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금전 집착 증후군
우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돈이라는 물건은 불가사의하게도 삶의 모든 부분을 점거해버렸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수단은 돈이다. 모든 물건에는 가격이 붙는다. 그 명제는 언제나 참이며 대단히 명확하다. 돈이란 우리에게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도구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 ‘부재不在’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본질적으로 세상은 돈으로 만들어지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토록 결핍에 시달리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85세의 연금 수급자 이사벨라 퍼브스Isabella Purves의 생전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지난 2004년이었다. 캐넌밀스에딘버러 시의 한 지구의 주민이었던 이 여성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사람들은 이사벨라가 동네 가게에서 신문을 살 때 외에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느 이웃 주민은 이사벨라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벨라 할머니는 놋쇠로 된 물건들을 항상 깨끗하게 닦았고 계단도 청결하게 청소했어요. 그리고 늘 산책을 다녔지요. 할머니는 아주 건강했어요. 몸이 쇠약해진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일이에요. 할머니는 미스 마플Ms. Marple·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 옮긴이처럼 모닝사이드 오두막미스 마플이 살았던 집 ─ 옮긴이에 어울리는 구식 스타일의 여성이기는 했지만, 진주로 치장하거나 화려한 카디건 세트를 두르지는 않았어요. 대신 두꺼운 타이츠와 긴 스커트로 항상 말쑥하게 차려입었지요.
또 다른 캐넌마일 주민에 따르면 언제부터인가 이사벨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사벨라가 이사를 갔거나 양로원에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2009년에 이사벨라가 살던 공영아파트의 아래층으로 물이 새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관계 당국에 조사를 요청했다. 사람들이 이사벨라 집의 현관문 뒤에 쌓여 있던 우편물 더미를 밀고 들어가자, 이사벨라의 유해가 보였다. 사망한 지 5년이나 지났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사벨라 퍼브스의 사건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이 이야기가 영국의 노인 요양 제도의 모든 허점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쇠퇴해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빠진 영국과 세계 여러 곳에서 고독의 문제는 일종의 전염병이 되어버렸다. 특히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노인들 사이에서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하다. 게다가 정부의 사회 복지 서비스 예산이 만성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도 한몫을 거든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2017년 현재 사회 복지 분야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하루에 900명씩 일을 그만둔다는 보도가 나왔다. 누가 그 사람들을 나무랄 수 있을까? 그들이 받는 급여는 비참할 정도로 적다. 하지만 정부는 그 일자리들을 불필요하게 자원을 소모하는 요인으로 생각하고,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2류 시민쯤으로 취급해버린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가족간의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노인 복지의 공백을 메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노인들이다. 물론 급여도 없다. 그동안 이사벨라의 경우와 유사한 사례는 영국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시장 개인주의의 사고방식에 젖은 이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둥마저 증발해버린 듯싶다. 캐넌마일의 어떤 주민은 몇 년 전 대형 슈퍼마켓 체인이 들어오면서 이곳의 형편이 나빠졌다고 말했다. 영국을 휩쓰는 ‘익명화’의 전형적 행태라는 것이다. “테스코Tesco·영국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유통기업 ─ 옮긴이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전에는 우리 동네에 정육점이나 빵집을 포함해 온갖 것들이 다 있었어요. 그런 곳에 가면 어떻게든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슈퍼마켓을 이용하면 사람들과 어울릴 일이 훨씬 줄어들어요.”
나는 이사벨라 퍼브스의 기사를 처음 읽고 꽤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긴축 재정이나 사회 복지제도의 축소 같은 이 나라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 사건이 보편적인 범위를 벗어난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였을 뿐이며, 이 책의 주제인 호모 이코노미쿠스와도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내게 호모 이코노미쿠스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의 말대로 많은 사람이 동경하는 금융가, 냉혹한 부동산업자, 또는 야심에 가득 찬 기업자처럼 우리 모두가 마음속으로 닮아있는 극도로 합리적이고 금전 지향적인 개인을 의미했을 뿐이다. 나는 이사벨라의 사례에 대한 간단한 메모를 작성한 다음 다른 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자꾸 신경 쓰였다. 이사벨라에 대한 고립과 방치의 문제, 다시 말해 그녀가 금전적 가치라는 울타리의 바깥에 놓여 있었지만, 동시에 얼마나 그 가치에 좌우됐는지의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사악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으며, 무인지대의 덫에 빠진 존재였다. 내 머리가 더 복잡해진 이유는, 이사벨라 본인이 은둔하는 생활을 원했을지 모른다고 뉴스에서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웃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아무도 할머니를 보살피지 않았느냐고 말하겠지만, 내 생각에 할머니는 남들의 관심을 별로 원치 않았어요. 게다가 이 동네도 많이 변했잖아요. 이 동네뿐만이 아니라 어디든 마찬가지죠.” 정말 이사벨라는 과거의 추억뿐만 아니라 최근에 사망한 친지들에 대한 작별 의식조문이나 기념식 참가조차 포기한 채 의도적으로 고독한 삶을 원했을까? 어쨌든 이사벨라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결말로 마무리된다. 보도에 따르면 이사벨라의 사촌 하나는 그녀가 남긴 10만 파운드의 부동산을 포함해서 현금과 아파트까지 몽땅 상속받고 희희낙락했다고 한다.
나는 깨달았다. 이사벨라 퍼브스에게 벌어진 일은 그저 또 하나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닥친 운명은 현대의 경제와 사회를 광범위하게 뒷받침하는 논리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특히 신자유주의 정책의 총아로 불리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했다. 경제적 인간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설계됐다. 그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서구 세계의 경제 전반에 파급되면서 (하지만 부자들은 자신을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경제적 인간은 필연적으로 더 이상 작동 불가능한 흉한 괴물로 전락해버렸다. 특히 몇 세대 만에 처음으로 닥친 최악의 경제 위기 이후에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자유 시장 기반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맹목적 집착은 시들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경향은 오히려 더욱 심화되면서 그렇잖아도 무능력한 사회로부터 남은 생기를 빼앗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의 구성원들은 하나둘씩 미라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이름도 없이, 모습을 감춘 채, 혼자서.
어떤 면에서 이사벨라는 사회적 안전망 사이로 실족한 또 한 명의 노인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우 비극적이지만 우리가 최근에 목격한 전쟁, 다시 말해 통제 불능의 경제적 불평등이나 수많은 기업이 저지른 막대한 환경 파괴로 인한 삶과 죽음의 문제는 더더욱 끔찍하다. 내 생각에 이사벨라에게 벌어진 일은 2007년 이후로 모든 사람에게 악몽처럼 다가온 현실을 상징하는 작지만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고장나버린 경제 이데올로기나 실패한 신자유주의적 담론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미래도 없이 일그러진 자포자기의 세계, 그 무너진 현실을 입증하는 사례였다. 분노와 허무주의로 얼룩진 가치관. 돈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교환가능한 모든 물건을 향한 끝없는 사유화의 욕구. 내가 앞서 펴낸 책에서 말했듯이, 경제적 인간이 죽었다는 말은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은행가나 코카인에 취한 부동산 업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회의 저변을 이루던 구성원, 그리고 사람들 대부분이 아무 의심 없이 추종하던 규범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사악한 경제적 독단과 익명화된 상업적 환경하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처럼, 이사벨라의 사례 역시 사회가 ‘공공公共’이라는 개념을 빼앗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서구 세계에서 권력을 계승한 정권들은 지칠 줄 모르고 ‘공공’과 투쟁을 벌였다. 이는 단지 국가가 소유한 자산들이 미간의 손에 넘어가는 일이나 일상적 삶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상업화 현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공공 영역’ 자체와 전쟁을 벌여왔다. 예를 들어 지배층 엘리트들은 ‘복지국가welfare state’라는 개념이 처음 대두됐을 때부터 이를 맹렬히 반대했다. 사회 복지, 실업 지원, 보건, 지방의회, 도서관, 공원 등 이른바 ‘공익公益’과 관련된 모든 것은 애초부터 극심한 공격에 시달렸다. 그들은 긴축재정이라는 명분하에, 공익이라는 개념을 대중의 품위 있는 삶을 위한 투자로 생각하기보다 재정적 부채 또는 적자의 원천으로 재정립하려고 애썼다. 지배층의 신념은 명확하다. 사회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선하든 악하든 주로 악한 쪽이다 사유 경제를 신봉하는 부유한 개인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조금이라도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노쇠하고 괴팍한 집산주의자集産主義者일 뿐이다. 물론 오늘날 모든 사회적 관계가 이 경제적 황무지에서 남김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수많은 관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들 대부분이 부정적 관계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사벨라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트집을 일삼는 공무원이나 테스코의 주차장 직원과 상대하느니 차라리 세상에서 사라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관계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공공이라는 개념이 자취를 감추면서, 모든 개인은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자들에 의해 사회적 보호 장치로부터 격리되고 있다. 그리고 2007년 이후에 발생한 최악의 경제 상황 속으로 내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이사벨라 퍼브스의 비극은 그릇된 개인주의가 가뜩이나 병들고 쇠약해진 사회를 어떻게 철저히 망가뜨리는지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현 사회를 보다 광범위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거대한 기업이 세상을 지배하고, 근시안적인 국가 기구가 우리의 삶을 커다란 슈퍼마켓처럼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모습으로 바꾼다면, 세상에는 새로운 형태의 퇴화가 시작될 수밖에 없다. 혁신은 멈추고,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기술들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민주주의는 한낱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리고, 모든 사람은 감당 못할 부채를 중세의 고문 기구처럼 목에 걸고 다닐 것이다. 한때는 젊고 활기에 넘쳤던 수많은 이사벨라들은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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