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품위 있는 책 수다
평생 읽지 않았을 책을 읽다
누군가 선정한 책을 함께 읽다보면 한번 쯤 나오는 말이 있다.
‘이 모임 아니었으면 평생 안 봤을 책인데…’‘저 혼자서는 절대 안 골랐을 책이었는데…’
돌아가면서 한 명씩 책 선정을 하다 보면 다양한 분야의 책과 색다른 서로의 취향에 새삼 놀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 한 번도 관심 가져 보지 않은 주제의 책을 읽게 된다.
책모임 참가자에게 전에 즐겨 읽던 분야가 뭐였냐고 물어보니 대부분 자기 계발서, 현대 소설, 종교 서적 등이라 답했다. 첫 책모임하기 전 나는 편독偏讀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름대로는 여러 책을 읽는다고 착각했었다. 다독하는 사람들도 물어보면 흔히들 편향된 독서에 익숙했다. 혼자 읽다보면 늘 내가 좋아하는 책만 찾게 되고 어쩌다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도 크게 감동받지 못해 다시 전에 가졌던 습관대로 선택하게 된다. 읽어보지 않은 책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은 누구나 존재한다. 스스로 부딪히며 골고루 읽기는 다독가도 힘들다.
다양한 책을 함께 읽는데 그치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통해 낯선 책의 두려움을 하나씩 없애갈 수 있었다. 한두 권이 열 권이 되고 스무 권이 되면서 두려움이 호기심으로 변해갔다. 바로 이점이 책모임을 계속하고 싶은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사실 편독偏讀에서 한 획丿만만 더 그으면 편독遍讀이 되는데 뜻이 ‘두루 책을 읽다’이다. 나의 현재 독서 습관을 만든 한 획은 책모임이었다.
유발 하라리가 쓴 600쪽이 넘는 『사피엔스』가 선정되어 함께 읽기로 했을 때 과연 완독할 수 있을까에 대해 스스로 의심할 정도로 400쪽 이상의 책을 읽기는 처음이었다. 과연 내가 완독할 수 있을까? 어렵지 않을까? 나와 같은 생각의 멤버도 있었지만, 함께 읽기의 고충을 나누며 응원했더니 모두 완독하게 됐다. 그만큼 ‘함께 읽기’는 평생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도 거뜬히 읽어 나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를 잘 모르는 빅데이터 vs 나를 발견해주는 책모임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한 권 구매했다. 10% 할인, 포인트 적립, 무료배송과 프로모션 선물까지 혜택이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구매했거나 검색했던 책을 근거로 유사한 책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보여준다.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이 나를 잘 안다는 듯이 신속하게 책을 추천한다. 얼마간은 그 추천이 정말 편하고 좋다 생각했다.
하지만 빅데이터는 나의 ‘의외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잔잔한 에세이보다 비문학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한국 단편은 좋아해도 장편은 읽기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가끔은 추리소설을 읽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추천해준 책 중에 실망한 책들이 많았던 사실을 빅데이터는 알지 못했다. 이제 온라인 서점도 내가 읽지 않는 분야의 추천 책도 보여주면 좋을 듯하다. “○○○ 님, 의외로 맘에 드실지도 모르는 책 추천해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티 나지 않게 숨겨진 취향은 사실 우연과 무모한 시도, 즉흥에 의해 발견된다. 책모임에서 한 멤버가 선택한 책을 ‘억지로’ 읽어가다 만난 나의 숨겨진 취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풍경묘사가 많은 글을 힘들어한다. 낯선 어휘와 질리도록 섬세한 풍경묘사에 갑갑함을 느꼈다. 대체 왜 이리 길어! 소리 지르며 남은 쪽수를 괜히 들춰봤다. 『파이』, 『빨간 머리 앤』, 『마담 보바리』 등을 읽으며 나는 점점 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들이 더 이상 건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묘사에 담긴 주인공의 심리와 분위기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이젠 사실적 묘사 뒤에 숨겨진 작가의 주관적 시선을 발견하는 희열로 읽어 내려간다. 내가 우울한 날 바깥 풍경이 우울해 보이듯 어느 배경묘사 하나에도 작가가 신경 쓰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흔히 말하는 책 읽는 근육이 골고루 발달한 느낌을 얻었다. 문학 읽기를 힘겨워했던 근육이 조금씩 단단해졌다. 만약 다소 지루할 수 있는 묘사가 많은 책을 누군가 선정하지 않거나 읽기를 포기했다면, 문학을 읽는 감성 근육을 골고루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
새로운 독서 취향을 주고 거부감이 있던 부분을 해결해준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모임에서 선정한 책이었다.
타인의 취향에 물들다
『피로사회』, 『인간실격』, 『리스본행 야간열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자전거 여행』, 『멀고도 가까운』, 『철학자와 늑대』, 『소설과 소설가』 등 나 혼자 선택한 책만 읽었다면 이런 책들을 절대 읽지 못했을 것이다. 거부감이 들었던 분야나 선입견을 품고 있던 책을 읽기로 마음먹을 때부터 나의 오만과 편견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누군가는 그 책이 좋고 도움이 되었기에 추천한 것이다. 누군가는 인생의 책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의 취향이 존중받길 원한다. ‘넌 왜 그런 걸 좋아해?’라는 말을 들으면 불쾌하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주고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책모임하기 전에는 거의 없었다. 마음으로는 이해하는 척했지만 행동으로 직접 한 경험은 없었다. 책모임에서 다른 사람이 추천한 책을 함께 읽는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변화가 일어났다. 함께 나누면서 알게 된 새로운 생각과 타인의 취향을 진심으로 공유하고 존중하게 된 것이다. 독서 고수나 전문가의 추천이 아니라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추천한 책이기에 더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으리라. 처음엔 평범해 보였던 그녀들이 특별한 관심과 취향 때문에 달리 보였다.
‘오호~ 이런 책도 읽는구나. 저런 어려운 책도 있다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꼭 선정 도서가 아니더라도 서로 책 추천해 주기는 계속됐다. 내가 추천해준 책을 누군가 열심히 읽고 함께 감탄해주니 괜히 뿌듯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다들 처음이었다. 친한 친구들도 추천해준 책이나 선물한 책도 읽지 않았다는 경험담이 나왔다.
“저 이번에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이난아 역, 민음사을 읽었는데 진짜 누구랑 함께 나누고 싶어요. 시간 되시는 분 중에 읽어보실 분 없나요? 읽고 저랑 얘기 좀 해요.”
친한 친구들과는 책 얘기가 여간 어렵기도 하고 낯간지럽다 했다. 하지만 책모임 멤버들끼리는 이런 부탁 할 정도로 서로의 취향을 서슴없이 제안하고 나눴다. 서서히 그렇게 서로의 취향에 물들었다. 서로의 다름이 공존할 때 얼마나 재미나고 조화로운지 알게 됐다. 학교 친구, 동네 친구, 죽마고우가 아니어도 서로를 이해해주는 ‘책으로 맺어진 친구’가 되어갔다. 서로의 취향에 흠뻑 물들어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부분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
인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세계의 다양한 영역을 모험하는 가장 괜찮은 방법은 불편한 책을 읽는 것이다.─ 『열한 계단』 채사장, 웨일북, 17쪽
독서 근육이 한쪽만 발달되면 낯설고 겁나는 책이 많아진다. 난 특히 어두운 이야기,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책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우울한 이야기가 내 안에 들어와 해소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느낌이 싫었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한강, 창비를 읽자고 했을 때 쉽게 시작을 못 했던 기억이 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이 모두 대출 중이라 별로 구입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금방 되팔려고 마음먹고 사서 읽었다. 어렵게 다 읽고 나서도 마음의 힘듦은 여전했다. 왜 이리 소설에는 수많은 갈등이 존재하고 어두운 면이 짙게 묻어나오는지, 왜 이런 이야기를 시간 들여 읽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주인공과 사건이 그저 낯설고 불편할 뿐이었다. 작가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난 대체 왜 느껴지는 것이 없을까? 맨부커상 수상작이고 유명하다고 해서 읽기는 했으나 모임에 나가 함께 나누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깨닫기가 어려웠다.
모임 당일, 한 멤버의 책을 보니 많은 밑줄과 메모가 적혀 있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에서도 핵심을 읽고 깊은 사유를 한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여러 멤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답답하고 궁금했던 점들이 실타래처럼 풀려갔다.
“저도 누군가에게 내 잣대로 좋은 것을 강요하고 있지 않나 돌아보게 됐어요. 상대방에겐 그게 큰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남의 고통을 자신의 잣대로 축소해버리고, 자신의 욕망대로 치료해버리는 폭력. … 저도 여러 번 당해봤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나 역시 누군가에게 가하고 있는 폭력이 아닐까 싶어요.”“몽고반점 편은 정말 문장력도 있고 군더더기도 없고 좋더라고요. 채식주의자 편은 화자인 영혜의 남편이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감정적으로 단순한 편인데, 그에 비해 말이 좀 많다 싶었어요. 그것보다는 영혜가 화자로 4편으로 마무리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죠. 왠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모르는 폭력이 아버지로부터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다 읽고 나서 이 책 되팔아야지 생각했는데 오늘 나누고 나니 꼭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어졌어요. 제가 너무 충격적인 사건과 인물에게만 초점을 맞춰 생각한 것 같아요.”
모임 첫 시작에 말한 책에 대한 평점이 토론 후에 상승했다. 충격적인 사건보다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느끼며 다시 읽고 싶어졌다. 함께 모여 각자 느낀 점을 나눌수록 서서히 두려움이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수용으로 바뀌었다. 나는 어쩌면 그 어두운 진실을 알아 가는데 필요한 용기와 노력이 귀찮아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주장이나 운동이 과격하다고 느껴진다면 나는 나의 자리가 안락한 자리는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연히 특권 쪽에 자리하고 있기에, 절박한 쪽에 있지 않기에, 그렇게 여겨지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우연히 한 눈@castellio에 올라온 위의 글을 보며 깨달았다. 나는 그런 고통 받는 자리에 있지 않았기에 과격하다 느끼며 피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무관심으로 회피한다고 해서 어떤 진실이 사라지거나 나를 비껴가지는 않는다. 사회의 진실, 내 안의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른 누군가가 선택한 책으로 이런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경험을 겪은 후, 나는 좀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나의 자리가 안락하다는데 안주하지 말고 조금 더 세상의 어둠과 나의 어둠에 관심을 두기로 했다. 그 용기로 여성주의와 가정폭력을 다룬 『아주 친밀한 폭력』정희진, 교양인을 다음 읽을 책으로 선정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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