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육점 주인이 삼겹살을 써는 동안 여자는 카운터 너머 벽걸이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탈북자 장철진이 층간소음으로 불화를 빚던 독거노인을 살해하고 달아났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팔 검정 티셔츠를 입은 철진은 부풀린 빵처럼 유순해 보인다. 남한에 막 도착했을 때의 사진인가?
저 천진한 웃음…….
여자는 대파 한 단이 솟은 쇼핑 봉투를 들고 황급히 정육점을 빠져나왔다. 바람 한 점 없는 햇살은 비수를 품은 듯 따가웠다. 읍내를 벗어나 인도와 차도가 구분 안 된 도로에 들어섰을 때 트럭 한 대가 여자를 비켜 털털거리며 지나갔다. 길게 자라 사방으로 퍼진 쐐기풀이 슬리퍼를 신은 맨발에 닿아 쓰라렸다. 여자는 종아리에 달라붙는 날벌레를 거친 손길로 쳐냈다. 더위가 성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차바퀴에 깔려 죽은 뱀을 밟으며 버스를 타기 위해 다리를 건너가다 뒤돌아섰다. 하루에 네 번 다닌다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언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팔십 넘은 노파 혼자 살다 이 년간 비워진 집에 이사온 지 석 달이 넘었다. 전 주인이 쓰던 안마당의 삭은 나무 평상과 깨진 항아리들을 치우겠다는 결심은 하루하루 미뤄졌다. 여자는 기운 없이 졸다 일어나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술과 수면제의 도움 없이 살겠다는 결심만은 가까스로 지켜내고 있었다. 그간 수북수북 자라나 거대한 숲을 이룬 집 안팎의 풀들은 여자의 키와 맞먹었다. 가끔은 낫을 찾아 들고 내키지 않는 걸음걸이로 무성한 풀들을 향해 걷다가 돌아서곤 했다. 갈라진 시멘트 틈에서도 싹을 밀고 나와 몸을 불리며 뻗어나가는 왕성한 생명력이 징그러워 집에 불을 질러버릴까, 멍하니 서서 생각할 때도 있었다. 흙담이 무너져 산과의 경계가 불분명한 뒤뜰은 엉겅퀴와 약쑥과 참나리와 넝쿨식물이 뒤엉켜 있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범람하는 흙탕물 속을 휘도는 미꾸라지처럼 중심을 못 잡고 있을 때 받은 철진의 전화는 반가우면서도 가슴이 훅 내려앉았다. 보름 전이었다. 철진이 기다리고 있는 읍내 작은 빵집에 다다라서도 여자는 불안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삼 년 전, 공사판에서 함께 일하던 조선족에게 상해를 입혀 감옥에 간 철진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나도 모르는 사람처럼 살자고 냉정하게 말하는데도 철진은 무구하게 말했다. 나 나가면 큼지막한 두부 사서 삼겹살 많이 넣고 찌개 끓여줘라 희숙아…….
재를 두 개나 넘는 외딴 마을이니 만 원을 추가로 받겠다는 택시기사와 실랑이를 벌일 기운이 없어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가 풀숲 어디선가 희미하게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정거장을 몇 개 거쳐야 드물게 마을이 나타나는 차창 밖은 초록이 무성했다. 여자는 입석에 새겨진 무량리라는 글자가 보였을 때 가만가만 되뇌었다. 무~우~랴~앙~니……. 밭둑을 삼십여 분 넘게 걸어나온 동네에 제 이름으로 된 집이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 무량리 말고 청산리로 가주세요. 사과 농장요.
택시가 사십여 분을 달려 동네 초입에 이르렀을 때 여자는 급하게 외쳤다.
― 청산리? 산 고개 넘어?
택시기사의 말에 불만이 차 있었다.
택시가 마을을 지나 산중턱 흙길로 접어들었을 때에야 여자는 립스틱이라도 사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선숙 언니는 밥은 안 먹어도 화장은 하는 사람이었다. 어둠을 틈타 국경을 넘어야 하는 대사 앞에서도 꼼꼼하게 화장을 했다. 밤일 나가나? 밤을 세워 달리는 침대차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불심검문에 대비해 주의사항을 늘어놓다 브로커가 언성을 높여도 볼터치까지 끝내야 고개를 들었다. 말끔하게 화장하고 있으면 가다가 잡혀도 덜 불안할 것 같다는 게 그녀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사과밭 삼만 평을 가진 한국 남자와 재혼한 선숙 언니는 완벽한 농사꾼이 되어 있었다. 얼굴도 까맣게 타, 수시로 마사지를 해대던 뽀얀 피부는 찾을 수 없었다.
*
시월에 익는 빠알갛고 사랑스런
시나노 스위트 사과는 쓰가루와 후지를
교배하여 육종한 품종으로 향이 일품입니다.
2017년 시월에
청산지기 김덕봉
행복사과 박선숙
― 선숙 언니. 그만 좀 해. 아직 익지도 않은 사과를……. 시월은 아직 멀었다.
― 미리 써놔야지, 사과 따서 택배 보낼 때는 정신없다. 금방 끝난다. 쪼매만 기다려라.
여자는 마루에 걸터앉아, 검은 붓펜으로 사과 홍보 문안을 적느라 등허리를 펴지 않는 선숙 언니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마당에서 놀던 누런 개 두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토방으로 올라와 여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 저것들도 밥 달란다. 점심은 먹고 일하나? 한 장만 써서 복사하면 될 걸 고생을 사서 하나?
― 정성을 보여야 사과 주문하는 사람들 늘어난다.
여자는 마루 기둥 옆에 둔 가방을 계속 들었다 놨다 했다. 철진을 사과 농장에 숨겨달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 화은아! 오늘 우리 감자농마국수 해 먹을까?
선숙 언니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한 마디씩 툭툭 던졌다.
― 오늘 우리 양반 밤에나 온다. 장모 팔순 잔치에 안 갔나.
죽은 아내 어머니까지 챙기는 것 보면 착한 사람 맞재? 북한에 있는 우리 막내 데려오라고 천만 원 쓱 내놓았다.
함지박 가득 담긴 여물을 마당 한켠의 돼지우리로 옮기는 선숙 언니를 보다가 여자는 몸을 일으켰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하나원을 나온 뒤 술을 마시고 찾아와 외롭다는 하소연을 늘어놓는 철진을 위로하다 특별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말도 아직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철진에게도 하지 않은, 지운 아이에 대해선 무조건 감추고 싶었다. 남한에 와서도 정신 못 차리는 너와 살려고 사선을 넘지 않았다고 철진에게 퍼부을 때만 해도 덜컥 임신을 할 줄은 몰랐다.
― 빈집에 가서 뭐 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니까. 집에 엿 붙여두고 왔나?
더 붙잡기를 포기한 듯 따라 나오는 선숙 언니의 눈빛은 끝없이 펼쳐진 사과밭에서 헤어나올 줄 몰랐다. 사과나무 가지마다 야구공만 한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 철진이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다닌대…….
산중턱 사과나무 밭이 끝나는 모퉁이에서 여자는 쑥 쏟아냈다.
― 뭐……? 누구……?
밭고랑에서 주워 올린 사과 몇 개를 티셔츠 앞자락에 품고 오던 선숙 언니가 물었다.
― 철진이. 함께 남한 왔던. 철진이 보면 남동생 생각난다고 눈물바람 하고서는……. 나 철진이랑 좀 사귀었어. 그만 만나자고 내가 선 그었는데…….
― 철진이가 누군데?
여자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선숙 언니를 바라보았다. 짙은 한숨이 뭉텅 쏟아졌다.
― 언니! 그 사과 아까워서 그리 싸매고 있나? 부실해서 떨어진 거다. 버려라 그만.
언니가 라오스에서 복통 일으켰을 때 오밤중에 나가 약을 구해 온 철진이를 잊었어? 밀림 속에서 죽은 내 아이 언니 손으로 파묻은 것은 기억나나? …… 언닌 좋겠다. 좋은 남조선 남편 만나 큰돈 척척 만지며 북조선에 있는 식구들 데려올 수 있으니 얼마나 좋나……?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예전처럼 마구 눈물을 쏟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한번 터트리면 울음은 점점 수위를 높이다가 터진 둑처럼 걷잡을 수 없어질 터였다.
― 철진이 지금 우리 집에 있다. 저녁에 삼겹살 구워 먹자고 했는데. 모르겠다 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