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문제를 조금 말씀 드리면, 제가 그 전에 썼던 『전쟁과 사회』라는 책에 조금 썼고요. 그 다음에 정부에 들어가서 4년 동안 활동을 해왔는데… 제가 학살문제에 약간 필이 꽂힌 거죠. 제가 원래 사회학 하는 연구자이고 학위논문도 노동운동을 했었는데, 학살문제에 필이 꽂힌 이유는 물론 한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그 전부터 쭉 있었지만,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전부터 분단, 남북한의 갈등, 외세 이렇게 이해를 하는데 우리 사회의 심층으로 들어가봤을 때 한국사람들을 굉장히 위축되게 만들고, 행동하지 않게 만들고, 겁나게 만드는 그 근원적인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는 폭력의 체험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폭력의 체험은 물론 꼭 전쟁을 겪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군사정권 시절, 혹은 군대 갔다 온 우리나라의 보통 남자들… 여기에 다 남아있는 폭력체험입니다. 그리고 폭력체험이 한국사람들로 하여금, 뭐 그 사람들이 노동자건, 중산층이건, 아니면 심지어 우리 사회에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공포감입니다. ‘공포를 계속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그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서 그 공포의 실체, 공포의 뿌리를 한 번 쥐고 흔들어야만 우리사회를 제대로 된 정상적인 사회로 굴러가게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제가 학살문제에 천착을 하게 된 이유죠.
인간이 인간에 가할 수 있는 최고의 폭력이 바로 죽이는 것 아닙니까? 생명권을 박탈한다는 건 권력관계의 극도의 불균형, 즉 내가 너의 생명을 곧바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아주 극도의 권력관계의 불균형 상태이고, 그게 바로 전쟁상태입니다. (그리고)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죽일 수 있는 권리, 힘없는 자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 힘없는 자를 성적으로 유린할 수 있는 권리. 즉, 생명권 박탈, 재산 박탈, 성적 유린은 모든 전쟁에서 공통됩니다. 모든 내전, 비행기를 동원하는 공중전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취급되는 것이고, 법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고, 윤리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고, 상호 규범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 그게 전쟁입니다.
‘전쟁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의 원형 체험이다’ 그게 제가 『전쟁과 사회』라는 책에 썼던 내용입니다. ‘전쟁기에 3개월 있었던 인민군점령기간의 체험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원형 체험이다’, ‘피난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의 지배층들의 행태를 보여주는 교과서다’, ‘당시에 이승만 정부나 그 이후의 권력자들이 보여줬던 행태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제가 거기서 피난, 학살, 점령 세 가지 테마를 가지고 한국사회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게 『전쟁과 사회』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했던 것은 학살이었습니다. 학살은 적나라한 폭력행사의 현장이고, 관과 민, 혹은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 혹은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고 죽인 것입니다. 학살의 피해자가 얼마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대한민국 사람들의 그 이후의 행동을 피해자건 방관자건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했다’, ‘피해자들의 행동만 규정한 것이 아니라 제 3자와 방관자들의 행동도 규정했다’,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외국에서 홀로코스트 연구한 사람들이 항상 하는 얘깁니다. 이른자 제3자, 바이스탠더즈bystanders라고 이야기합니다. 제3자들이 학살을 목격하거나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질 수 있는 위축감, 공포감, 혹은 비굴함, 혹은 강자에 대한 추종, 저는 이것이 한국사회 보통사람들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금 국정원 사태를 보면서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에 대한 묘한 부끄러움과 묘한 죄의식과 묘한 자기 정당화 같은 것이 80년 5.18 당시 살았던 한국사람들, 군사정권을 겪었던 한국사람들, 전쟁을 겪었던 한국사람들에 마음 속에 있다고, 어쩌면 지금 촛불시위를 보면서 옆으로 지나가는 샐러리맨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살의 정치사회학이라 그럴까, 이런 부분들을 연구자로서 관심을 갖고, 『전쟁과 사회』라는 책을 통해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피해자들이 너무 억울한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데가 있나… 이렇게 너무너무 억울한데… 이 사람들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두 가지인데요. 최근에 한홍구 교수도 그런 강연을 시작했던데, 역사의식과 역사지식의 이중적 부재(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대한 지식이 지금의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데 활용되고 있느냐는 것이 역사의식이라고 한다면, 역사의식을 가지려면 역사지식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역사지식 자체가 없다는 거죠. 기본적인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역사의식이고 자시고 말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제가 그렇다고 역사지식이 동서양 지식을 관통하는 풍부한 지식을 갖춘 건 아니지만, 제 연배되는 사람들 중에 70년대든, 80년대든 학생운동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대개 현대사 공부를 많이 했고, 제가 생각하건대 저희 세대가 한국의 현대사를 처음으로 제도권으로 올린 사람들이 아닌가 합니다. 제도권으로 올렸다는 건 숨어있는 역사에게 시민권을 갖도록 만들어줬다는 겁니다. 기존 한국의 보수적인 세력들 입장에서는 좌익적이고 빨간 사람들이라는 공격을 했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역사의 복원이 아니었나 생각이 돼요. 지금 얘기하면 약간 웃기는 얘기지만 70년대에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사도 한국 역사학자가 제대로 쓴 책이 없었어요. 어처구니 없는 일이죠. 그래서 돌아가신 송건호 선생님이 쓴 <<한국현대사론>>이란 책을 학생들이 텍스트로 읽었어요. 한국 역사학계를 친일 이병도, 이쪽 계통 사람들이 다 쥐고 있었고, 일제시대 독립운동사를 들춰내게 되면 신간회부터는 좌익들의 역할을 부각시켜야 되는데, 좌익들의 역할을 다 빼다 보니까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안 썼다는 겁니다. 20살, 21살 되는 청년들 입장에서 봐선 도대체 말도 안 되는 현실들이 존재했던 거죠. 그러니까 독립운동사에 대한 재구성부터 시작해서 해방전후사와 해방전후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는 과정, 한국전쟁 같은 것들을 학부생 시절에 대충 기초학습은 했습니다. 텍스트는 없었지만 각종 1차 자료 같은 거 들춰봤습니다. 빨치산을 다룬 소설도 당시에는 굉장히 큰 충격이었기 때문에 이병주의 『지리산』 같은 소설이 학생들에겐 필독서 비슷하게 되었죠. 최인훈 선생이 우회적으로 빙빙 돌려서 썼던 그런 소설들, 어쨌든 그런 소설을 통해서 현대사에 접근하고, 기초적인 교양은 가지고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런 문제에 접근하는 데는 나름대로 지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이 되고요.
그렇지만 거창 사건 같은 학살사건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 이후의 한국현대사와 한국사회에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건 옛날의 학살사건이고, 지금의 사건은 지금, 이렇게 양자를 분리시켜 놓고 봤는데, 노동운동 연구를 하면서 노동현장 폭력이나 쌍용차 같은 폭력 현장을 보면 ‘이것이 전쟁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딱 스쳐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전쟁이 아니면 뭐가 전쟁이란 말인가? 그런데 왜 공권력의 폭력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른바 레드컴플렉스… 지금 종북파 공격 같은… 이런 부분들을 보면서 저는 피학살자들의 삶과 고통과 그 사람들의 어려움이 현대사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습 그 자체다, 얼굴이다, 우리 사회의 얼굴을 들추어 냄으로써 우리 사회에 남들이 건드리기 어려운 성역, 혹은 우리 사회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피학살자들과 만나기 시작하고, 그 사람들을 같이 조직을 하고 운동을 하게 됐죠. 그렇지만 이 책에서도 쭉 이야기했듯이 굉장히 외로운 과정입니다.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제가 짧게 역사학자들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운동에 나서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복원을 하는 데선 대단히 충실한데 역사학자들이 현실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잘 나서지 않고, 사회과학 하는 사람들이 현재 문제에 더 관심을 갖다 보니까 다루는 대상은 과거인데 실제로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과학을 했거나 인권 운동을 했거나 지역에서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가 됐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는 과정이 참 외로운 과정이었고. 동조자도 별로 없었죠.
그렇게 운동을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이 되고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좀 빨리 이런 법이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법이 통과되고 저 같은 사람이 정부관리까지 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인데. 그렇게 해서 따끈따끈한 자료라고 할까요?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정부의 비밀스런 자료들을 제가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개인연구자로서는 만날 수 없는 가해 당시의 군인들, 지휘관들, 이런 사람들의 인터뷰를 딸 수 있었고, 엄청나게 귀한, 펄떡펄떡 뛰는 현대사 자료를 직접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옛날에 여기 아마 40대 이상 50대 정도 된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호적에 빨간 줄 간다는 말 아시죠? 뭐 잘못 하면 너 호적에 빨간 줄 간다. 70년대 노동운동, 80년대 노동운동 하던 여공들에게도 경찰서에 잡혀가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너 호적에 빨간 줄 간다, 너 시집 다 갔다 이거에요. 실제로 당시 여공 출신들 중에 노조활동 하다 결혼했는데 시집에서 쫓겨난 사람들 많습니다. 그렇게 쫓겨난 사람들 많은데 호적에 빨간 줄 간 역사를 바로 볼 수가 있었던 거죠.
호적에 빨간 줄 간 역사라는 건 바로 전쟁기 학살당했거나, 월북한 사람들이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들을 경찰서에서 기록하기 시작한 겁니다. 전쟁 끝날 때, 53, 54년부터. 그래서 이른바 요시찰인 명부라고 해가지고 일제 시대 일본사람들이 독립군들 때려잡을 때 썼던 그 용어를 대한민국 경찰이 그대로 쓰면서 위험분자들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 기록들은 물론 전국적으로 다 남아있진 않지만, 경찰서 군데군데 남아있는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전쟁기 인민군 치하에 들어가지 않았던 대구 이남 지역들, 특히 새로 건물을 짓지 않았던 경찰서를 집중적으로 찾아 다녔는데, 청도라든지, 울산이라든지, 김해라든지, 이런 경찰서에서 노다지를 발견한 거죠. 이른바 옛날 호적에 빨간 줄 간 원본을 (말입니다). 그 원본은 학살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다 기록했기 때문에 누가 학살 당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경찰서에 있는 젊은 경찰들도 자기 경찰서에 그런 자료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경찰들 한자 잘 못 읽잖아요. 막 한자 날려 쓴 초서 써놓은 거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우리 조사관들이 가서 캐비닛 좀 보자고 하면 ‘어, 이게 뭐에요?’ 합니다. 우리 조사관들이 딱 보면 ‘아, 이게 그거구나 !’ 하는데, 웃으면 안 되잖아요. 표정관리하면서 (웃음) ‘아니! 별 거 아닌데요!’ (웃음) 이렇게 계속 접촉해 가지고 ‘좀 봅시다! 복사 좀 합시다!’ 이런 식으로 자료를 꺼낸 겁니다. 그걸 다 우리가 확인해보니까 61년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전부다 폐기지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일선 경찰서에서 폐기하지 않고 남겨둔 자료를 우리가 끄집어내가지고 과거 피학살자들의 원부를 찾은 겁니다. 그걸 기초로 해서 신청한 사람들 중에 당신 아버지가 언제 어디에서 죽었다, 경찰에 의해서 또는 군인에 의해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초자료로 삼은 것이죠. 그리고 호적에 빨간 줄 간 그 원본을 통해서 그게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계속 업그레이드, 혹은 갱신됐단 사실을 알게 됐어요. 수시로 공문이 내려가면 그 중에 일부 사망한 사람이 있으면 그걸 지워버리고. 정권바뀔 때마다 그걸 조금씩 갱신해서 이른바 연좌제의 근거자료로 삼아왔다. 대한민국의 경찰이 온 국민을 사찰을 해온 역사죠.
그리고 그 사찰의 기록을 통해서 본 더 재미있는 일도 참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월남자들 같으면 반공투사로 알고 있고 대한민국에서 아주 인정받는 시민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고 월남자들도 다 사찰을 했습니다. 지금 저기 ‘하나원’ 갔다가 탈북자라고 강연하고 다니는 사람들 있죠? 똑같습니다. 1세대 월남자들도 사찰 대상이었고, 2세대 월남자들도 사찰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진짜 이북에서 공산주의가 싫어서 내려왔는지 아니면 위장전향을 해가지고 남한체제에 적응하기 위해서 왔는지가 사찰 당국으로 봤을 대는 계속 감시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걸 저희가 확인할 수 있었죠.
더 끔찍한 사실은 충청도 어떤 분은 50년대부터 사망한 92년까지 이 사람을 사찰한 기록도 봤습니다. 이 사람 사찰한 기록이 책 2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 사찰을 누가 했냐면 동네 사람이 합니다. 이른바 (망원)이라고 이야기 하는데요. 그러니까 본인이 사찰 당했는지 안 당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예를 들면 오늘은 딸네 집에 갔다 이런 것도 다 기록이 되어 있고, 이사하는 거, 땅 사고 파는 거까지 다 나와있는 정말 끔찍한 사찰기록도 봤습니다. 한 개인에 대한 사찰 기록인데… 이명박 정부에서의 김종익 씨 사찰한 경우는 사실 그 연장에 있다고 봅니다. 경찰들은 항상 동네 혹은 조직에 끄나풀들을 둬가지고 감시 당하는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항상 기록하는 거죠. 그리고 또 군사정권 시절에는 그 사람들을 수시로 경찰서에 부르기도 합니다. 요즘 당신 뭐 하느냐 체크해서 상부에 보고하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