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독립과 행복
20대여, 고민하지 말고 닥치는 대로 하라
여인혁
선생님, 저는 20대로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독립을 연습할 때 나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그런 것들이 차이가 있나요?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정확히 자신이 알 수 있나요? 또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너무 어렵습니다.
황상민 교수
그렇죠. 그럴 땐 어떡해야 할까요?
여인혁
음, 일단은 좋아하는 걸 하면 되나요?
황상민 교수
자신이 좋아하는 일 무엇인지 먼저 찾아야 해요. 상당히 힘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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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혁
그럼 결과에 상관없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찾아야 할까요?
황상민 교수
심리학자로서 난 자신 있게 이야기해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닥치는 대로 해내라고. 자신이 주어진 일을 해냈을 때, 자신감이 생기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하면 돼요. 잘할 때까지 한다는 각오로. 닥치는 대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은 잘 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죠.
여인혁
닥치는 대로 해보려했지만, 중간에 지쳐서 포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황상민 교수
포기했다는 말은 반쯤 발을 걸치고 흉내를 냈지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해낸 게 아니죠. 내 경우, 나는 심리학 공부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수줍음이 많아서 낯선 사람 만나는 것이 어려웠죠. 그래서 대학시절 대부분 혼자 시간을 보냈어요. 친구들이랑 조차 어울리기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내가 힘들어 하는 부분도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자’ 하고 일단 해냈죠. 그렇다고 학점이 잘 나오거나 하는 등 당장에 결과가 좋았던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어느 시점에 ‘아, 내가 이럴 수도 있구나.’ 하고 느끼죠. 그 기간은 10년이 될 수도 있어요.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잘하고 있는지’ ‘결과가 좋은지’ 는 중요하지 않아요. 때로는 참으면서 할 때도 있고, 좋아서 할 때도 있어요. 내가 좋든 싫든 일단 해내는 것이 중요하죠. 결과적으로 나는 수줍음이 여전히 많지만, 지금 내가 사람들 앞에서 강의할 때 사람들에게 안 좋은 평가를 많지는 않은 것을 보면…….(웃음) 또 사람들이 나 보고 글을 잘 쓴다고 해요. 내가 원래 글을 잘 쓰는 사람일까요? 아니에요. 난 피하지 않았고 꾸준히 하다 보니 해낼 수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재미도 있었고요. 그리고 많은 친구들이 내가 잘하는 것을 찾고자 하지만, 잘하는 것은 자기가 해보고 잘 되면 잘 하는 거에요. 여러분은 전공이 뭐에요?
여인혁
언어학이요.
김민경
국문학.
이혜인
가족아동학.
황상민 교수
예, 이런 상황에서 각자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을 거예요. 그러나 꾸준히 주어진 일을 해내면 되는 거죠. 그러나 보면 10년 후에는 내가 상상도 못했던 일을 하게 될 수 있어요.
세상으로부터 독립하라
김민경
독립이란, 세상으로부터 독립한다는 의미이기도 할까요?
황상민 교수
세상으로부터의 독립은 언제 딱 이루어질까요?
이혜인
죽을 때! (웃음)
황상민 교수
그렇다고 가정을 했을 때, 평생 세상으로부터 독립을 하지 못하면 평생 세상의 눈에 맞춰야 해요. 그럴 필요 없죠. 물고기는 물속에 살잖아요. 물고기가 물에 맞춰 사나요? 아니죠. 자기 삶을 살 뿐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김민경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요, 제가 하고 싶은 건 공부라고 했을 때, 내가 좋아하고 실제로 공부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내가 공부하는 모습을 좋아해주니까 거기에 맞춰서 하는 건지. 아니면 제가 공부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은데 주변에선 공부하는 사람을 오히려 더 좋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그 기대 때문에 내가 공부하려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황상민 교수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그게 자기 삶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겠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선호하는 길이 있어요. 그 길을 가는 게 맞느냐 틀리냐를 떠나서 자기한테 내가 무슨 길을 가고 싶어 하느냐 그 질문을 던질 수는 있겠죠. 오늘도 내가 연구생들한테 질문을 했어요. “다시 대학교에 들어오면 어떻게 살 거냐?”하는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과거와 다르게 살고 싶다는 대답을 했어요. 근데 재밌는 게 내가 대학교 1학년에 들어와서 ‘내가 앞으로 뭘 할까? 공부를 계속 할까?’ 아니면 2학년이 되면서 ‘고시를 볼까?’ 이런 고민도 많이 했거든요. 근데 고시를 하면 내 삶이 너무 갑갑할 거 같았어요. 난 자유롭게 살고 싶었기 때문에 고시는 나랑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 생각은 하지 않게 됐어요. 단지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단 이유 때문에요. 그런데 어떤 친구는 고시를 해서 지금 공무원으로 지내는 친구도 있어요. 가끔 내가 그 친구와 만날 때면 항상 내가 더 자유롭다고 생각이 들어요. 내가 원했던 그 자유로운 삶이구나. 그렇다고 그 친구가 문제가 있지는 않아요. 안정감 있게 살고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할 수도 있고, 높은 공무원이니까 사람들이 굽실거리기도 하겠죠. 그 차이죠. 근데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고시를 하고 싶어 할지도 몰라요. 왜냐면 이미 내 삶은 경험을 했으니까요.
김민경
제 선택에 대해 후회를 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황상민 교수
후회는 아니에요. 난 내가 그냥 선택한 걸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걸 해 보고 싶은 거죠. 자기가 선택한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단 뜻이죠. 다른 기회가 있으면 다른 걸 하면 되죠. 그 대신 그 기준은 내가 원하는 거에 가능한 맞추려고 하겠죠. 남들이 좋다는 걸 기준으로 따라가고 싶지는 않아요. “남들이 하니까 저도 해야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건 독립하겠다는 그 마음은 아니에요.
낙오를 두려워하지 말라
명변석
저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질문이 20대를 대변하는 질문이 아닐까 해요. 진로나 직장 문제에서 낙오될 수도 있는데 ‘나는 태어난 거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밥 먹여주는 사람도 없는데 이런 거만으로도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황상민 교수
여러분이 낙오될 가능성은 없어요.
전체
정말요? 낙오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황상민 교수
여러분이 낙오되면 나 같은 사람도 낙오된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낙오라는 건 어떤 기준이에요?
김민경
사회적 지위 같은 거 아닐까요?
황상민 교수
그럼 나도 낙오됐네요. 나도 안철수 씨 정도는 돼야 낙오된 게 아니겠네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가 누구를 기준으로 사는 거예요? 낙오라는 건 사회적 지위와 인정과 부를 기준으로 하는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 난 열 받아요. 1년에 연봉 10억씩 받는 인간들 보면 말이죠.
김민경
저도 화가 나네요.
황상민 교수
그렇죠. 하지만 10억을 받기 위해 써야하는 에너지와 시간을 생각하면 난 싫어요. 1억 원을 받든, 5천만 원을 받든, 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시간 쓰고 싶거든요. 어떤 하나의 기준으로 인한 낙오라는 건 없어요.
김민경
그게 머리로는 이해가 가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면, ‘그렇지. 내 인생의 주체는 나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지. 남들이 뭐라고 하든.’ 하는 게 있는데 막상 실제로 그렇게 하기는 힘들 것 같기도 해요. 저희가 토의를 한 적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혼 가정의 자녀라는 사실이 ‘주홍 글씨’로 남아있음에도, 스스로 사람들한테 당당하면 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 사람 속에 상처는 남아있는 거처럼 말이죠.
황상민 교수
그 부분은 상당히 개인적인 거예요. ‘나는 우리 부모님이 왜 이 모양일까? 좀 더 번듯하면 좋을 텐데.’ 이런 생각 해봤겠죠. 근데 대학교 들어와서는 ‘나는 나이고 부모님은 부모님이다’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 주춤거릴 때가 있었어요. 내가 어떤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었어요. 근데 그 사람이 “부모님은 뭐하세요?” 하고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 때 내가 약간 주춤했어요. 내가 ‘우리 부모님은 뭐해요.’ 라고 말할 때 자랑스럽단 느낌으론 이야기를 못 했어요.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런 건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처가에서나 아내가 굳이 이야기를 안 꺼냈어요. 사실 그걸 문제 삼았으면 결혼을 안 할 생각까지 했었어요. 내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일 수도 있고, 내 안에는 그런 게 있었어요. 여러분의 배우자가 될 사람 집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느 집 하객이 많이 있느냐, 하객 자리는 몇 석 잡을 것이냐, 그런 게 있어요. 특히 우리 부모님은 시골에 계시고 그래서, 나는 어떤 잔머리까지 굴렸냐면, 결혼하기 며칠 전까지 결혼식 한다는 걸 별로 안 알리고 결혼식 하자마자 하루 이틀 뒤에 아예 미국으로 가는 그런 계획까지 잡았어요. 일종의 자기방어처럼 ‘이건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야’ 하면서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는 부분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누가 나한테 “너 왜 그러냐?” 이렇게 따지면 내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에서 상당히 큰 상처를 받을 수 있겠죠. 진짜 하객 자리를 몇 석 잡을 거냐 한다면 “저는 10석만 잡으면 돼요. 그쪽에서는 400석을 잡고 싶으면 잡으세요.” 이렇게 되게 뻔뻔하게 말하는 거죠. 우리가족은 달랑 부모님하고 시골에 있는 몇 분 친척들만 결혼식에 오는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겠죠. 어쨌든 고마운 건 그런 것들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에요. 이건 자기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문제죠. 그렇다고 나도 내가 완벽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대한 불만을 안 가지려고 해요. 완벽한 삶, 행복한 삶,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20대에 행복을 논하기는 이르다
명변석
한 가지가 단락이 정리된 것 같은데 제 생각에 그런 내용을 20대의 이야기로 좁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교수님께서 보시기에 만나는 학생들이나 20대의 사람들이 과연 스스로 행복해지고 있는 것 같은가요?
황상민 교수
저는 20대에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해요. 20대는 행복해지기가 힘들어요. 아직 잘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를 보고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꽃봉오리는 아직 웃기는 상태에 있는 거예요. 인생에서 20대는 바로 그런 상태예요. 행복해지는 거는 적어도 한 40대 정도 돼야 해요. 자기 삶에 대해서 감사하고, 또 50대, 60대가 되면서 그런 걸 느낄 수 있을 때, 그 건 마치 꽃이 활짝 핀 거하고 마찬가지예요. 20대에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건 꽃봉오리에서 끝내고 싶다는 말이에요. 20대는 자기가 원하는 행복을 위해서 지나가는 과정인데 거기서 벌써 어떤 행복이라는 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누군가가 저에게 20대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질문한다면 저는 ‘No, thank you.’라고 답해요. 왜 우리가 청춘은 아름답다고 이야기 하는지 알아요? 청춘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세뇌를 시켜서 그 상황을 참고 견디고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런 말을 쓰는 거라고 나는 농담 삼아 이야기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20대는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연습하는 단계예요.
여인혁
그렇다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건가요?
황상민 교수
그런 측면에서는 일맥상통하는데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그래서 어쩌라고?
이혜인
그러면 20대가 가장 많이 고민을 하고 뭔가를 찾아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독립연습이 가장 필요한 시기이고, 결국 독립은 전 생애에 걸쳐서 계속 연습해야 하는 건가요?
황상민 교수
오, 훌륭해요. 아까 그랬잖아요. 20대는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때이고, 30대, 40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족으로부터 자식으로부터 독립하는 때라는 점이에요. 그게 50대, 60대까지 일어나는 일이에요.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면 자기 가족을 만들어 나가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가족을 만들 때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독립은 배우자로부터의 독립이에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결합을 하고 가족이 되면서부터 두 사람은 끊임없이 독립하려는 연습을 하고 그 관계가 돼야 돼요. 내 책 중에 ‘짝, 사랑’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결혼을 통해서 부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적 독립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또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의 책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책을 읽고 나면 결혼하는 걸 더 두려워하기도 해요. “어떻게 결혼해요?” 이런 질문을 하는데 결혼 생활에서 행복은 독립된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기 힘들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을 왜 하느냐고 물어보면, ‘혼자 살긴 너무 외롭고 힘드니까 같이 살면 더 행복하지 않겠어요?’라고 답하곤 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진짜 나름대로 행복한 사람은 그 부부관계에 있어서 서로 독립적인 존재가 될 때 진짜 행복한 거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