한다. 그것은 “그녀에 대해서, 그녀가 품고 있는 무량한 사랑에 대해서, 인생의 우여곡절이 망쳐 버린 그 사랑에 대해서” 느끼는 연민이다. “그 밖의 감정을 마주하면 그는 온몸에 찬 기운이 돌 정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만다. 하지만 그들의 순간순간은 애절했으며 소중했다. 관계가 진전되면서 미셸의 아이를 갖길 원했던 아나벨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자궁암으로 죽는다.
형의 아픔, 어머니의 죽음, 아나벨과의 추억 등을 통해서 미셸은 줄곧 자신을 사로잡던 인간의 고통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과학적 가설의 연구에 몰두한다. 그리고 2009년 그간의 연구를 담은 논문을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와 영국의 『네이처』지에 보내고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그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무엇일까?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시*가 실마리를 던져준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늘날
물질주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한낱 옛날이야기로 들을 수 있다.
그건 슬픈 이야기지만,
우리는 슬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육신과 욕망에서 태어났으나,
그들의 범주와 속성을 거부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기쁨도 알지 못하고
그들의 괴로움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무심하게 힘들이지 않고
죽음이 지배하는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시의 화자는 프롤로그부터 등장해서 소설 전체의 시선을 제공하고 있는 새로운 종種의 목소리다. 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들은 인류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별종이다. 그들은 기쁨과 괴로움을 초월하고 죽음을 넘어선 존재다. 이처럼 미셸은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으로 새로운 종種의 개념을 내놓았다. 이 새로운 존재들은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꼭 필요한 성차”가 없으며, 성적 쾌감과 관련된 크라우체 소체들이 피부 전체에 퍼지게 되면서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개체들이다. 인간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유전자의 개별성은 실제로 불행의 원인이기 때문에, 새로운 종은 동일한 유전자 암호를 갖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미셸은 인류에게 육체적인 불멸을 가져다줌으로써 종족보존을 통해 필멸의 한계를 극복해 나간 기존 인류의 시간관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유토피아의 두 가지 축 중 하나를 해결한 셈이다.
* 미셸 우엘벡, 이세욱 역, 『소립자』, 열린책들, 2009, 319쪽.
유토피아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공간문제에도 근본적 변화가 이루어진다. 미셸은 공간에 관한 새로운 철학을 도입하면서 공간의 분리와 단절에서 오는 인간의 공포와 슬픔을 극복한다. 미셸의 설명에 따르면 자연에 나타난 형상들은 모두 인간이 지어낸 것들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공간 속에서 측량을 하고 그 측량을 통해 우리의 도구들 사이에 공간을 창조한다. 인간은 자신들이 상상한 공간 안에서 3차원의 무게에 짓눌려 겁을 먹고 옹송거린다. 하지만 이 공간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이고, 인간의 정신이 지어낸 것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지어낸 공간 속에서 역시 분리와 거리와 고통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것에 제한되지 않는 존재들의 결합은 가능하다.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는 연인이 그러하고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어머니가 그러하다. 이렇듯 미셸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던 양자 역학의 가설들을 대담하게 재해석함으로써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되살려 낸다. 기독교, 유물론과 근대 과학에 이은 제3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이렇게 일어났다.
브뤼노와 미셸은 자신들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에 빠진 부모들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들이다. 보통의 아이들이 가정에서 누리는 일상적 유년의 경험이 탈각된 성장과정을 보낸 두 아이들은 자신을 숨겨줄 유토피아적 공간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푸코가 말하는 아이들의 반反공간, 예를 들면 정원의 깊숙한 곳, 다락방, 인디언 텐트, 부모의 커다란 침대와 같은 공간에 대한 경험이 그들에겐 없다.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를 위해 만들어낸 지하굴* 같은 곳이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브뤼노가 평생을 자신을 위한 유토피아를 찾아서 헤매는 남자라면, 미셸은 우연적 확률에 의해 결정되는 유토피아의 변수를 직접 제거하고 모두가 평등한 쾌락의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방식은 아니다. 시간의 축을 거슬러 올라가서 ‘황금시대’를 노래하지도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또는 저 경계 너머의 고립된 공간을 설계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세계에 관한 미셸의 구상은 더 나은 세상이 어떤 정치나 윤리적 실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작가 우엘벡의 생각을 담고 있다. 우엘벡은 소설의 한 독백에서 ‘근대적 사고’가 인간을 지배하면서 생겨났던 ‘개인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 ‘진보’라는 개념들이 당시에는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로 일컬어질 만큼 엄청난 의미를 가졌지만 실제로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는 분리와 해체의 방향으로 흘렀다고 말한다. 이러한 근대적 관념들은 인간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미셸의 방법은 푸코의 유토피아적 몸처럼 그저 몸이기만 하면 된다. 다만 이제 그 몸은 쾌락의 극대화를 통한 쾌락의 소멸, 소멸의 상태에서 오는 궁극적 쾌락의 향유, 그래서 개인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는 18세기 고전으로 꼽히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방드르디프라이데이의 관점을 반영해서 개작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을 1967년에 발표했다. 이 소설에서 투르니에는 무인도 삶에 지친 로빈슨 크루소가 위안을 되찾을 수 있는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지하굴’이라는 공간을 창조해 낸다. ‘섬’ 속의 ‘섬’과 같은 장소 안에서 로빈슨은 자신을 위로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야생의 삶』, 고봉만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우엘벡의 포르노그래피는 ‘근대적 사고’라는 형이상학적 돌연변이가 일으킨 산물인 개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동원된 소설전략이다. 포르노그래피적 묘사를 통해 우엘벡은 방탕한 성性이 숨기고 있는 극단적 개인주의를 드러낸다. 그래서 크리스티나의 죽음이나 브뤼노의 정신병원행을 방탕한 성생활에 대한 우엘벡의 복수로 읽는 일부 해석들은 지나치게 윤리적인 독서의 관성에 지배받는 독법이다. 브뤼노가 정신병원을 다시 찾는 것은 방탕한 성생활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무조건적 사랑으로 이끌어주던 여자 친구의 죽음과 그녀의 불구를 끌어안을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최우선순위는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이다. 브뤼노에 관한 하드코어적 방식의 서사는 개인주의의 극단인 ‘쾌락주의’ 안으로 타인의 쾌락에 대한 배려를 결합시키면서 그간의 좌절을 보상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배려와 이타주의를 세상에서 만날 가능성은 여전히 불확실한 확률의 세계이다. 이에 반해 미셸의 유토피아적 구상은 확률에 기대지 않고 종種의 변형을 통해 자기 안에서 유토피아를 완성시키는 것, 극단의 고립으로 들어가 모든 확률을 배제한 환경에서 쾌락의 최대치를 경험하면서 쾌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결말은 인간에 대한 절망이면서 동시에 희망이기도 하다. 유발 하라리가 그려내고 있는 “영원히 젊은 사이보그, 번식도 하지 않고 성별도 없으며, 다른 존재들과 생각을 직접 공유할 수 있는, 집중하고 기억하는 능력은 인간의 수천 배에 이르며,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 대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후계자들”*이 우엘벡의 새로운 종種과 놀라울 만큼 유사한 것을 보면 누가 알겠는가? 『소립자』의 미래인 2060년에 이르면 우리도 우리 몸 안에 유토피아를 갖게 될지를.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5, 581쪽.
『소립자』는 포르노그래피적 서사라는 형식을 빌려 근대 사회의 모순들에서 비롯된 파국의 형상을 적나라하게 비웃고 있는 소설이지만, 그 상상이 현실에 대한 반성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반유토피아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유토피아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