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혼자 읽는 것과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읽는 것은 다르다. 혼자 읽기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거나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함께 읽기는 삶에 우애를 불러오고 공동의 추구를 형성한다. 오랫동안 책을 함께 읽는 것은 결국 삶을 같이하는 일이다. 책으로 자신을 바꾸고, 가족을 바꾸고, 지역을 바꾸는 아름다운 혁명이다. 함께 읽기로 생각하는 시민을 만들어가는 전국의 독서공동체들을 시리즈 ‘책, 공동체를 꿈꾸다’에서 격주로 소개한다. 책읽기 문화와 독서공동체 확산을 위한 한국일보와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공동 캠페인의 일환이다.
함께 일하고 같이 읽는다. 노동으로 땀의 공동체를 같이 이루고, 책으로 마음의 텃밭을 함께 일군다. 정신의 양식을 얻는 곳에서 육체의 밥을 벌 수 있다면, 또는 식구를 먹이러 나가는 일터가 곧 영혼의 학교이기도 하다면…. 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리라.
일찍이 예수는 따르는 이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지상에서 천국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굶주림을 근심하는 무리를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만으로 배불리 먹였다. 공중의 새처럼, 들의 백합처럼, 오직 존재 자체에만 집중하라고 간절히 이야기했다. 영혼의 어긋난 축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육체의 오늘 양식을 해결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리. 곧이어 저녁이 되면 더욱 큰 공허가 찾아오리라. 윌리엄 모리스의 표현대로, 장미로 장식하지 않는다면 노동이란 쓸모 없는 고역에 지나지 않는다.
나주로 가는 기차가 들을 연이어 지난다. 지평선 가까이 가서야 아슬히 산이 가물거리는 너른 들이다. 시야가 먼 곳까지 열린 덕분인지, 기대와 설렘에 생각이 깊은 곳으로 꼬리를 문다. 택시를 타고 한전 KDN에 내린다. 2004년 이래 열두 해 동안, 직장으로 인연을 맺고 읽기로 생각을 다져온 독서공동체 향추회가 여기 있다. 창립 이래 지금까지 모임을 끌어 온 이창열 씨가 말문을 튼다.
책 안 읽는 사람들의 모임
“향기 향香, 송곳 추錐. 책의 향기가 사내에 널리 퍼지라는 마음을 담아서 향香을,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사내 어느 모임보다 두각을 나타내라는 뜻을 실어 추錐를, 이 두 글자를 택해서 모임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름 덕분인지는 몰라도, 처음에 28명으로 시작한 모임이 지금은 172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사내 전 직원이 2,000명이 조금 안 되니까,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전 KDN은 한국전력의 정보통신기술IT 업무를 책임지는 기술회사다. 아무래도 직원들 중에서 책에 본래부터 익숙한 사람은 많지 않다. 기술 관련 전문 서적을 제외하면, 책 자체를 가까이 하는 직원이 드물 정도로 독서에 척박하다. 향추회는 회사에는 책 읽는 문화를 뿌리 내리고, 직원들에게는 독서의 실마리를 마련하려는 데 우선을 두어 활동한다. 이창렬 씨가 말을 잇는다.
“저희는 여느 독서동아리와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책 읽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불러야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모임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책을 읽고 와서 소감을 나누는 모임으로 생각했는데, 몇 번 되지 않아 보기 좋게 실패했습니다. 업무에 쫓기다 보니 정해진 시간 동안 같은 책을 읽는 것은 무리였던 거지요. 독서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책을 가까이 하려는 욕구가 있는 직원들한테 책 읽기의 작은 동기를 제공하는 쪽으로 모임 방향을 틀었습니다.”
모임은 매달 셋째 주에 열린다. 때때로 가족까지 초청해서 주말에 특별 모임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읽고 와서 감상을 나누지 않고, 책 관련 행사나 공연에 참석한 후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려고 함께 모여서 서로 다짐을 엮는 것이다. 「노예 12년」 「페인티드 베일」 「냉정과 열정 사이」 등 원작 있는 영화를 관람하고 느낌을 공유한 후, ‘이 달의 추천도서’를 소개받고 지난달 읽은 책에 대해 소소히 이야기를 나눈다. 김태훈 씨가 뒤이어 이야기한다.
“작년 말에 처음 가입했습니다. 저녁마다 술이었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데, 선배 한 분이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접해 보라고 권해서 모임에 나오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아주 오랜만에 시를 읽었습니다. 대학에서 연애할 때 이후로는 시를 접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남들 앞에서 갑자기 시를 읽으려니까 무척 쑥스럽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시는 어려워서 잘 와 닿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모임 사람들이 모두 진지하게 시를 즐기는 걸 보고 감동했습니다. 기억에서 잘 잊히지 않네요.”
뒤풀이 자리에서 돌아가면서 시를 읽는 행사는 향추회에서 마련한 비장의 무기다. 짤막한 시를 직접 낭송하고 소감을 돌림으로써 회원들이 읽기의 문턱을 ‘가볍게’ 넘어서도록 배려한 것이다. 낭송할 시는 추천받은 작품들을 모아서 만든 『시랑詩浪』이라는 시집에서 고르지만, 가끔은 회원들이 자기가 읽을 작품을 별도로 준비하기도 한다. 목소리를 타고 시가 물결쳐 가슴을 파고들고, 심장으로 고여 기나긴 울림을 만든다. 김승희 씨가 말을 받는다.
“선후배들하고 정 나눌 자리가 정기적으로 있는 게 참 좋았습니다. 어색하고 낯설었던 직장에 적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죠. 소설 등을 주로 읽고, 시는 여전히 낯설고 어려워요. 하지만 시 낭송을 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봅니다. 시인의 감성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의 감성이 와 닿는 게 신기하게 감동적입니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감정적 교류를 하는 경우는 많이 없는데, 생활이 삭막하지 않아지는 게 힘이 됩니다. 영화 「모비 딕」을 보러 갔을 때가 생각나요. 그날따라 일이 몰려 무척 피곤했는지, 부끄럽지만 영화 보다가 깜빡 잠들어 버린 거예요. 결말 부분이 궁금해서 책을 주문해 끝까지 읽었습니다. 상당히 어려웠지만 덕분에 완독한 것 같습니다.”
영화 관람, 전시회 참석… 다채롭게 활동해
책 자체가 아니라 책 활동을 중심으로 삼다 보니 향추회 모임은 아주 다채롭다. 서점을 방문해서 읽고 싶거나 갖고 싶은 책을 찾아보는 ‘북서핑’을 한 적도 있고, 도서전이나 북 콘서트 같은 책 관련 행사에 참석하여 작가를 직접 만난 적도 있다. 또한 『메밀꽃 필 무렵』을 읽고 소설 속의 배경이 되는 문학 유적지를 방문한 적도 있고, 역사책과 함께하는 해외 역사문화를 탐방하는 여행을 떠난 적도 있다. 대마도에서 조선통신사 길을 답사하거나, 석도와 위해의 장보고 유적지를 찾아서 공부한 적도 있다. 나주 혁신도시로 내려오기 전에는 서울 경복궁 등 궁궐을 찾아서 우리 문화유산에 깊게 심취한 적도 있다. 그런 후에는 반드시 그와 관련한 서적을 추천하고, 서로 읽을 것을 독려하면서 독서를 습관으로 가져오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회비를 모아서 분기에 한 번씩 추천도서를 구입해 나누어 주는 까닭도 비슷한 이유다. 이 책들을 통해서 독서에 재미를 붙인 이들이 사내에 적지 않다. 체험이 독서를 낳고, 독서가 다시 체험을 강화하는 선순환이 이룩한 책 향기가 짙어진다. 박지혜 씨가 이야기한다.
“지금도 책을 자주 읽는 편은 아닙니다. 모임에 나오면서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자주 읽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모임에 나오지 않았으면 「노예 12년」 같은 영화는 아마 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심각한 걸 일부러 찾는 성격은 아니어서요. 독서와 관련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읽을 책을 고르는 거예요. 모임에 들고 나서 매달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도서를 추천받고, 석 달에 한 번씩은 골라서 보낸 책이 책상에 올려지니까 행복합니다. 김연수의 독서에세이 『우리가 보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문학에 그다지 익숙한 편이 아닌데, 정갈한 문장으로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해 주어서 흠뻑 기뻤습니다.”
독서에 익숙지 못한 이들한테 자신의 몸에 맞는 책을 고르는 일은 보기보다 쉽지 않다. 늘어선 책들 속에서 현기증을 앓다 보면 순식간에 책과 멀어지기 일쑤다. 도쿄의 모리오카 서점이 일주일에 단 한 권만 책을 선정하여 진열함으로써 독자들에게서 선별의 고통을 덜어낸 것처럼, 누군가 나한테 적당히 맞는 책을 골라 주기만 한다면 어쩌면 그를 위해 춤을 출 수도 있으리라. 이주아 씨가 이야기한다.
“심오한 토론을 할까 봐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시만 읽고 토론은 없었어요. 생각할 거리가 많이 있으면서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좋습니다. 『1℃ 인문학』처럼 어렵지 않으면서 업무 중에 틈틈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좋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어요. 친구랑 둘이서 따로 책모임을 하면서 읽은 시민의 교양’도 좋았어요. 고등학교까지 배운 지식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생각이 뒤집히는 좋은 경험 했죠"
낯선 책을 읽는 것은 자기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굴하는 일과 같다. 일상을 둘러싼 전문 기술의 세계를 빠져 나와 인문, 사회, 문학, 역사로 떠나는 여행은 굳어 버린 코드에 신선함을 불어넣는다. 창의성이란, 우연한 발상이 아니라 집중된 훈련이다. 두개골의 억압 아래 갇혀 있는 의식에 싱싱한 자극을 반복함으로써 예민한 촉수를 세우는 일이다. 김민상 씨가 설명한다.
“대전에서 서울로 발령이 났을 때 이 모임에 처음 들었습니다. ‘혼밥’ 생활이 지치고, 외로움에 힘들었어요. 저녁 식사도 해결하고, 좋은 공연도 보고, 책도 선물 받는 일석삼조였죠. 모임에서 『심플 ―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글쓰기 공식』을 추천받아 읽었는데,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뒤집히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보고서 쓰는 문제로 e러닝 강의를 들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어요. 덕분에 책 읽기가 좋아져서 여기로 내려와서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도 애써 읽고 있습니다. 요즈음 읽은 책으로는 이현세의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도 인생의 깊은 지혜를 마음에 남겨서 행복했습니다.”
책은 안으로 접혀 생각을 이루고, 밖으로 펼쳐져 대화를 만든다. 활동을 통해서 책의 높다란 문턱을 뛰어넘고, 읽기를 통해서 침체된 내면을 일으키며, 친교를 통해서 서로의 벽을 무너뜨리려는 향추회의 끈질긴 활동에 멀리까지 빛이 있으라.
◆ 앞으로 책을 읽으려는 이들에게 향추회가 추천하는 책 10
독서가 익숙하지 않지만 앞으로 책을 읽어 보려고 하는 이들한테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책은 플랜투비의 『1℃ 인문학』입니다. 짧은 글과 그림, 사진으로 구성되어 쉽게 읽을 수 있는 데다,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를 통해 사회의 작은 변화를 이끌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모았습니다. 누구나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플랜투비, 『1℃ 인문학』, 다산초당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권상미 옮김, 문학동네
- 텔리 트루먼,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 천미나 옮김, 책과 콩나무
- 주제 사마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정영목 옮김, 해냄
- 말로 머건, 『무탄트 메세지』, 류시화 옮김, 정신세계사
-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이레
- 에크낫 이스워런, 『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 , 박용희 옮김, 바움
- 레몽 장, 『책 읽어주는 여자』, 김화영 옮김, 세계사
-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이성규 옮김, 범우사
- 하상욱, 『서울시』, 중앙books
공동기획
책읽는사회문화재단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