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을 조사하기 위해서 시작했는데 실제로 내용을 보면 온 국민에 대한 사찰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걸 통해서 우리 사회에서 폭력의 기원이라고 할까요, 그런 부분들을 굉장히 많이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들도 많이 찾아냈고요. 학살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저희 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사회에서 권력이나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 이른바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구태여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의 과거를 들추어낼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묻고 지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청한 사람들은 우리사회에서 대체로 바닥층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위원회에 신청을 해서 자기 억울한 사연을 알아달라고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많지만, 가장 끔찍한 사례는 어떤 할머닌데 학살 현장에서 살아난 할머니예요. 학살 현장에서 대체로 총을 쏴서 죽이잖아요. 먼저 구덩이를 팝니다. 구덩이는 대개 죽을 사람을 시켜서 팝니다. 자기 죽을 구덩이를 자기가 파는 거죠. 뒤에서 총을 갈겨서 죽이면 시체들이 떨어지고 겹겹이 쌓입니다. 죽을 땐 대개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사람도 있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 사람도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죽습니다. 그런데 총을 정확하게 안 맞아서 목숨이 붙어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군인들이 간 다음에 도망을 가서 살아난 사람도 있는데요. 그런데 군인들이 자기들이 하는 것이 범죄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도망을 가면 안 되니까 확인사살을 합니다. 시체를 군화발로 저벅저벅 걸어가면서 땅, 땅, 땅, 땅 총으로 쏘고, 총으로 쏜 다음에는 자기들이 얼마나 실적을 올렸다는 걸 보고하기 위해서 귀를 자릅니다. 귀를 자른다는 건 새로운 게 아니고 임진왜란 때부터 있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 그 귀무덤 아시지 않습니까? 일본에 간 귀무덤. 그게 마찬가지에요. 자기들 전과 보고를 하기 위해서 뭔가 증거를 남겨야 하니까… 군인들이 민간인을 죽였다고 이야기를 안 하죠. 예를 들면 빨치산 토벌했다. 너희들이 몇 명 잡았느냐 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귀를 잘라요. 귀를 자르는데 여름 같은 경우 더우니까 소금을 쳐요. 부패 안 하게. 가마니 같은 데 넣어서 소금을 쳐서 나중에 보고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창사건 같은 경우도 그런 사례들이 있는데요. 제가 직접 가진 않았습니다. 물론 제 밑에 직원들이 다 했고 저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목숨이 붙어있었는데,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 죽지 않습니까? 그래서 악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이가 빠질 정도로 이를 꽉 물고 살아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귀가 완전히 잘리지 않고 반쯤 잘린 할머니가 있는데 그 소문을 제가 들었어요. 그래서 조사관들 시켜서 할머니를 설득해서 사진 좀 찍어와라, 사진 찍어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처음에는 응하지 않죠.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세 번, 네 번 설득을 해서 결국은 할머니 얼굴은 찍히지 않고 잘린 귀만 사진을 찍어서 저희들 자료로 (보관했습니다). 물론, 이 자료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고, 정부에 다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좋아지고 정권이 바뀌게 되면 저희들이 수집한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경우가 국민들에게 전시될 날이 올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정말 전쟁이란 무엇이고, 전쟁이란 게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그런 거를 정말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물증이죠. 그런 부분들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런 조사의 과정을 거쳤고, 화해를 시도하려고 당시 가해 군인들 중에서, 지휘관급은 거의 다 사망을 했고요, 말단에서 직접 가해를 한 사람들을 몇 사람 찾아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인터뷰를 들었는데… 그 인터뷰 내용도 참 끔찍한 겁니다. 이 사람들이 사람을 찔러 죽일 때 그 상황을 쭉 설명합니다. 대개는 총으로 쏴서 죽이지만, 총알이 없을 때는 칼로 난자를 해서 죽이기도 하는데… 대검에다가 칼을 꽂아가지고 고참들이 쫄병들에게 시킵니다. 쫄병들은 겁이 나서 안 하죠. 고참이 먼저 시범을 보이면 그 다음에 쫄병들이 따라서 하는데, 처음에는 겁이 나서 못 하다가 나중에는 그걸 반복하게 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사람들 한국사회에 많이 살아있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 많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군대 갔던 사람들 나이가 18, 19, 20 정도 됐기 때문에 지금 그 사람들이 80대 초반 정도로 많이 살아있어요. 평생 입 다물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의 인터뷰를 따고 그 중에 자기가 한 행동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만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했다고 이야기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어서 현장 마을의 피해자들하고 한번 만나게 하려고 이 분들을 설득했습니다. 설득을 하니까 처음에 한 두 분이 승낙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자기 옛날 부대의 동료들과 상의를 해봐야겠다고 하더니만 결국 거절했습니다. 일본군들 중에서 남경대학살이나 독립군 토벌할 때 학살을 저지르고 일본에 돌아갔다가 발언했던 사람들을 동료들이 왕따시킨 것하고 비슷합니다. 아마 베트남 전쟁 때 참전했던 한국사람들도 비슷할 겁니다. 지금 그 사람들 거의 다 살아있죠. 베트남 전쟁 때 가서 베트남 양민들 학살했던 한국 군인들. 어쩌면 그 사람들도 피해자죠. 상부의 명령에 의해서 그렇게 했으니까…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인데…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자기가 커밍아웃을 한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 광주 같은 경우에도 5.18 당시에 진압군으로 투입됐던 사람들 중에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사람 없지 않습니까? 옛날에 ‘당대비평’이나 이런 데서 간혹 익명으로 이야기한 게 두, 세 사람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정도로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스스로 고백하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심지어는 여러분 며칠 전에 권은희 씨 보시지 않았습니까? 내부고발을 했는데 얼마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완전히 병신 만들어요? 광주 경찰이냐?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조직에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완전히 병신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그걸 모를 리가 없죠. 당시 참전 군인들이… 그러니까 다 입 다물고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겁니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피해자대로 입을 다물고 있고, 가해자들은 가해자대로 입을 다물고 있어요. 그런 상태에서 국가가 저지른 범죄가 60년 동안 은폐되어 왔습니다.
국가 범죄가 은폐되는 현장은 지금 예로 들었던 국정원 사태하고 동일합니다.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강도는 약하죠. 옛날에는 학살이라고 하는 범죄였다면 지금은 선거개입이라든지 불법이라든지, 이런 범죄를 저지르고 그것을 조직에 충성을 바친 것으로 미화하고 정당화합니다. 그러면서 조직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 조직이 함부로 휘두르는 칼은 더욱더 무서운 흉기가 되어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죠. 그렇게 본다면 이런 문제를 들추어내어 공론화하는 것이 단순히 역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공권력의 집행자들이나 혹은 대기업 조직이 어떻게 민주화되고 약자들에게 좀 더 우호적인 조직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와 학살의 문제가 맞닿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게 옛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내부고발의 문제죠. 조직에 대한 충성이 강요되는 사회에서는 그 조직이 저지른 범죄가 계속 은폐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어떻게 우리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