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러 이웃 마을에 간다. 가는 길에 만난 동네 사람들은 당나귀를 끌고 가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며 자세를 바꾸라고 한다. 조언을 받아들이기를 수차례,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당나귀를 업고 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당나귀를 지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부자가 힘이 풀린 그 순간 당나귀는 강가로 떨어지고 부자는 망연자실해한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단순히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익살맞게 그린 단편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대한민국 청춘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멘토 문화가 겹쳐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2013년 한국 청년들의 삶은 멘토들이 이끌어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청춘 지침서가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꾸준히 자리하고 이외수, 안철수 등을 비롯한 유명 멘토들의 발언은 그 하나하나가 청년층이 사용하는 소셜네트워크상에서 ‘좋아요’ 및 공유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만큼 멘토 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도 거세다. 얼마 전 방영된 tvn <대학토론배틀 시즌4>에서 대학생의 현실을 논하기 위해 제시된 주제 중 하나는 ‘20대에게 멘토는 필요악인가’였다. 서울대학교에서도 2013년 봄학기 축제의 슬로건으로 ‘지겹지 아니한가. 청춘 노릇’을 내걸었다. 축제 내용 역시 ‘천 번은 흔들려봐야 어른이 된다’며 만보기를 차고 실제로 ‘천 번 흔들려본’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기존 멘토 문화에 대한 해학과 풍자가 주를 이루었다. 청춘을 위한다는 멘토들의 조언을 ‘이제는 청춘 노릇이 지겹다’고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상식적으로 스승, 혹은 멘토의 조언을 가장 성실히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서울대학교 학생들마저 멘토 문화로부터 등 돌리고 있는 현실의 원인은 무엇일까?
멘토 문화의 한계는 그들을 이 사회의 멘토로 만든 요인, 그 자체에 있다. 그들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오른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하는 조언은 그 특별함으로 인해 주목을 받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조언을 받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비현실적이고 ‘지겨운’ 것이 되어버린다. 설사 장애물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시련기는 결국 성공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현실의 청춘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작은 성공조차도 불투명한 미래이다. 여기에 이 수상한 문제의식의 근원이 있다.
혹시 멘토의 가르침을 잘 따른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특별하게 거듭날 여지라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멘토 문화 아래에서 청춘은 조언을 받는 ‘객체’ 이상에서 나아갈 수 없다.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거듭날 수 없는 것이다. ‘강남 엄마’, ‘헬리콥터 맘’ 등의 신조어에서 알 수 있듯 오늘날의 청년 세대는 소위 부모의 과잉보호가 문제시되고 있는 세대이다. 최근에 몰아닥친 멘토 열풍은 어쩌면 부모에 대한 의존이 ‘좀 더 사회적으로 보기 그럴듯한’ 멘토에 대한 의존으로 포장지를 바꾼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시 당나귀를 파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부자는 과연 당나귀를 ‘실수로’ 놓쳐버린 것일까? 혹은, 공허하게 쏟아지는 조언들 속에서 왜 당나귀를 팔아야 했는지 목적의식을 상실한 채 ‘스스로’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멘토 열풍만큼 강력하게 형성된 최근의 비판 여론은 청년들이 당나귀를 업고 있는 스스로의 우스꽝스러움을 어느 정도 인지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앞서 우화와 같이 멘토 문화에 대한 회의는 당나귀를 놓아버리는, 삶의 목적의식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멘토 문제의 본질은 ‘내 것이 아닌 조언의 과잉’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청춘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들을 이끌려는 또 다른 ‘타인의’ 말이 아니다. 잠시만이라도 그들을 믿고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내버려두자. 당나귀가 병이 나든, 제값을 주고 팔지 못하든, 어쨌든 강물 속에 빠뜨리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