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다른 책들에 관해
위 :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 선생님의 생각을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마음에 『미국인의 짐』과 『뉴라이트 비판』도 찾아서 읽어 보았습니다.
김기협 : 오, 그랬구먼. 그런데 『미국인의 짐』은 어디서 구했나? 그 책은 이미 절판된 지가 오래되었을 텐데?
위 : 아, 저희 학교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방금도 강조하셨지만, 지금 우리나라 엘리트 계층의 엘리트 의식이 상당히 기형적이라는 지적이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뉴라이트 비판』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께서 작금의 세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기에 쓰신 듯한 인상이 강했습니다.
또한 『미국인의 짐』을 읽으면서는 아까 선생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지금 현실적으로는 미국이 세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에겐 그에 걸맞은 책임감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시 이 두 책에 관해 조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기협 : 사실 『미국인의 짐』은 책으로 내려고 생각하고 쓴 것은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 칼럼으로 연재했던 내용을 묶어보니 책이 된 것이라서, 하나의 책으로서 주된 논지나 방향이 있는 건 아니지. 다만 어떠한 기간 동안 내가 쓴 글이니만큼, 그 기간 동안에 내가 벗어날 수 없었던 생각들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점이 있겠지.
『뉴라이트 비판』이라...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네. 하나는 테크니컬한 가치기준에 따른 것이지. 『미국인의 짐』을 예로 들어보자면, 사실 그 글은 내 사상을 전달하는 식의 가치를 갖진 못했어. 다만 어떠한 정보를 모아서 풀어내는 그 기술을 가지고 서비스한다는 것이지. 예를 들어 보스니아 사태를 항우와 한신 얘기에 빗대어 필부의 용기에 관해 전달했더니 신문사를 포함해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가진 정보 가운데 그럴 듯한 것을 가져다붙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나 자신이 그런 글을 쓰면서도, 이런 글이 책으로 엮여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그렇다보니 내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는 더욱 자신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막상 사상을 펼쳐놓고서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자꾸 바꾸고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어? 따라서 나의 어떠한 사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서야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거지.
그런 과정을 거쳐 5년 전부터 집필을 시작한 책이 『밖에서 본 한국사』였는데, 그 책을 내면서는 나름대로 생각한 집필 방향이 있었어. 그러다가 『뉴라이트 비판』을 쓰게 되면서 한국 근현대사에 집중하여 『망국의 역사』도 쓰고, 지금 쓰고 있는 『해방일기』 작업도 시작하게 된 거지.
사실 『밖에서 본 한국사』를 쓸 때까지만 해도, 역사를 볼 때는 ‘밖에서 본 눈’을 투영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소였고, 중점을 둔 것은 역사학도로서 역사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를 하되, 시사적인 감각을 조금 곁들인다는 정도였어.
그런데 『뉴라이트 비판』을 쓸 즈음에 교과서 파동 등의 문제를 지켜보자니 당장 역사 교육만 놓고 봐도 상당히 이상한 흐름이 전개되고 있었기에, 이 책은 역사적인 필요성을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어. 따라서 그런 흐름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논한 책이 『뉴라이트 비판』이었고, 그 후로는 4년째 계속해서 한국 근현대사를 심화하여 서술하려 하고 있지.
위 : 아,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망국의 역사』, 『미국인의 짐』, 『뉴라이트 비판』 세 책을 읽으면서도 의외로 가장 두꺼운 『미국인의 짐』이 가장 쉽게 읽혔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폭넓은 독자층을 고려하고 쓰신 칼럼의 특징인 것 같습니다.
김기협 : 음, 그렇지. 사실 같은 예시를 들더라도 『미국인의 짐』에서는 현 세태를 알기 쉽게 비유적으로 이해시켜주는 역할을 했다면, 다른 두 책에서는 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어.
인터뷰를 갖기에 앞서, 도서관에서 『망국의 역사』외에도 선생님의 저서들을 찾아 읽어 봤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망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물론이고, 선생님의 주장과 변화를 살피는 데도 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비록 이번에는 기회가 닿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개인적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시병일기』 또한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대학생과 역사
위 : 방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책의 독자를 어떤 층으로 상정하셨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의 짐』은 누구라도 읽을 수 있게 쓰셨다면, 『뉴라이트 비판』은 이미 일정한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을 대상으로 쓰셨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망국의 역사』는 이 두 책의 중간 정도로 느낍니다만, 선생님께서 이 책을 쓰실 때 상정했던 독자층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김기협 : 사실 내가 제일 이 책을 읽기 바라는 사람들은 역사교사들이야. 나름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게 된다면, 어떤 주제에 관해 자기네 학생한테 얘기를 할 때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혹은 ‘이런 통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면 해.
이에 비하자면 『미국인의 짐』은 중앙일보를 보는 독자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의 글이었다 보니, 어떤 사상을 전달하기보다는 하나의 정보를 제공하자는 뜻이었어. 그런 점에서는 『망국의 역사』는 『뉴라이트 비판』과 한 갈래로 묶일 수 있겠지. 내가 보기에 어떠한 문제점이 있고 그에 관해 내가 배운 것을 토대로 내 주장을 펼치는 것이니까.
위 :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망국의 역사』를 읽는 계층으로 대학생은 상정하지 않으셨던 건가요? 물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최우선으로 고려하신 독자층은 그러한 대학생들과 예비 대학생을 가르치는 역사교사들이었겠지만, 대학생들이 직접 읽게 될 경우는 가정하지 않으셨던 것인가요?
선생님 : 기본적으로는 나 같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고 쓴 거긴 한데, 나와 비슷한 학식과 전공을 거친 사람들이 어떠한 문제로 아직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점을 다시 한 번 돌이켜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쓴 거지.
물론 책이 잘 팔리는 작가라면 자기와는 다른 독자들의 성향 같은 것을 치밀하게 포착하고 그에 맞춰 잘 팔리는 책을 쓰기도 하겠지. 하지만 내 경우에는 최대한 내 생각을 많이 담아서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많이 팔리는 것보다는 많이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었어. 그러다보니 독자들의 성향이나 능력 같은 것은 많이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고.
위 : 지금 한국의 대학생은,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요구하는 서울대를 제외한다면 역사를 전혀 모르더라도 명문대생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행정고시 응시에 한국사 능력시험이 의무조건이 되자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학생들이 반발하기도 하는 등, 현재 한국 대학생의 역사 지식과 인식이 갈수록 수준이 떨어져가고 있다는 것이 저희 생각입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선생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기협 : 10여 년 전이었던가, 역사학 대회의 공동주제가 <분단 시대의 역사인식>이었어. 그때 독일 연구학자들이 농담 삼아서 ‘독일이 통일될 수 있었던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독일에는 국사 교육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사실 근대의 역사학은 아주 구체적인 목적의식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어서 눈앞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에는 해롭게 작용하는 일이 잦아. 한국의 역사교육 역시 그 내용에서 반공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보니, 어떤 측면에서 통일이라는 목적에는 저해되는 경향이 있지. 또 항일 운동을 부각시키는 역사 교육은, 우리의 당면 과제 중 하나인 동아시아 연대에는 해롭게 작용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야.
나는 이 책 앞부분에서도 밝혔지만, 망국의 의미를 국가 정체성, 민족 정체성, 문명 정체성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보자고 했어. 그 가운데서도 국가 정체성을 가장 하위로 놓고 그 위에 민족 정체성, 문명 정체성을 차례로 의미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했지.
사실 탈근대는 현대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추세라고 봐. 그렇다면 탈근대의 추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무엇보다 민족 정체성과 문명 정체성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봐. 나는 탈근대에서는 근대 과학의 주축이었지만 개인이 파편화되기 쉬운 원자론적 세계관을 버려야만 한다고 생각해. 따라서 탈근대에서는 보다 유기적인 체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사실 이건 좀 극단적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근대를 하나의 과도기로 바라보고 있어. 탈근대 이후에 상당히 안정적인 체제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전 세대에서 장기간 동안 안정적인 위치를 누렸던 중세에서 바로 성격이 다른 다음 체제로 이어질 수 없었기에 그 사이에 생겨났던 고통의 시대가 바로 근대라는 것이야.
인류가 이러한 과도기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멸한다면 모르겠지만, 이 200년간의 고통을 이겨내고 안정을 이루고 난다면 근대를 끔찍한 시대, 암흑시대라고 이름붙이고 되돌아보게 될지도 몰라. 결국 인류가 존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최근 200년 동안의 방식으로는 안 되거든? 이러한 근대의 논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근대에 접어들면서 잃어버렸던 민족 정체성, 문명 정체성 같은 것들이 새로운 시대의 재료로 활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위 : 그렇다면 아직까지 지식을 갖추지 못한 대학생들에게 역사 입문서로서 추천해주실만한 책이 없으신지요?
김기협 : 사실 책이란 것은 워낙 많은 법이니까(웃음). 다만 내 책은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하긴 해. 내 글쓰기의 기본 목적은 내 밑천을 통해 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거든. 다만 그것은 틀린 생각을 지우고 올바른 생각을 주입하겠다는 권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방법과 방향도 있다고 생각을 넓혀주는 것이었으면 하지.
왜 역사인가? - 인터뷰를 마치며
김기협 : 아 사실 나도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위 & 추 & 황 : (긴장하며) 아, 예!
김기협 : 아마 이 수업에서 인터뷰 서평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책을 고를 수 있는 범위가 주어졌을 텐데, 굳이 내 책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지? 지금의 생각이 아니라 선택했을 때의 생각을 들려줬으면 하는데.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비록 미리 상의하여 각자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우리의 생각을 드러내어 선생님과 맞설 순간이 온 것이다. 각자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생각을 자아낸다.
황 : 제가 책을 선택할 때 그 분류가 소설, 역사, 시사, 자연과학이었는데요. 사실 저는 자연과학생으로서 자연과학 분야에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소설 분야 역시 현대소설이다보니 고전적인 깊이나 인생의 성찰이 적은 것 같아서 배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사와 역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예전에 근대에 들어 국가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된 계기나 과정을 언급한 책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서 이번에 조선과 근대라는 시점에서 접근해 보고 싶었습니다.
김기협 : 음, 그렇군... 추 군은?
추 : 제 경우에는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저는 평소에도 제 자신이 다른 아이들보다는 역사를 다양하게 바라본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그에 걸맞는 깊이가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조선과 근대에 관해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김기협 : 오, 그런가. 그럼 위 군은 어떻지?
위 : 저는 평소부터 역사란 하나의 거울 같은 것으로서, 매일 바라보고 찾아보는 것은 아니더라도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사실 역사란 것이 지금은 하나의 흐름으로 정립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하나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고 작은 시도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선택과 시도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역사는 현대의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려할 때도 도움이 되어주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진로의 선택이라거나, 작게는 졸업논문의 주제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나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가치 판단 기준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역사가 큰 힘이 된다고 여겼기에 역사 분야의 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김기협 : 음, 사실 나는 90년도에 교단을 떠나고 난 뒤로는 학교 강의를 해본 적이 없어. 그러다보니 학생들과 접촉이 없었는데, 사실 학교에 있을 때는 강의하기도 싫고 했는데, 정작 학교를 떠나고 강의도 없이 지내다보니 뭔가 요즘 학생들이 어떤 감각을 지니고 어떻게 느끼는지를 모르고 지내게 된 것이 참 아쉬웠어. 고기가 물 떠나고서야 물 고마운 줄 안다는 것이겠지? (일동 웃음) 그래서 오늘 모처럼 세 학생과 함께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요즘 학생들 생각의 한 모퉁이라도 접할 수 있어서 참 반가웠어.
위 & 추 & 황 : 저희야말로 많이 배우고 돌아갑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도, 무작정 마음이 홀가분하지만은 않았다. 비록 하나의 과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은 있었지만 선생님과 하루를 보내며 많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사실 우리는 오늘 역사의 문을 두드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역사의 주체로서, 또한 역사를 공부한 햇병아리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남모르게 각자 가슴에 새기며 집으로 향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