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들에게 제시된 집단의 선호도는 완전히 날조된 것이었다. 사람들이 집단의 성향에 따라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자들이 만들어낸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피실험자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의 순응 편향이 지닌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뇌는 우리가 집단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반응한다. 그 믿음이 사실에 근거하는지 아닌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마치 우리를 무차별적으로 끌고 들어가는 지구의 중력마냥 군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고 인간은 여기서 탈출 불가능해 보인다. 설령 ‘집단의 선호’라는 것이 완전히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뜻을 오해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생각이나 기대를 잘못 알고 거기에 순응해버릴 위험을 끌어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다수에 순응하는 편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집단 환상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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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 시대의 여명이 밝아올 무렵, 페이스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신기술이 우리를 다원주의와 표현의 자유의 시대로 인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페이스북의 초창기 시절 동안 제게는 모든 이에게 목소리가 주어지고 힘없는 자들도 발언권을 가제 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준다는 신념이 생겼습니다.” 2019년 10월 저커버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저 논리에 따르자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지금, 집단 착각은 완전히 박멸되었어야 마땅하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온 이래,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불러오곤 했다.
오늘날 집단 착각은 전 지구적 규모로 과열되어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플랫폼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엘름 홀로우에 살던 솔트 여사의 시절에는 집단 착각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라는 게 기껏해야 낡은 종교적 전통과 지역의 역사에 매달리는 것 정도였지만,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만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을 해낼 수 있다. 소셜 미디어로 인해 기존의 관점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관계로, 열혈 추종자를 통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다수의 의견을 만들어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트위터에 수십만 명의 솔트 여사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여러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만든다. 우리가 다수의 견해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회의하게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집단 착각은 더욱 증폭되고, 스스로 침묵을 택하면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집단 착각의 공범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토드 로즈, 『집단 착각 - 인간 본능이 빚어낸 집단사고의 오류와 광기에 대하여』,
노정태 옮김, 21세기북스2023, 25~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