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근대화와 도덕적 근대화
황 : 저는 선생님께서 언급하셨던 내용 가운데 일본이 가져온 기술 발전의 근대화가 가져온 충격이 없었더라도, 조선은 그 나름의 자생적 근대화가 가능했었으리라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에 관해 좀 더 자세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김기협 : 이건 내가 서양을 너무 우습게 보는 편견이 섞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붕당 정치를 포함해서 19세기 들어 세도정치로 넘어가기 전까지도, 정치 제도에 있어서는 서양이 동양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봐. 붕당 정치가 어떠한 폐단을 낳았다 할지라도,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지 않나? 서양에서 벌어진 사태들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는 거지.
본래 국가란 혼란과 폐단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야말로 그 본질인 법이야. 19세기 들어 서양이 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는 반면에, 동양은 중세 시대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긴 한데, 사실 내가 보기엔 동아시아의 그 정체를 오히려 부러워해야지 왜 경멸하는 것이냐는 의문이 있어.
화약의 예를 들어볼까? 『삼국지연의』에 보면 제갈공명이 남만 정벌에서 화약을 사용하고 크게 후회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혹시 알고 있나?
위 : 예, 선생님의 다른 책에서도, 기존의 살상이 개인 대 개인의 살상이었다면 화약의 사용은 공간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써 자신이 누구에게 상처를 입히고 누구를 죽이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는 폐단이 있다고 지적하셨지요.
김기협 : 바로 그래. 사실 제갈공명 시대부터 그 정도로 화약을 운용했다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화약 사용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얘기 아니겠어? 그런데 유럽은 오랜 시간이 지난 르네상스시기에 이르러서야 화약 사용법을 배워갔지. 그런데 이후 노벨의 다이너마이트에 이르기까지 그 짧은 시기 동안 별별 희한한 발전을 이루어냈어. 반면에 중국은 천년 동안 화약을 사용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살상력의 발전을 보이지 않았던 데에는, 공명이 스스로의 덕을 손상시켰다고 한탄했던 그러한 관념이 어떠한 식으로든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해. 항해 기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지. 안정된 왕조일수록 오히려 항해 기술 발전을 억제시켰어. ‘진보란 무조건 좋은 것’이란 근대 유럽의 믿음과는 달리, 어떻게든 급격한 변화를 억제하여 백성들이 힘들어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라고 여겼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이 책에서도 주장하는 것이지만, 근대화의 길은 기술 발전이라는 하나의 길만이 아니었어. 동아시아에서도 분명히 그러한 탈 중세의 길을 걷고 있었어. 다만 그 길이 완만한 길이었기에 추월당했을 뿐이지. 그런데 정작 추월해갔던 그 차가 위험한 차였다는 사실이 이제 와서야 밝혀지고 있으니, 그렇다면 동아시아가 서세동점의 시기 이전에 모색하고 있던 근대화의 방법 또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검토해볼 가치가 있지 않겠어?
황 : 이제 우리사회도 근대적인 생각이 팽배했던 사회에서 벗어나 탈근대사회를 향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기의 한국사회가 어떠한 모습을 갖추어야 할지 선생님의 생각을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기협 : 사실 우리가 여태까지 해왔듯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평화나 자유를 운운하는 것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하겠지.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속성을 살펴볼 때 앞으로의 변화가 어떠한 양상으로 흘러갈지 예측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내 희망을 피력하기보다도 현실을 읽는 것. 나의 희망이나 가치관 같은 것이 형편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희망을 토로해봤자 기준이 흔들릴 뿐이지.
예를 들어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민주주의를 지켜야 되겠다.’라는 명제를 살펴볼까?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겠지? 그런데 그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질 수 있는지를 충분히 검토하지도 않고서 무조건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것은, 일종의 유사 종교에 지나지 않아.
내가 요즘 프레시안에 올리려고 준비하는 글 가운데 북한의 삼대세습에 관한 글이 있어. 사실 내가 예전에 ‘삼대세습이 어때서?’라는 요지의 글을 썼더니 소위 ‘이정희 실드나 쳐주는’ 종북주의자로 몰린 적이 있거든? 사실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습을 비판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이야. 그래서 이번에는 ‘종북주의자는 버리더라도 종북주의는 함부로 버리지 마라’라는 논점으로 글을 쓰고 있어.
사실 인간의 미래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 맺는 관계가 아닐까? 예를 들어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자연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면, 난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버려야만 한다고 봐. 아, 물론 모든 사람이 자기 차 몰고 다니고 잘 살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자연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행해져야겠지.
위 : 사실 조선의 내재적 근대화 가능성에 관해서는, 선생님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가장 많이 꼽는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이 가져다온 충격적 근대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멸망을 거친 자생적 근대화는 어떤 방식이었고 어떤 형태로 가능했을까요?
김기협 : 사실 자생적 근대화가 반드시 가능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고, 절대로 불가능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좋겠어. 물론 외부의 강압이 없었더라면 결국엔 그 길을 걸어갔을 거라고 보여. 하지만 과연 그 길이 일본과 서양의 교란으로 인한 근대화보다 피해가 덜했으리라고 내가 장담할 수는 없지.
중국의 경우에는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어. 서양이 교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해법을 찾아 근대화를 실행했을 거야. 하지만 조선 후기의 정치 상황을 보자면, 물론 일부 실학자들의 주장에서 중국과 비슷한 인식이 보이긴 하지만 그만큼 실효성을 지니고 있었을지는 의문이야. 아마도 상당한 혼란을 겪은 뒤에 다시 중국식 모델을 따라서 어느 정도 수습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사실 역사학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긴 하지만, 나는 거기에는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어. 그러한 것은 근대 역사학에서 세운 기준일 뿐이지. 근대 이전의 역사 서술에서는 그런 금기가 없었거든. 역사 서술의 본원적 기능을 생각해본다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당연히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도 해.
추 : 이 책의 접근 방식을 살펴보자면, 대체적으로 관념적인 것 같습니다. 경제 사회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대개의 변화는 상층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이와 별개로 하층부에서 일어난 변화는 없었을까요?
김기협 : 물론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살펴볼 점이 많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부분은 본래 내 전공이 아니라서 말이야. 사실 조선사 자체도 내 전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국사 등을 통해서 유교국가의 근본 원리에 대해서는 접근이 가능했거든. 하지만 내가 경제 사회 문제나 그 이상의 영역을 상세히 논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한 거지.
자연과 인간이 맺는 관계야말로 우리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원칙 - 선생님께 직접 들은 하나의 명제가 마음을 비추는 듯 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안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어쩌면 선생님의 우려처럼 더욱 중요한 무언가를 잃고 있는 게 아닐까?
조선이 멸망해간 세 가지 사건
위 : 책 내용에 관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조선 멸망의 원인을 중기의 당파 싸움이나 후기의 세도 정치, 쇄국 정책 등으로 꼽는 데 비해, 선생님께서는 세조의 등극, 광해군의 축출, 정조의 죽음과 세도정치의 시작을 조선 망국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세 사건으로 강조하셨습니다. 이에 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으면 하는데요.
김기협 : 사실 세조의 등극은 유교 국가의 원리를 무너뜨림으로써 조선 왕조의 약점을 스스로 유발한 사건이었다고 보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망국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왕조에 앞으로 계속될 부담을 안겨준 사건이었다는 거야.
사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직접적인 인과 관계에 주목하기 쉬우니만큼, 내가 지적한 그 사건을 지나치게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걱정일세. 그렇다보니 내가 그 부분의 서술에 관해서는 좀 아쉽게 생각하곤 해, 표현을 조금 더 친절하게 해줄 여지가 있었지 않나 싶기도 하고.
추 : 세 사건 가운데, 정조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선생님께서 지면을 상당히 할애하시면서 설명을 해주셨지만, 광해군의 축출에 대해서는 한번 언급이 있는 게 거의 전부였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조금 보충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기협 : 그러니까, ‘택군’이라고 해서 신하가 임금을 고르는 것은 유교 질서가 규정한 패륜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것이었어. 앞선 연산군의 경우에는 그 개인이 워낙 별난 인물이었던지라, 일종의 금치산 처리에 가까운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광해군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을 경계하더라도 그렇게 형편없는 임금은 아니었잖아? 적어도 중치는 갈 수 있는, 큰 결점은 없는 임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자신의 입맛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내쫓았단 말이지.
광해군 축출은 세조의 찬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유교 질서의 근간을 무너뜨린 행위야. 세조의 경우에야 적어도 주도한 세조 자신이 계승권 안에 있던 인물이었지만, 인조반정의 경우에는 인조 자신보다 신하들이 주축이 된 사건이었지. 이로 인해 임금이 신하의 선택을 받고 신하의 눈치를 보는 결과가 일어나버렸다는 말일세.
이미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임금에 대한 인식이 한 차례 무너졌어. 본래 임금이 백성에게 호령할 수 있으려면, 임금이 백성을 지켜준다는 책임 의식이 배경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하지. 그런데 임진왜란 과정에서 임금이 체면을 구긴 거지. 그 자체가 인조반정의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거기에 더해 신하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임금을 갈아치울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유교 원리가 무너지면서 국가의 근본이념이 마비가 된 것이라 볼 수 있을 정도야. 결국 그 뒤의 임금들도 그러한 세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다니게 된 원인이 되었어.
예전에 <용의 눈물>이라는 사극이 나왔을 때, 종전의 알맹이 없는 사극에 비해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 관해 다룬 점이 호평을 받았지. 물론 사람들이 그 정도까지라도 인식하게 해 준 것은 좋지만, 사실 내가 보기에는 군권과 신권의 대립을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서술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 결국 군권과 신권이 어떻게 화합해서 시너지 효과를 내느냐가 유교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는 것인데, 사실상 유교 국가에서 군권과 신권이 정면에서 대립하기 시작한다면 그 시점에서 이미 그 국가는 끝났다고 봐야지.
추 : 그리고 인조반정의 경우에는 외세인 명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도 한 요소로 주목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김기협 : 좋은 지적이야. 사실 광해군이 왕으로서 힘을 얻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로, 명나라에서 정당한 이유도 없이 세자 책봉 승인을 미뤘던 것을 꼽을 수 있겠지. 그런데 사실 이 사태는 명나라에서 특별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보다는, 이미 명나라도 망조에 접어든 국가였기에 생겨난 사태였던 게지. 망국이다보니 거기서 오는 사신들도 자기 이익을 위해 뭐 하나라도 뜯어내려고 일을 망친 것일 뿐이야.
사실 전쟁 중만 해도 선조의 행태에 비해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는 광해군의 태도가 명나라 장수들에게도 인정을 받았거든? 그랬는데 전쟁이 끝나고 정식으로 세자 책봉을 해야하는 단계에서 영창대군도 태어나고 하면서 이런 변화가 생겨난 거야.
황 : 정조 이후의 세태에 관해 눈에 띄었던 부분은, 선생님께서 대원군 시대의 가장 큰 잘못으로 경연을 실시하지 않은 점을 꼽으시고 이를 고종이 암군이 된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신 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보기에는 기나긴 세도정치 암흑시기를 지내온 그 시기 조선에, 과연 유약한 고종을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한 단계 위의 군주, 왕다운 왕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정도의 학식과 능력이 있는 선비가 있었을지 의문이었는데요.
김기협 : 사실 대원군 집정기까지만 해도, 고종 말기의 을사조약 시기와는 조정의 개념이 완전히 달랐어. 을사조약 시기에는 제대로 과거라는 절차를 걸쳐 관직을 얻은, 정통 관료라 할 만한 사람이 무과의 한규설과 문과의 박제순 밖에 없었어. 나머지는 고종의 개인 총신이나 기술자로 채워진 것이지. 이런 사람들은 이전까지의 유교 국가에서는 절대 대신이 될 수 없었던 자들이야.
물론 대원군 시대도 그 앞 시기에 비하자면 선비나 관료의 질이 조금 떨어졌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인 차원의 변화는 아니었어. 결국 인적 자원이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 아니니만큼, 잘 골라내기만 한다면 쓸 수 있었을 거라 보지.
우리는 흔히 당파 싸움을 통해 서서히 조선이 멸망해 갔다고 느끼곤 한다. 하지만 선생님의 책을 읽다 보면, 역사에 큰 충격을 가져다 준 세 가지 사건이 있었고, 그 충격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려가는 과정을 통해 조선이 생명을 잃었다는 새로운 발상을 해볼 수 있었다.
암군 고종과 민비를 비판하면 친일이 되는가?
위 : 고종 암군설에 관한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사실 최근 들어 유독 고종이 사실은 개혁군주였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그에 발맞춰 명성왕후나 덕혜옹주를 다룬 작품도 많이 나오는 과정에서 조금 미화가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책의 내용을 보다보면, 고종이 암군이었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가 각종 근거와 함께 자세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을사조약 체결 부분과 관련해서는 특별한 근거도 없이 그 체결 과정 자체가 고종의 음모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의아했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보충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기협 : 사실 나도 그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해 근거가 부족한 과감한 추측을 한 것 같아 아쉽기는 해. 하지만 그 정치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 글을 쓰려다보니, 역사학계 내에서 지키던 기준이나 원칙에 얽매일 수가 없다는 면도 있어. 마치 확고한 자료가 있다는 식으로 써버렸다면 사기에 불과하겠지만, 확실한 자료는 없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식으로 쓰는 것까진 괜찮다고 생각해.
사실 고종이 음모를 좋아하는 암군이었다는 사실이 도처에서 드러나는 걸 보면, 나는 그 과정에서도 고종이 어떠한 책모를 부리려 했을 거라고 확신해. 특히 권중현 같은 작자는 조정의 대신이라기보다는 고종의 개인 하수인 같은 자인데, 그런 자가 고종의 승낙 없이 함부로 찬동했을 리는 없다고 보이거든. 다만 그랬다는 확고한 증거가 없을 뿐이지.
물론 일반 역사학자들은 확신이 있더라도 언급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긴 해.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밝혔다면 느낌이나 믿음도 충분히 표명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많다고 봐.
황 : 이 책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것이, 선생님께서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내가 이 부분 전공이 아닌데...’라는 식으로 회피?(웃음)하시려고 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까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보니 비록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닐지라도 이 책이 역사학 논문이 아닌 이상 서술을 위해 필요하다면 신중하면서도 과감하게 가져올 필요가 있다고 느끼셨기에 그런 문구를 추가하신 것 같습니다. 제 이해가 올바른 것인가요?
김기협 : 다시 말하지만, 연구에서의 서술과 일반 서술은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거야. 경제사라거나 그런 부분은 내가 취약한데, 만약 내가 조선 말기를 전공한 역사학자라면야 그런 식으로 논문을 쓸 순 없겠지? 당장 ‘네가 그러고도 전공자냐’ 소리를 듣겠지. 나라도 그런 비판을 했을 거야.
하지만 의미있는 생각을 키워놓고서도 연구자로서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서술도 못하고 발표도 못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있는 거지. 그러니 나로서는 역사학도이긴 하지만 연구자나 학자가 아니라 평론가를 내세우게 되는 거야.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역사학자의 논문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있는 한 평론가의 서술을 보고 싶어한다는 전제 하에서 글을 쓰는 거지. 그러다보니 학자의 기준으로는 꺼낼 수 없는 이야기도 꺼내게 되는 거지.
추 : 저는 선생님이 사용하시는 ‘민비’라는 용어가 상당히 신경쓰였습니다. 사실 조선 역사에서 민씨 성을 가진 왕비들이 많았는데도 굳이 명성왕후만을 민비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미 부정적인 시각이 반영된 서술이 아닐까요?
김기협 : 물론 민씨 왕비가 많았다 하더라도, 고종 시대를 언급한다면 민비는 하나 밖에 없으니 헷갈릴 염려는 없겠지. 또한 고종 시대를 살던 당시에는 그 왕비의 공식 호칭이 분명 민비였어. 그러니 내가 그 사람을 언급하는 데 있어 굳이 후세에 추증된 호칭을 알뜰하게 챙겨드릴 필요는 없지 않겠나? 내가 그 사람의 후손도 아닌데 말이야.(웃음)
위 : 그렇다면 장희빈과 한 시대를 살았던 인현왕후 역시 민씨 성을 가진 민비였고, 장희빈과 마찬가지로 생존 당시에는 공식 호칭이 민비였을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현왕후의 후손이 아닌 사람일지라도 민비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은지요?
김기협 : 사실 역사 서술이라는 분야에서는 왕비만 따로 끄집어내어 언급할 일이 많지 않기도 해. 그리고 꼭 언급하게 되는 경우라도 인현왕후라고 하지는 않겠지. 왕비 민씨라거나, 그냥 왕비라고 하면 모를까.
사실 태조의 두 왕비만 봐도 추증된 시호를 붙이지 않고 왕비 강씨, 한씨, 혹은 강비, 한비 식으로 부르지 않던가? 사실 난 저 사람들이 무슨 왕후인지 생각도 안나. (웃음)
사실 고종 암군 문제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너무 흑백론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있어. 일본을 비판하려면 고종이나 민비를 높여줘야만 한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되도 않은 것까지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거든? 그건 어디까지나 동기에서 비롯된 잘못이겠지. 악인과 싸운 사람이라고 모두 선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사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선생님과 인터뷰를 갖기 전에 우리끼리 가졌던 모임에서도 가장 논란이 일었던 부분이다. 그래서 질문을 할 때도 상당히 조심스러웠는데 다행히도 선생님께서 유연히 받아주시며 큰 차원의 설명을 통해 이해시켜주셨다.
특히 일본을 비판하려는 목적을 위해 반대로 고종과 민비를 지나치게 높이려든다는 선생님의 비판은 요즘 추세에 비춰볼 때 느낄 점이 많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