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을 파괴하는 대신 「블랙 팬서」와 같은 새로운 IP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종차별 극복을 위한 적절한 대책이 될 것이다. 디즈니가 진정 차별을 완화하고자 한다면 진저들의 설 자리를 빼앗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리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
“공주가 나처럼 흑인이에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1989」의 실사판 영화 「인어공주2023」의 개봉 이후 흑인 소녀들의 반응이다. 인어공주 역의 할리 베일리는 이 같은 반응에 감동하여 이틀 내내 울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와 「인어공주」는 수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할리 베일리의 캐스팅에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PC주의자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며 인종과 성에 대한 편견을 없앨 것을 주장한다. PC주의의 확산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 이는 창립 초기부터 ‘올바른 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강조해 온 디즈니로서 자연스러운 행보처럼 비추어진다. 그러나 「인어공주」 실사판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고, 디즈니 주가 하락의 기점이 되었다. 차별받아 온 흑인 소녀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겠다는 포부는 어째서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다가가지 못한 것일까.
디즈니가 공감받지 못하는 가장 큰 까닭은 그 행보가 흑인의 권리 보장에만 치우쳐 있으며, 오히려 또 다른 인종차별을 낳는 모순을 보인다는 점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원작의 이미지와 상징성을 무시한 채 흑인 배우를 캐스팅한 뒤, 공분한 원작 팬들을 향해 ‘당신들은 인종차별주의자’라며 매도한다. 이러한 경향은 자회사인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에서도 나타나는데, 「토르」 시리즈의 ‘헤임달’,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MJ’가 대표적 사례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러한 ‘블랙 워싱’이 유독 진저 캐릭터들에게서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두 사례와 「인어공주」의 ‘에리얼’이 그 예시이다. 빨간 머리 백인을 뜻하는 ‘진저’는 가난하고 멍청한 이미지를 상징하는 등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그 차별의 역사가 흑인 차별보다 결코 짧지 않다. 디즈니는 흑인 소녀들에게는 꿈을 심어주었을지 몰라도, 마찬가지로 차별 속에 살고 있던 진저 소녀들의 희망은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진저 캐릭터를 흑인 배우로 대체하는 ‘진저 지우기’는 권력을 사용해 더 큰 차별과 혐오를 가하는 행위이다. 디즈니 권력의 정점에 있는 백인들은 같은 백인 중 혐오의 대상인 진저를 배제하기 위해 그 자리에 흑인들을 기용해 ‘자비를 베푸는’ 일석이조의 행위로 이익을 챙기고 있다. 진저들은 본디 존재하던 캐릭터와 배역을 빼앗기며 디즈니가 휘두르는 영화계 권력에 내밀리는 실정이다. 원작의 금발 캐릭터가 흑인으로 대체된 사례는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가? 이는 자신들의 권력은 내려놓을 생각 없이 대중들을 눈속임하겠다는 악질적인 전략이며, PC주의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관계자들의 말에서는 숨길 수 없는 선민의식이 엿보인다. 이러한 디즈니의 행보는 인종 편견을 없애겠다는 포부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이로써 그들은 이미 ‘올바름’에 대한 당위성을 잃었다.
디즈니의 PC주의는 얼핏 보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완화하고 다인종 및 여성의 영화계 진출을 원활히 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은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반감을 삼으로써 장기적 관점에서 악영향을 끼친다. 「인어공주」의 실패는 흑인 여성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으로까지 번졌으며, 오히려 ‘예쁜 백인 공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도록 하는 역효과를 냈다. 영화 「블랙 팬서」가 「인어공주」와 달리 성공을 거둔 이유는 제작진과 배우 모두가 흑인이기 때문이 아니며, 영화가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영화계는 PC를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사와 개연성을 중시하며 관객들에게 보다 더 설득적으로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다.
원작을 파괴하는 대신 「블랙 팬서」와 같은 새로운 IP를 만들어내는 것이 인종차별 극복을 위한 적절한 대책이 될 것이다. 디즈니가 진정 차별을 완화하고자 한다면 진저들의 설 자리를 빼앗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리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 또한, 흑인 차별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진저와 아시아인 등 차별받는 다른 대상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인종별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이 앞으로의 디즈니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영화 시장 속에서 살아남을 작품은 ‘가르치기 위한’ 영화가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이다. 디즈니의 백 년 역사가 이대로 저물지 않기를 빌며, 그들이 관객의 가슴에 와 닿는 영화로 진정한 ‘올바름’을 추구하는 날이 돌아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