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평은 오늘의 세상을 바라보는 청년들의 목소리입니다. 서울대 학생들이 글쓰기 강의시간(지도강사 : 차익종)에 쓴 시평을 <나비>에 게재합니다. 최근 청년들의 책읽기나 비판적 사고가 종말을 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는데, 이 시평들을 통해 아직 무르익지는 않았지만 현실을 살피는 청년들의 참신한 시선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있다. 물론 구체적 실체가 없는 주장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단적으로 의학 위기라던가 경영학 위기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인문학 전공자로서, 전공을 살려 직업을 구하려 하면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는 게 현실이다. 이런 인문학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인문학(Humanities)을 지칭하는 다른 말로는 ‘Liberal arts’가 있는데, 말 그대로 직역하면 자유 학문이 되겠고, 그 연원을 들여다보자면 직업과는 연관이 없는 교양학부를 일컫는다. 유럽에 인문주의 사조가 유행하기 이전에, 인문학은 법학부 의학부 신학부같이 직업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상부 학부와 분리되어 하부 학부, 즉 교양으로서(Liberal arts) 교육됐다. 이렇듯 전통적으로 인문학은 직업과는 연관이 없는, 다시 말하면 사회적 생산력이 없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농공상업성이 없는(상업성은 일부 있을 수 있겠지만) 인문학은 자신을 위한 학문이 될 수 있을지언정 남을 위한 학문은 아니다. 남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은 쓸모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경제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경영에 또는 상품에 인문학을 접목하여 성공했다는 말이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려오지만 따지고 보면 타전공을 위주로 인문학을 활용한 것이지 인문학 자체로 경제성을 획득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문학을 하는 것만으로는 타인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인문학 전공으로 경제성을 가지는, 거의 유일한 한 가지는 ‘가르치는’ 것이라 본다. 인문학은 좁은 의미로는 문사철만을 말하지만 넓게는 인간에 관한 전반적인 탐구이다. (물론 문사철 자체도 인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소재로 삼는다.) 사람과 부대껴 사는 세상인 만큼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인문학을 통해 접근하고자 하는 욕구는 사회에서 생기기 마련이며,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침으로서 충족시킬 수 있다. 2011년에 있었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풍이 이런 사회적 욕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사람들이 인문학에 기대하는 창의성 또한 인문 전공자의 교육으로서 사회에 전달될 수 있다. 그 형태야 강의를 포함하여 책의 저술 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인문학적 지식을 가르쳐 전달한다는 점에서 같다.
하지만 사회는 저렇게 인문학을 업으로 삼을 만한 수준의 전공자(대학교수 정도를 생각할 수 있겠다.)를 그렇게 많이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우리가 모두 저렇게 될 수는 없다.
이렇듯 대다수는 인문학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생업을 유지하게 되지만 그래도 인문학을 배우면 스스로 큰 가산요인이 있다고 말하겠다. 앞서 말했듯이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탐구이며 인간에 대한 모든 것, 심지어 과학까지도 지나고 나면 인문학의 소재가 되곤 한다. 그래서 간접적으로라도 인문학은 거의 모든 직업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잡스가 애플을 디자인함에 인문학을 활용했다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인문학이 다른 분야의 발전에 자극이 된 예는 많다. 현재 국세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수영 실장은 공무원이 가져야 할 요건으로 역사의식을 꼽으며 공공의 리더가 가져야 할 소양으로 인문학적 지식을 강조했다. 또 고전이라 평가받는 많은 예술작품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예술 분야에서도 인문학이 쓰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인문학은 다양한 분야에서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설령 인문학과 생업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문학은 여전히 스스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또 인문학(Liberal arts)을 자유롭게(liberally) 공부하며 수신한다면 그 자체로도 즐겁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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