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topia, 그리스어의 '없는ou-', 또는 '좋은eu-'이라는 뜻을 연상하게 하는 단어의 첫머리와 '장소topos'라는 두 말의 결합. 여기에 없는, 그러나 여기보다 좋은 공간. 사람들은 예전부터 그런 꿈을 꾸어 왔다. 설령 그 명칭이 그 꿈을 꾸는 이들이 속해 있는 시·공간에 따라 다르게 불렸을 수도 있지만, 고단한 현실 너머의 공간에 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우리 곁에서 반복적으로 서사화 되어 왔다. 이 유토피아의 어원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은 일차적으로는 ‘토포스’, 즉 공간에서 구체화된다. 그래서 많은 유토피아 이야기들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섬’, ‘산’과 같은 ‘다른 공간들’을 상정하고 있다. 반대로 어떤 이야기들은 동일한 공간에 ‘다른 시간’의 층위를 투사하면서 유토피아를 그려내기도 한다. 과거의 시간이나 미래의 시간 안에서 자신들이 속해 있는 공간의 변형을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대부분'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엮어지게 된다.
여기에 비해 다소 예외적인 유토피아의 출발점이 있다.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모든 유토피아의 주연 배우”인 ‘몸’이다.* 푸코에 따르면 “내가 유토피아이기 위해서는 내가 몸이기만 하면 된다.” 푸코의 예를 살펴보면 ‘가면 쓰기, 문신하기, 분 바르기’ 등은 다른 몸을 얻는 일은 아니지만, 몸을 또 다른 공간에 위치시키면서 이 세상에 장소를 갖지 않는 하나의 장소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또한 인간이 이야기하는 가장 오래된 유토피아 중 하나로, 공간을 집어삼키고 세계를 정복하는 거대한 몸을 가진 거인들을 수많은 전설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보더라도 ‘몸’은 ‘작은 유토피아적 알갱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는 피안彼岸의 다른 공간이 아닌, 하지만 섬처럼 고립된 인간 내부에서 꿈꿔질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면 인류를 대신하는 새로운 종種을 탄생시킨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는 다소 급진적인 유토피아 이야기다.
* 미셸 푸코, 「유토피아적인 몸」,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33쪽.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에서 연대기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공간들은 쾌락을 어떤 방식으로 통제하는가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삶을 여위게 만듦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은 디오게네스의 ‘극기’거나 쾌락의 윤리학자라고 불린 아리스티포스*의 ‘향락 제일주의’거나 혹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강조된 ‘질서’거나 이 모든 것들의 출발점은 쾌락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개인의 쾌락을 무한정 인정하는 것은 타인의 쾌락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다수의 쾌락을 위한 개인의 규제와 억제는 유토피아의 목적성에 위배된다. 개인의 쾌락추구는 십중팔구 타인의 쾌락과 상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토피아 공간을 책임지는 주체가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쾌락의 운용에 관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998년 발표된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에 대한 상반된 평가의 한가운데 바로 이 ‘쾌락’의 문제가 놓여있다. 그래서 어쩌면 소설 전체를 연결시키고 있는 쾌락에 관한 우엘벡의 길 찾기는 유토피아로 가는 길 찾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저 블로흐의 유토피아 서사 연보의 마지막쯤에 추가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엘벡의 두 번째 소설인 『소립자』는 출판과 동시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라지는 작품이다. 전반적으로 『소립자』가 세기말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중요한 소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는 편이지만, 포르노그래피를 능가하는 성적 묘사에 대해서 상당수의 독자들은 직설적인 혐오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많은 교사들이 노골적인 성적 묘사에 대해 항의하였으며 우엘벡 자신은 소설이 담고 있는 메시지로 인해, 그가 속해있던 단체에서 제명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Le Prix de Goncourt가 우엘벡을 외면한 것에 반해 『소립자』를 1998년 수상작으로 선정한 노방브르상Le Prix Novembre의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줄리언 반스는 “지성과 에로티시즘의 혼합물이라는 점에서 『소립자』가 매우 프랑스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소립자』를 읽은 사람이라면 줄리언 반스의 “증오와 쾌락주의”라는 글의 제목이 얼마나 이 책을 간명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이 두 단어 중 “쾌락주의”에 집중해서 『소립자』 안의 유토피아를 상상해보자.
* Aristippos(B.C. 435~B.C. 366).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토포스는 인간의 가치 중에서 ‘쾌락이 가장 거룩하고, 고통이 가장 저열하다’고 믿을 정도로 쾌락을 중시하나, 선한 판단과 자기 통제 역시 역설하였다.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2』,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2004, 979쪽 각주 인용)
** Julian Barnes, "Hate and Hedonism", the New Yorker, July 7, 2003.
소설의 주인공인 미셸과 브뤼노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이다. 자유분방한 성 가치관을 가진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두 형제는 각기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밑에서 성장하게 되는데, 청소년기에 들어선 후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만나게 된다. 두 인물의 성격은 천양지차인 것 같지만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을 만큼 고립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마치 쌍둥이와도 같다. 쾌락에 대한 입장은? 형인 브뤼노가 쾌락 중독이라면 동생인 미셸은 쾌락 불감이다. 브뤼노는 어린 시절 기숙사생활에서 받은 끔찍한 학대와 모욕, 또래 여자아이들의 거절, 첫사랑이었던 여자 친구의 자살과 같은 아픈 경험으로 인해 욕구불만에 휩싸인 불행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 그는 자신의 쾌락을 이루어줄 유토피아,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라 부른, 현실 속에 실현된 유토피아*를 찾아다니는 인물이다. 아들에게 성적性的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어머니가 브뤼노에게 권한, 디 메올라가 운영하는 공동체나 68세대들이 설립한 「변화의 장」 같은 곳이 그의 헤테로토피아들이다.
* 푸코는 세상의 온갖 장소들과 절대적으로 다른 장소들이 위치하며, 이것들은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장소들을 반反공간contre-espaces,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 즉 헤테로토피아라고 명명한다.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는 자기만의 반공간, 자리 매겨진 유토피아, 모든 장소 바깥의 실제 장소들로, 정원, 묘지, 감호소, 사창가, 감옥, 휴양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개념은 ‘여기보다 더 나은 장소의 유토피아’보다는 좀 더 넓은 공간의 위상학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미셸 푸코, 앞의 책, 12~16쪽 참조)
그들은 그 땅에 「변화의 장」이라는 캠프장을 만들었다. 그들의 계획은 1970년대 초에 한창 유행하던 절대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서, 일종의 유토피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서」자율과 개인 자유 존중과 직접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장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한 건 새로운 공동체가 아니라 그보다 한결 소박한 바캉스 촌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이 생각하는 「변화의 장」은 그들의 취지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여름휴가 동안에 모여 새로운 원리들을 자기들의 삶에 실제로 적용해 보는 장소였고, 휴머니즘과 공화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공동작업과 창조적인 만남을 촉진하는 장소였으며, 한 설립자의 말마따나 「화끈하게 섹스를 할 수 있는」 장소였다.*
* 미셸 우엘벡, 『소립자』,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2009, 105~106쪽.
그러나 이 「성적 해방의 공간」은 알려진 것처럼 공동체주의가 실현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단지 개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새로운 단계일 뿐이다. “성적인 자유는 개인을 시장 원리로부터 지켜주는 그 마지막 공동체(부부와 가족)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개인을 섹슈얼리티의 장에서 무한경쟁체제로 밀어 넣는다. 젊었을 때부터 매력적이지 못한 이 중년의 사내는 유혹에 적합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성적 해방 공동체 속에서도 쾌락을 해소시켜줄 짝을 찾지 못하면서 캠프 내내 자위행위에 몰두한다. 분명 일상적 삶의 질서를 벗어난 헤테로토피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쾌락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쾌락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브뤼노는 동생과의 논쟁 속에서 “유물론과 근대 과학이 낳은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인 합리주의가 의도치 않게 생식과 섹스를 분리시킨 성적 해방을 가져왔지만, 여기에 또 다른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결과물인 개인주의가 개입한 것을 강하게 비난한다. 브뤼노는 성적 해방이 쾌락의 원리로서 존속하지 못하고 자기도취적인 차별화의 원리로 변질된 것이 바로 개인주의 탓이며, 그래서 욕망은 그 자체로 인간을 고통과 증오와 불행의 원천으로 떨어지게 만든다고 본다. 유물론과 근대 과학의 결합으로 태어난 형이상학적 돌연변이가 개인주의와 허영과 증오와 욕망을 낳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쾌락 안에서도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브루노에게 진정한 욕망에서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여성이 나타난다. 브뤼노는 「변화의 장」 캠프에서 우연히 읽게 된 미하일 바쿠닌의 “남의 자유는 나의 자유를 무한히 확대한다”라는 구호를 그의 삶에 실현해준 크리스티나를 만나면서 “마음에 아무 갈등이 없이 성적인 문제로부터 이미 벗어났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안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 결국 크리스티나의 죽음을 겪으며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을 찾아가게 되지만, 브뤼노는 쾌락의 극한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게 된 크리스티나의 이타주의 덕분에 자기 내부에서 쾌락을 다루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는 그렇게 잠시지만 자기 안에서 유토피아를 경험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